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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9일 07시 11분 등록
20세기가 전문가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통합의 시대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 가지만 잘하기보다는 영역을 넘나드는 통찰이 필요한 시기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변화를 20세기 중반에 이미 예견한 사람이 외국이 아닌 바로 우리나라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과학자도 아니요, 미래학자도 아니요, 정치가는 더욱더 아닙니다. 바로 시인이었다는 점이 매우 충격적입니다. 항상 행과 불행은 연이어 오는가 봅니다. 불행히도 그분은 어려운 시기에 빛을 보지 못하다가 젊으신 나이에 요절하셨습니다. 이제 서론은 빼고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詩業家들과 歌人들과 詩人


여기서 <詩人>이라고 말할 때의 <人>字는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다. 돈벌이와 관계있는 소위 <쟁이>들의 직업명사 끝엔 <家>나 <師>가 붙는다. 이발사, 구두수선가, 요리사, 의사, 초상화가, 성악가, 소설가, 철학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유독 詩人만은 詩業家라고 부르지 않고 <人>字를 붙여준다. 그리고 그 옆에 <哲人>이 역시 <人>字를 달고 훨훨 소요하고 있다.

詩人과 哲人. 무슨 業家가 아닌 詩人과 哲人들은 과연 무엇을 天職받고 태어난 사람들일까. 哲人은 人生과 세계의 본질을 그 맑은 예지로 통찰하고 비판하는 사람이다.
詩人은 인생과 세계의 본질을 그 맑은 예지만으로써가 아니라 다스운 感性으로 통찰하여 言語로 昇華시키는 사람이다.

오늘의 문명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分業>일 것이다. 설교는 목사가, 聖歌는 聖歌隊가, 聖書는 성서 전문연구가가 떠맡아 가고 있다. 한 사람의 人體에도 이미 수백 명의 分業醫師가 엉겨 붙어 제가끔 눈, 코, 귀, 아랫배, 윗배 가운데 한가지씩만을 떼어가지고 달아났다. 세상은 盲目技能業의 세계로 화하고 말았다. 멀지 않아 손톱, 발톱 미장전문의가 새로 나타나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세상이 되었다.

철학교수는 있어도 哲人은 없다. 詩業家는 있어도 詩人은 드물다. 商業文化, 物質萬能의 도시문화 속에서 詩人스런 素性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란한 영업 간판들에 매료되어 手工藝品 상점 옆에다 <詩業> 간판을 붙여 놓았다. 그리하여 이웃 가게 사람들이 손끝으로 인형, 도자기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은 언어를 재료로 하여 손끝으로 言語商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경우 그들은 <詩人>이 아니라 <詩業家>인 것이다.

歌人들의 세계가 있다. 두뇌의 참여를 거부하고 그 부드러운 가슴만으로 노래한다. 손끝재주를 부리거나 기구망신스런 흉내를 내려고 하거나 단어상자를 쏟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는 눈>이 없다. 세계의 본질을 통찰하는 눈. 그리하여 自我를 갈아엎는 부단한 修道者의 자세. 노래는 있어도 參與, 즉 자기와 자기 이웃에의 인간적인 애정,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詩人>에게 기대해 본다.
詩가 呪文 대신으로 씨족이나 部落共同體의 정신적 주인역을 맡아가고 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한 사회에서의 詩는 정치, 종교, 과학의 종합적 顯現體로서 민중 앞에 빛났었을 것이다. 인류 문화의 위대했던 黎明期에 우리는 이러한 詩人의 王國을 가졌었다. 聖書나 佛經, 水雲의 <東經大典> 또는 기타 여러 가지의 예언서 속의 언어들(나는 그것을 詩라고 믿고 있다)은 지금까지도 2천여 년 전의 그 향기높은 예술적, 학술적 영향력으로 東西의 많은 문명 민중에게 짙은 救援의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다.

오늘의 詩人들은 정치는 정치 盲目技能者에게, 종교는 종교 전문기능자에게, 사상은 직업교수에게 위임해 버리고 자기들은 단어상자나 쏟아놓고 앉아서 핀셋트 장난이나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와 이웃과 세계, 그 인간의 구원의 역사밭을 갈아엎어 우리들의 內質을 통찰하여 그 영원의 하늘을, 그 영원의 평화를 슬프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힘든 일이지만 선지자적인 예지가 있었습니다. 40년이나 지난 지금 業家들의 싸움으로 피바다가 되고 있는 현실을 너무나 냉철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글은 왜 쓰려고 하는가? ‘人’이 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業家’가 되기 위한 것인가?

지금 누구나 사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럼 여기서 사람은 ‘人’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業家’를 말하는 것인가요? 깊어가는 가을에 세월을 초월한 한 선지자의 질문에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IP *.212.167.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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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29 08:34:01 *.128.229.81
창용아, 인용문이 75%가 되면 그 글을 네 글이냐 그 사람 글이냐 ?
도용가가 되고 싶어그러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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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07.10.29 10:26:09 *.93.113.61
그렇게 되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신동엽 선생님이 생각하는 시인의 역할에 대해 더 잘 알아보자고 한 일이 오히려 나의 생각을 죽여버리는 꼴이 되었습니다.
역시 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네요. 더 열심히 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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