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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9일 06시 25분 등록
가을이 오는 것은 눈으로 알 수 있다. 푸른 녹색의 향연을 주는 시원한 나뭇잎이 환하게 빛나고 초록에서 탈색의 과정과 변색의 과정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눈의 폭이 넓어지고 현란하기만 하다. 가을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아침부터 부리나케 밥을 준비하고 물을 끓이고 등산준비로 부산했다. 사람이 많지 않으면서도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재작년 가을에 올라갔던 계룡산 줄기가 생각이 났다. 고즈넉하면서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 걸음이 빠르게 걷지 않고도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 바로 내가 찾던 곳이었다. 대전에서 공주방향으로 가다가 동학사 들어가는 길을 지나 조그마한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상하신리 길이 나온다. 계룡산은 워낙 신이 많아서 동네 위에 사는 신을 상신이라고 하고 밑에 동네에 사는 신을 하신이라고 했나 보다.

동학사로 들어가는 길은 차가 많아서 혼잡했다. 교차로를 살짝 벗어나니 탁 트인 시야 앞에 알록달록한 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산에서 가을의 냄새를 맡으려면 사람들이 적어야 한다. 발자국의 진동도 없어야 하고 귀를 거슬리는 사람들의 잡담도 없어야 한다.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르고 차를 주차하고 분주하게 길을 잡고 걸어 올라간다. 오랜만에 산에 가서 그런지 원영과 수현은 약간 긴장을 하면서도 즐거운 눈치다. 오늘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받아보니 좀 서둘러야겠다. 등산로로 접어들자마자 산은 가을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모든 나무들이 저마다의 고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함박꽃나무의 연두색 잎은 아래쪽의 진한 연두색에서부터 노오란 연두색까지 높이에 따라 오묘한 색을 내품고 있었다. 연한 연두색의 흐릿한 색 속에서 빨간 단풍나무 한 그루가 열정을 뽐내고 있었다. 같은 색이면서도 자세히 보면 모두 다른 색이었다. 벌써 눈이 즐거워진다. 평범한 조그만 능선일진대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문득 선생님이 말씀하신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자연이 우리를 설득하는 방식은 늘 같다. 먼저 우리를 감탄하게 하여 혼을 빼놓는다. 상상 너머의 매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다음, 아주 ‘자연스럽게 마음을 굴복시키고 무릎 끓게 한후 신의 음성을 불어넣는다. 이 아름다움이 보이느냐, 너의 초라함이 보이느냐?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157p)


그렇다. 막상 기막힌 아름다운 장면에서 숨이 멎을 것 만 같았다. 평상시 흔하게 보아오던 산의 한 자락이었을 뿐이었는데. 이러한 놀라운 장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무는 겸허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 무더운 태양하래 힘을 힘껏 튀어 자신을 키웠고, 이제는 겨울을 앞두고 다시 깊은 잠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었고 성장을 도와주었던 잎들을 떼 내어야 한다. 일시적인 죽음의 순간, 화려함을 걷어내고 다시 커다란 고난을 뛰어넘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잎을 모두 쳐내고 내년 봄에 다시 돌아오리라는 굳센 약속을 한 나무들도 간간히 보인다.

가을은 떨어지는 낙엽의 궤도처럼 정처 고독한 냄새가 난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그들에게는 가을의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느낄 때 찾아오는 외로움 보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떠날 때 더 큰 고독이 찾아온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오는 혼잡함과 혼자 있어 느끼는 고독이 경계가 늘 아슬아슬 했다. 숨이 턱 밑 까지 차오른다.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숨을 돌려준다.

어느새 남매탑이다. 정상에서 올라온 길을 바라보니 까마득하다. 한 걸음, 한걸음 발걸음이 이런 거창한 역사를 이루었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왔던 수많은 길들이 보인다. 어떤 길은 넓어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도 있었고, 어떤 길은 겨우 한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는 조그만 길도 있었다. 어떤 길은 바닥에 있는 돌이 평평해진 사람들이 아주 많이 다닌 길도 있었고, 어떤 길은 돌과 경사가 높아 사람들이 다른 우회도로를 만든 길도 있었다. 편하게 쉬운 길을 가면 평범한 곳에 이르리라. 나는 편하고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을 택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가기 싫어 억지로 가지는 않을 것이며, 편한 길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프로스트의 두 갈래의 길이 생각이 난다.

수풀에 두 길이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
나는 덜 다닌 길을 택했다.
그랬더니 큰 차이가 있었다.


다시 내려갈 시간이다. 정신없이 올라가면서 본 풍경과 여유 있는 하산 길의 풍경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올라갈 때는 나무들을 올려 보았지만 내려올 때는 나무들이 시야의 아래쪽에 있다. 내려 보이는 나무들의 커다란 물결이 눈을 어지럽힌다. 가을 냄새를 가슴에 가득 품었다.
길에 대한 생각에 잠시 내가 왔던 길을 다시 돌아다 본다.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길 가는 자의 노래 (류시화)
IP *.118.10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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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0.29 12:23:41 *.75.15.205
원영이와 수현이랑 너무 좋았겠당.

나는 묻고 싶네. 어떻게 살다 가야 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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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30 09:30:40 *.128.229.81
내가 기억하는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의 이 대목 번역은

훗날 어디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할 것입니다
숲 속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어요
그리고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선택했지요.
그 후로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has made all the differece


영훈이 시를 하나 써 보아도 좋을 뻔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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