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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8일 19시 26분 등록

금강(錦江)을 찾았습니다.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는 가을 어느 날입니다. 맑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햇빛이 따사롭습니다.

나는 금강을 가로지르는 한 다리인 적벽교(赤壁橋) 한 가운데 서서 금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태어나서 자란 곳, 부여. 이 곳은 부여는 아닙니다. 그러나 금강은 이곳 금산을 지나 공주를 거쳐 부여로 흘러들어갑니다. 당신이 보았던 강과 같은 강줄기를 보며, 당신을 만나고 공감하려 한다면 조금은 억지일까요.

내가 알고 있던 당신의 시는 <껍데기는 가라>가 거의 유일무이였습니다. 그 배경은 잘 몰랐더라도 알맹이와 본질을 역설하는 메시지는 강하였습니다. 사실 이 시가 당신의 시인 줄은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며칠 간 당신의 시들을 접하였습니다. 가슴을 파고 드는 시가 이렇게 많을 진대, 그간 당신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당신은 금강을 제목으로 장편의 서사시를 썼다지요. 나는 지금 여기 눈 앞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을 바라보며 당신의 시를 떠올려 봅니다.

당신은 당시 민중이 처한 현실을 아파하고 비판했습니다. 나 역시 당신의 시를 보며 같이 가슴이 저렸습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一生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969), 錦江 제9장 中.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으로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맡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果樹園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 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 진달래 山川 (1959) 中.


어느 대목에서는 뜨끔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문제는 지금도 여전하군요.

반도의 등을 덮은 철조망
논밭 위 심어놓은 타국의 기지.

그걸 보고도
우리들은, 꿀먹은 벙어리
눈은 반쯤 감고, 月給의
행복에 젖어
하루를
산다.

- 錦江, 제13장 中.


그러나 당신은 아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럴 수만은 없었습니다. 결연한 의지 또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철저히 죽어야 했던, 그러기를 다짐했던 당신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죽였다.
비 오는 날 새벽 솜바지 저고리를 입힌 채 나는
나의 학대받는 육신을 江가에로 내몰았다.
솜옷이 궂은 비에 배어
가랑이 사이로 물이 흐르도록 육신은
비겁하게 항복을 하지 않았다.
물팡개치는 홍수 속으로 물귀신 같은
몸뚱어리를 몰아쳐 넣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거대한 산맥 같은
휩쓸려 그제사 그대로 물넝울처럼 물결에
쓰러져 버리더라 둥둥 떠내려 가는 시체 물 속에서
주먹 같은 빗발이 학살처럼
등허리를 까뭉갠다. 이제 통쾌하게
뉘우침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너무 얌전하게 나는 나를 죽였다.
가느다란 모가지를 심줄만 남은 두 손으로
꽉 졸라맸더니 개구리처럼 삐걱! 소리를 내며
혀를 물어 내놓더라.
江물은 통쾌하게 사람을 죽였다.

- 江 (1970) 全篇.


그러나 차마 미워하고 괴로워할 수 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만 나타낼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이 감정들을 다시 거두워들이며 한 발 물러나는 당신도 보았습니다. 당신이 이러하였음이 더욱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아니오
미워한 적 없어요,
산 마루
투명한 햇빛 쏟아지는데
차마 어둔 생각 했을 리야.

아니오
괴뤄한 적 없어요.
陵線 위
바람 같은 음악 흘러가는데
뉘라, 색동 눈물 밖으로 쏟았을 리야.

- 아니오 (1963) 中.


그러면서 당신은 세상을 성실히 살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숨어 있지 말 것을,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세상에 뜻을 펼 것을, 그래야 의미있는 결실이 있을 것을 일깨워줍니다. 정신이 들어요. 슬렁슬렁 살지 말 것을. 이는 시간을 초월하는 메시지군요.

生의 馬車를,
불성실하게 끌어온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발바닥 붙이지 못하고
당황한다,

임종 앞에서
당황하는 사람은

아닌 줄 알면서

안될 줄 알면서도
무엇인가,

아무꺼구
손에 잡히는대로
이 약
저 약, 목에 주워넣는다.

- 錦江, 제20장 中.


바람버섯도
찢기우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새 씨가 된다.

그러나
찢기우지 않은 바람버섯은
하늘도 못보고,
번식도 없다.

- 錦江, 제23장 中.


당신의 시 중 지금 내 마음을 너무나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있으니,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나 배경은 다를 것이지만, 지금 내 마음이 이와 같을 것이에요. 자기를 이루던 무엇 하나가 자리에 못 머물고 떠나가는 것을,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동시에, 아니면 그도 아닌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음일까요. 다음에는 이 감정들이 모두 어울려 섞여 조화롭게 흘러가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해와 눈보라와 사랑과 呪文,
이 자리 못 물고
굴러떨어져 갔음은
아직도 내 峰우리 치솟은 탓이었노니

글면 또 허물으련다.
세상보다,
백짓장 하나 만큼 낮은 자리에

나의 나
없는 듯 누워.

고이 천만년 내어 주련마.
사랑과 미움 어울려 물 익도록.
바람에 바람이 섞여 살도록.

- 나의 나 (1962) 中.


이제 다시 당신을 봅니다. 지금은 없는 신동엽 당신을 떠올리면 나는 이 구절이 스쳐 지나갑니다. 아니 어느 샌가 내 가슴에 와서 박혔어요.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당신이 이러할 테죠.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세상을 디디며 뚜벅뚜벅 걷는 사람은 바로 신동엽 당신이었습니다.

세상에 抗拒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威嚴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의 세상을 밟아 디디며
포도알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 빛나는 눈동자 (1963), 錦江 제3장 中.



단풍이 고와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눈이 부셔, 단풍을 제대로 보려면 해질녘까지 기다려야 되겠습니다. 오늘은 어쩌면 이렇게 맑을까요. 바람도 없습니다. 강물이 참 잔잔히도 흘러가네요. 이렇게 고요하고 조용하고 맑은 날씨라서 그런가요. 당신이 겪은 아픔과 비판과 의지가 역설적으로 강하게 다가옵니다.

나는 이제 당신과의 여행을 접고 다른 저자의 다른 책을 만나러 가야 한답니다. 그런데 어찌 자꾸 내 옷자락을 끄는지요. 하지만 한 번 당신을 만난 나는 당신을 마음 깊이 담습니다. 마음의 강을 흘러갑니다.

따뜻한 감촉으로
손을 스쳐가는 이 강물은

가만히 물결에 몸 맡긴 저 물고기
훑고 지나가는 이 강물은

돌 둥글리고 그곳에
미끈한 이끼 만들고 가는 이 강물은

옛날의 그 물도, 앞날의 그 물이 아닐지라도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흘러가는 강물이어라.
영원을 흐르는 강이어라.
하나의 강이어라.
IP *.138.2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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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0.28 21:34:42 *.86.177.103
때로는 숨고 싶지만 다시 힘을 얻는다. 내 저린 가슴에 와 닿는 붉디 붉은 염을 소롯히 안으며 다시 밖으로 나선다. 이 맑은 가을날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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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28 22:09:02 *.128.229.81
너는 시를 잘 모른다 하지 않았느냐 ? 뭔 소린지 알지 못한다 하지 않았느냐 ?

금강에 가니 흐르더냐 ? 강물에 네 껍데기 하나 버리고 왔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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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0.29 06:59:26 *.60.237.51
내가 잠이 덜 깬건가, 놀라서 눈을 비볐다. 다시 한번 누나의 글임을 확인했다. 와, 한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을이 오는구나. 익어가는구나. 변화의 바람결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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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곤
2007.10.29 10:08:06 *.92.16.25
좋다. 가을의 눈부신 감성이 네게로 왔구나. 강물처럼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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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10.29 12:47:44 *.244.218.10
사부님. 무섭습니다.
제가 '저는 시를 잘 모릅니다.'라고 말 했던 걸 어떻게 기억하시고,,,

한 번에 여러 시를 읽고 북리뷰와 이곳에 들어갈 '가슴으로 들어오는 구절'을 고르는데만 많은 에너지를 썼습니다. 칼럼 시작하기 전에 이미 탈진하였습니다.

역시 시는 몰아쳐서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음미할 여유가 있어줘야 합니다. 그랬다면 여기에 좀 더 풍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을텐데. 아쉽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전과는 다르게 가슴으로 들어오는 시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아직 시가 무엇을 말하는지.. 멀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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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007.10.29 13:07:00 *.231.50.64
오.. 호정 그냥..그냥.. 너무 좋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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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2007.10.31 07:32:31 *.72.153.12
호정이 언제부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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