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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9일 08시 55분 등록


#1. 강(江)

젠장, 이번 주는 바빴다. 시간이 마구 흘러갔다. 야근을 하고, 제안서를 쓰고, 수업을 듣고, 과제를 했다. 꼭 참석하고 싶었던 모임에 가지 못했고, 이 때문에 '나는 회사에 묶여있는 몸이구나', 하는 실감도 들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의 강연을 들으며 무형적인 '문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고, 우연히 어느 건축가 할아버지를 만나 '변화'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했다.

목요일 밤에 만난, 건축가 할아버지는 열정적이었다. 그는 원래 수업을 진행하는 강사 대신에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때문에 수업에 흥미가 떨어진 나는 다음 날 제출해야 할 보고서의 흐름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개요를 짜느라 노트에 이리 저리 낙서를 하고 있는데, 그의 한마디가 나의 마음을 꿰뚫었다. "직장에서는 그 무엇 하나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지금 왜 이 자리에 있는가? 무엇 하러 수업을 들으러 왔는가? 조금이라고 변화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렇다면 일단 이 순간에 빠져들어보자. 여기서도 회사에 묶여 있지 말고 저 분의 말씀을 들어보자.' 나는 노트를 내려 놓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또 몇 마디를 던졌다.

"지금 이 순간 나한테서 무슨 지식을 하나 더 얻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여기에 멍하니 앉아 있느니, 차라리 밖에서 새로운 시도 하나를 더 해보는 게 낫다. 왜 이 수업을 듣고 있는지를 생각해봐라."

"훌륭한 선생은 많은 지식을 전달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혁명가'처럼 듣는 사람을 충동질해서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다. 학생들을 움직이게 해야 진짜 스승이다."

수업의 막바지에 나는 그 분께 '건축'이 무엇이냐고 여쭈었다. "건축은 삶이다. 몸이 건축이다. 사람의 '생(生')에 가장 가까이 있고, 또 '몸'에 가깝게 있는 것이 건축이다. 무엇이든 그렇겠지만 사람을 잘 알아야 건축을 잘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재미있다고 했다. 혼자서 놀 수 있어서 너무 즐겁다고 했다. 한 분야에 오랫동안 마음을 쏟으면 '선을 그으면 그냥 설계도가 나오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고 말씀했다.

두꺼운 종이에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굴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잠언을 직접 써서 학생들에게 나눠 주면서 강물 속에 뛰어들라고 했다. 그렇게 늦은 수업은 끝이 났다. 대학로의 밤길은 오랜만에 내리는 비에 젖어 검은 강처럼 흐르고 있었다.

"… 나는 나를 죽였다. / 가느다란 모가지를 심줄만 남은 두 손으로 / 꽉 졸라맸더니 개구리처럼 삐걱! 소리를 내며 / 혀를 물어 내놓더라. / 강물은 통쾌하게 사람을 죽였다." **





#2. 하늘

금요일 오후, 회의가 끝난 뒤, 충동적으로 회사 동료들과 함께 한국 시리즈가 진행되고 있는 야구장을 향했다. 나는 야구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또 지금 한국시리즈를 펼치고 있는 두산이나 SK의 팬도 전혀 아니다. 다만 갑자기 푸른 잔디가 시원하게 깔려 있는 야구장을 보고, 사람들의 시끄러운 함성 소리를 듣고 싶어졌을 뿐이다, 또 이제는 다른 회사로 옮긴 예전의 상사와 동기 한 명이 보고 싶어졌을 뿐이다.

사람들로 가득한 전철을 타고, 또 사람들로 가득 찬 야구장에 들어섰다. 관중들의 함성으로 귀가 먹먹해졌고, 앉을 자리도 없어 난간에 서서 치킨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경기 내용은 싱거웠지만 야간 조명으로 밝혀진 푸른 잔디는 상쾌했고, 둥근 경기장 위 밤 하늘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깡,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야구공을 보며, 신나는 음악 소리와 양팀의 응원 소리를 안주 삼아 들이키는 맥주는 더할 나위 없이 시원했다.

경기가 끝나기 전에 같이 경기를 보던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야구장을 빠져 나왔다. 관중들의 함성을 뒤로 한 채 다시 사람들로 가득한 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어깨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신동엽 전집을 읽었다. '금강(錦江)'을 읽으며 가끔 눈 앞이 먹먹해졌고, "내 일생을 시로 장식해봤으면. 내 일생을 사랑으로 채워 봤으면. 내 일생을 혁명으로 불질러 봤으면."하는 그의 바램을 읽으며 잠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또 한차례 막연한 충동에 이끌려, 창 밖 풍경이 보이는 전철역에서 내려 잠시 걸었다.

어두운 개천 가 가로수 길을 걷는다. 나는 길이 된다. 묵묵히 길을 밝히는 가로등이 된다. 행인들의 발에 밟혀 바스락, 부서져가는 낙엽이 된다. 한 구석에서 어설프게 담배를 피어 물고 하얀 연기를 내뿜는 고등학생이 된다. 가을 밤 하늘이 된다.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전철의 덜커덩거리는 울림이 된다. '이렇게 계속 걷다 길을 잃으면 택시를 타면 되겠지.' 아주 잠깐 더 걷는다.

집에 돌아와 씻은 뒤, 뒹굴 뒹굴 거리며 오랜만에 TV를 켠다. 아주 오랜만에 '씨네마 천국'을 본다. 그 프로그램에서 영화감독 '이명세'를 만난다. 그의 영화를 보고, 그의 인터뷰와, 후배 감독들이 그의 영화에 대해 논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든다. 꿈 속에서 어둠 속의 은빛 검이 내 붉은 심장을 벤다. 오전 내내 일어나지 못해 끙끙대며 늦잠을 잔다.

점심 때, 아내 친구의 돌잔치에 가기 위해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샤워를 했다. 집을 나서기 전, 타자가 서툰 엄마가 내 글 아래에 달아놓은 댓글을 읽는다. "이런 내면의 숨은 끼를 다 풀어 그리고 쓰고 한다면 윤이 마음속 응어리가 풀려 조금은 자유로워 질것 같은데....."

그래, 설령 최고가 되지 못하면 어떠랴. 한번 가보자. 무엇이든 풀어내보자. 일단 부딪혀보자. 집을 나서니, 가을 햇살이 눈부셔 눈을 뜰 수가 없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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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의 시 제목
** 신동엽의 시, '강' 中
*** 신동엽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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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0.30 08:39:14 *.70.72.121
난 그대 내자가 그리 쓴 줄 알았었다. 어머님 자상하시기도 하다.
우리 이러다 정말 부모님 잔치 한 번 해야 될 것 같다. 사랑도 성원도 너무들 각별하시니 옆에서도 감동이다.

누구든 3기 중에 제일 먼저 책내는 사람 축하 모임에는 부모님들도 동반 할까? 도윤아, 얼른 써라. 그대 어머님 고운 모습 뵙고 싶으네.

어머님, 언제 한 번 오시지요. 꾸벅. 윤아, 이 번 꿈 벗 모임에 모시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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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30 09:27:30 *.132.71.8
이번 가을에는 가출 안하냐?
마음으로는 벌써 몇번 나갔다 온 듯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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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0.30 11:12:38 *.249.162.56
선이 누나, 제가 이번 꿈벗 모임에 꼭 가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회사에서 준비하는 콘서트 날짜랑 겹쳐서 참석이 어렵습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정화누나, 일하고, 책 읽고, 리뷰쓰느라 바빠서... 잠깐, 잠깐 가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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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주
2007.11.12 21:51:16 *.4.156.99
너의 글을 읽고 너를 가르켜야 한다는 어미의 마음은 한갖 부질없다는
생각 이든다. 윤이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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