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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9일 08시 35분 등록
월요일 아침, 집.
아르바이트를 빠질 결심을 했다. 일찍 전화를 했다. 혹시나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불러서 쓸 수 있도록 미리 알려주는 것이 좋을 듯 했다. 정오까지 마쳐야 할 리뷰와 칼럼을 하지 못했다. 긴장이 고조되다가 전화 한 통화로 진정되었다.

월요일 오후, 집.
아르바이트 빠지고 시작한 일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늘 예상했던 시간보다 2배정도는 많이 든다. 어떤 때는 3배도 든다.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지 계산이 잘 안되는 모양이다. 내 능력을 잘못 판단했거나, 중간에 집중하지 못했거나, 혹은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변수, 책이 너무 어렵다 거나 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화요일 아침, 도서관, 안국동에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집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 아침 9시. 도서관 문여는 시각이다. 일찍 도착했지만 9시가 되지 않았다고 나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9시가 되어서 서둘러 검색을 하고 찾았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책이 눈에 뜨지 않는다. 사서의 도움을 받아 찾아서 나왔다. [로버트 프로스트 자연시:그 일탈의 미학]이다.
다시 안국동으로 향한다. 시집을 빌려준다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다.
10시까지 출근을 해야 하는데 일터와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을 받아 들고는 냅다 뛰었다. 바쁘다. 차 안에서도 책에다 눈을 막고 있다. 바쁘다. 마음이 쉬지 못하다니... 이런.

화요일 오후, 거리에서.
알바를 마치고 화실로 가는 길. 갈등이다. 몸이 몹시 피곤하다. 화실로 가려면 시내버스를 타고 가서 지하철로 갈아타야 한다. 그런데, 시내버스에서 졸면서 내려서는 집으로 가는 마을 버스 정류장으로 걷는다. 다시 마음을 고쳐 먹고, 자더라도 화실 가서 자자라고 되돌아서 걷는다.

화요일 오후, 화실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화실은 라디오 소리 속에 침묵하는 연필 소리와 붓을 통에 씼는 소리만 있다.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잠시 눈을 부친다. 라디오의 프로그램이 바뀌는 시간이 되면 강한 오프닝 음악에 잠이 깬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화들짝.
책을 뒤적여 연습할 것을 찾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책 속의 그림들은 나를 사로잡지 않는다. 사로잡은 그림 앞에서는 자신감이 뚝. 과연 내가 이걸 표현해 낼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일어난다. 책에 나오는 그 표현법으로는 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몇번 하다보면 되겠지.
색조합 연습을 한다. 몇 차례의 연습으로 예전보다는 쉽게 색을 만들어내었고, 채도가 높아졌다. 회색 만들기는 여전히 어렵다.

수요일 아침, 거리에서
버스에서 내리면서 본 책에 대해서 속으로 되뇌인다. ‘또 그소리다. 젠장.’ 아침부터 펼쳐든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앞부분에는 신화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한 탐험과 영웅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프로이드와 오이디푸스왕에 대한 이야기가 또 등장이다. 젠장. 또 그 이야기이다. 그게 대체 뭔데. 자기가 그걸 겪어 보기나 했어?
책에 눈을 박고 걸으면서 웃다가 욕을 퍼붓다가 한다. 그 이야기만 들으면 머리에 뿔 따구가 나고 입이 거칠어 진다. 이럴 때는 나무를 보는 게 상책이다. 인생이 어떻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욕을 지껄이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잘 살고 있는 나무 말이다. 무심한 그놈들이 싫다가도 좋아지는 순간이다.

수요일 오후, 화실
색지에 유화를 콩테로 베껴그리는 것을 했다. 극장의 불빛 아래 벽에 기대어 서서 생각에 잠긴 여인을 그렸다. 흑과 백으로만 나타내는 것이다. 색지는 콩테를 입히기에 적당하지 않다. 콩테는 딱딱하고 색지는 약간 오톨도톨하다. 딱딱한 것은 오톨도톨한 면에 완전하게 달라붙지 않고 작은 틈을 남겨둔다. 검은 것을 더욱 검게 만들기 위해 칠하고 문지르고 다시 칠하고 문지르기를 반복한다. 흰 것을 펴지게 하지 위해 칠하고 문지르고 다시 칠하고 문지르기를 반복한다. 휴지와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뭉뚱한 것으로 그려서 그런지, 경계들이 모호하다. 그 경계를 뚜렷히 하기 위해 다시 매끄럽게 처리하고 명암 대비를 준다. 여인은 아직 생기를 갖지 않는다. 어디에 연필을 대야 할지 보이지 않는다. 손을 씻는다. 콩테는 비누에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약간은 지저분한 손이 보기에 좋다. 뭔가에 열중해서 그 흔적이 베인 손이 되어간다는 게 기분을 좋게 한다.

목요일 저녁, 지하철에서
집을 나서기 전부터 갈까 말까를 망설이던 것을 결국 지하철까지 와서도 그 생각이다. 과연 강연 들으러 강남에 가는 것이 괜찮은 것인가. 턱없이 시간이 부족한데, 이것이 우선 순위에서 앞 쪽에 있는 일인가라고 또 한번 고민이다. 책을 펼쳐 든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집.
사람 얼굴 보며 밥 먹고 싶다. 집에서 지은 밥 먹고 싶다. 집에 내려갈까? 어머니 설악산 놀러가서 안계시다. 밥 생각, 하루만 참으면 곧 잊는다. 지금 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집밥 생각도 없어질 게다.

금요일 낮, 신촌에서
내 일상은 밋밋하다. 건조하다.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 그만그만하게 삶이 바뀐다. 아침에 눈뜨면 밥 먹고, 일터에 가고, 점심 먹고 화실가고, 집에 돌아와서는 책 읽고 잠을 잔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딘가를 한바퀴 돌아서 밤에 집에 도착해서 하루를 마치기를 반복한다.
밋밋함 속에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의문도 많지만, 꼭 그것에 답을 알지 않아도 좋다.

금요일 밤, 명동역에서.
집에 가야 한다. 집.
나의 집은 house일 뿐, home이 아니다. 몸은 가서 쉴 수 있는데, 마음은 어디가서 쉰단 말인가.
밍밍하게 가을을 탄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싫다. 늘상 해오던 것이던 불 꺼진 집에 들어서는 것이 싫어졌다.
밤의 거리를 배회한다. 가까이 있는 출입구를 두고서 멀리 돌아서 다른 출입구로 들어선다. 승강장에선 지하철을 여러 대 보내고 전화기만 붙들고 있다.
‘가을이다’는 것은 좋은 핑계 거리다. '가을이다'는 말은 때로는 '외롭다'라는 말을 대신한다.

토요일 새벽, 집.
어제 졸음을 쫓기 위해 낮에 먹었던 그놈의 커피, 젠장, 젠장, 젠장 ....
책은 더 이상 잠을 몰고 오지 않는다. 젠장. 그놈의 커피. 젠장. 젠장. 젠.장.

토요일 아침, 일터에서
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나무들은 붉게 타고 있다.
전화기에선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서 내게로 온다.
책 많이 읽고, 그림 열심히 그리고, 글 쓰고 하면 가을이 곧 지나갈거다.
외로움이 없는 시인이 어디 있고, 외로움이 없는 화가가 어디 있으랴.
가을이다. 나무만 태울 것이지, 왜 내마음까지 태워버리는지 모르겠다.
무심한 놈.가을. 빨리 지나가라.

토요일 낮, 일터에서
토요일은 일을 하지 않고, 보통은 책 읽고 정리하는 데 시간을 쓰는데, 오늘은 언니들이 사정이 있다고 대신 나와라고 해서 나왔다. 한가하다. 토요일이라 밥 먹으로 오는 사람이 적다. ‘200명도 오지 않으면 적자인데, 왜 문 열어요?’ ‘학교에서 원해서 어쩔 수 없어요.’ 200인분을 준비했는데, 130명 정도 온 것 같다. 그것도 단체 손님이 있어서 그나마 그 정도 숫자다. 토요일은 한가하고 힘들지 않다고 하던데, 손님이 반으로 줄었어도 써빙하는 사람이 1/3로 줄었으니 역시 힘들다. 오후 2시 반. 일을 마치고 밥을 먹고 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토요일 저녁, 화실에서
화실의 정기모임이 있는 날이다.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부치고 일어나서 화구를 챙겼을 때 정기 모임에 스케치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어제 그리던 것을 다시 펴놓고 지우개질을 한다. 검은 콩테 잘 지워지지 않는다. 급격하게 소실점으로 치닫던 선들을 지운다. 기차의 창틀, 의자, 천정의 각도를 비스듬하게 다시 그려 넣는다.
화실의 작가 선생님이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고 하신다. 늦은 점심 때문인지 생각이 없다. 칠하고 지우고, 칠하고 문지르고는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컴컴해졌다. 저녁을 먹고 들어온 패들이 정모에서 예정된 영화를 보려고 준비한다. 불을 껐다가 켯다하며 장비를 시험한다. 곧 영화가 시작된다. 화가 고야의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란다. 불꺼지는 것을 봐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 것 같다. 화실 벽에 투사해서 만든 스크린 앞에 앉았다.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맥주를 꺼내고, 오징어가 앞에 놓이는 동안 불이 켜졌다. 같이 그림을 그리던 몇몇이 짐을 싼다. 영화를 보지 않고 나갈 기세다. 나도 얼른 정리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영화는 포기하고 집으로 간다. 토요일 저녁이다. 영화대신 책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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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0.29 11:23:10 *.249.162.56
무심하지만 열심히 사는 일상이 마치, 별 맛 없지만 계속 손이 가는 심심한 뻥튀기 과자 같네. 열심히 씹을수록 더 감칠 맛이 날지도...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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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30 09:30:49 *.132.71.8
진하게 온갖 양념 다 넣어 확 사로잡는 그런 음식 말고 심심해서 오래두고 먹는 물김치 생각이 났다. 삶이란 그렇게 심심해도 좋을 듯 하다.
그런데 진짜 심심하다. 에구. 하루에 하나라도 뭔가를 저지르지 않으면 심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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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1.05 16:18:26 *.114.56.245
이 가을의 불탐에 빠져 한밤중에 부침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소주 한 병과 부침개를 들고 아파트 등나무 밑으로 향했다. 별과 달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를 붙잡고 -- 가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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