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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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스민 문학] - 게이의, 게이에 의한, 게이를 위한,
고등학교 동기를 만났습니다. 휴가 전의 일이죠.
그 친구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영화를 전공하려고요.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학교 선배가 이번에 책을 한 권 냈어.”
하더니, 그 선배에게서 건네받은 책을 한 권 보여주었습니다.
제목은 <여름, 스피드>였습니다.
책 표지가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 ‘헨리 스콧 튜크’의 그림이라 반가웠습니다. 헨리 스콧 듀크의 그림은 저도 책 표지로 사용하고 싶을 만큼 바다와 청년들의 모습들을 감각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작품들이 많습니다.
“근데, 그 선배 게이야.”
무언가 비밀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첩보원같은 그의 모습이 비장하기까지 보여서 저는 그만 풋- 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그날 그 친구와 거하게 술을 마시고 그 책을 다음날 떠날 여행 가방에 넣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소년이 간다> <오베라는 남자>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 편, 일본편> <뻬쩨스부르그 이야기> <용의자 X의 헌신>과 함께요.
표지에 끌린 것 이외에는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2016년에 등단한 신예작가의 첫 번째 단편소설집, 이외에는 그다지 기대할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애란 작가의 <달려라, 아비>, 그리고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와 같은 등단작이 저의 마음을 확 잡아 끈 적이 있긴 해도, 대부분의 작가들은 ‘조금 더 지켜봐야겠는걸?;’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첫 작품을 읽을 때부터 너무 놀랐습니다. 한마디로 ‘게이의, 게이에 의한, 게이를 위한’ 소설들이었던 것이죠. 이 작가를 모르는데도 모든 작품들이 다 이 작가 개인의 이야기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확- 하고 다가왔습니다. 주인공이 픽- 하고 던지는 난해한 은어들이 이해하기 힘들었음에도 자기를 전면에 드러 낸 이 작가의 용기에 그만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마치 B 급영화를 보는듯한 끈적하고 적나라한 단어와 표현들, 그리고 ‘게이 커뮤니티’를 드러낸 상황의 묘사들로 책을 덮었다 열었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때론 인상을 찌푸리는 저의 모습에 ‘아- 너는 아직 멀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작품들에 그려진 게이의 사랑과, 감정, 그리고 표현은 이성과의 사랑보다 더 깊고 성숙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성을 출세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는 비성숙한 관계에 비해 진지하고 부드러운 관계들을 보여줍니다. 사랑에 빠지고, 익숙해지고, 권태롭고, 또 편하다가, 헤어지는, 그런 과정들을 세세하게 묘사한 작가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작은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적나라한 문장도 있지만, 때로는 시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들이 책을 놓지 못하게 했고,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차분하게 사랑을 노래합니다.
저에게는 어렵고 힘든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장을 다 덮고 나니, 이 책은 하나의 ‘퀴어문학’이라는 장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그려낸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디가 사실이고 어디가 허구인지 모를 듯한 빠른 스피드와 랩을 하듯이 속사포처럼 내뱉는 주인공의 이야기들은 읽는 즐거움을 줍니다.
이 책을 덮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저는 이제 하품을 합니다. 비행기는 새벽의 노을을 뚫고 인천 공항에 덜커덩- 하면서 착륙합니다. 저의 여름은, 그렇게 스피드하게 지나갑니다. 아름다운 책들이 곁에 있어 무척이나 행복합니다.
정재엽 드림 (j.ch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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