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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7일 14시 12분 등록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 - 베다 경




#1. 그곳으로 간다.

이번 주 일요일, 회사에서 준비하는 콘서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올림픽 공원에 가야 한다. 집에서부터의 거리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과 일정을 고민하다 약간의 사치를 하기로 결정했다. 토요일, 하루를 묵기 위해 공원 옆의 호텔을 예약했다.

'가을이다!'

바쁜 일상 가운데 만나게 되는 잠깐의 여유는 참 소중하다. 요즘 애뉴얼 PT 준비다, 조직 구조 개선이다, 해서 회사가 정신 없으니 더욱 그렇다. 바람에 일렁이는 호수와 가을 단풍을 즐기며 잠시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면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다가, '그 곳으로 간다'라는 제목의 짧은 낙서를 한다.

"내 마음 속 출렁이는 그 곳으로 간다. 모든 것들, 한데 모여, 이리저리 뒤엉킨 채 뛰어 놀고 있는 그 곳으로 간다. 시퍼런 어둠 속에 무정형의 원시 생물들이 헤엄치고, 아직 미완의 상징들이 꽃뱀처럼 꿈틀거리는 그 곳으로 간다. 잔잔한 수면 아래 검은 하늘과 바다 속에서 미처 태어나지 못한 신화 속 이야기들과 함께 어울려 온 몸으로 출렁거린다.

순간, 어둠 속의 누군가 태초의 눈을 뜬다. 하나가 눈뜬다. 둘이 눈뜬다. 수없이 많은 눈을 뜬다. 번쩍이는 섬광 같은 어둠과 밝음 사이, 그 눈 깜짝할 전환 사이에서, 선과 악이 생기고, 강한 것과 약한 것이 생기고, 생과 사가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가 생긴다. '태초에 빛이 있어라!' 아니, '태초에 눈이 있어라.'

깜한 눈을 한참 동안 들여다 보았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 어둠 속의 한줄기 빛을 본 수천 개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세상의 경계를 만들어낸 그 환한 육각의 눈 속에 내가 서 있다. '나는 과연 밝은가? 아니, 어둡다.' 다시 어둠의 어둠 속으로 간다. 이제는 닫혀버린 그 곳으로 들어간다. 눈을 감고, 두렵고 질척한 마음의 길을 지나, 출렁이는 그 곳으로 간다."

'생각'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조셉 캠벨의 책을 읽다가 갑자기 왜 5억 4,300만년 전의 '캄브리아기'로 관심이 옮겨갔는지는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공원을 산책하다 만난 일렁이는 호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을이 담긴 호수, 그러나 속 마음을 알 수 없는 호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공간 이동처럼, 시간 여행처럼 나의 호기심은 신화 훨씬 이전의 시대인 고생대의 어두컴컴한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2. 캄브리아기 대폭발

캄브리아기(Cambrian Period)는 지질 구분 상으로 참 신기한 시대이다. 고생대의 첫 기인 이 시대는 약 5억 4,300만년 전에 시작하여 4억 8,800만년 전에 끝나는데, 이 기간 동안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수많은 종류(문)의 생물들이 별다른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등장한다. 이런 갑작스런 문의 증가를 일컬어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이라고 한다. 러시아의 고생물학자 페돈킨의 말처럼 이 시기에 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생명체들이 "갑자기(Suddenly), 완전한 형태로(Complete state) 출현"한 것이다.

이 유례없는 생명체의 폭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설명이 있었지만 '왜 그 일이 있어났는지?'에 대해 정확한 원인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또 같은 이유 때문에 이 시기는 창조론자들에 의해, 진화론에 대한 강력한 반증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도 이 시기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현재로서는 이 (캄브리아 화석의 갑작스런 출현에 관한) 사례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 … 어쩌면 그 사실은 여기서 말한 (진화의) 관점을 반박하는 유력한 반증이 될 것이다." *

당연히 이 시기는 지질학자와 고생물학자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었고, 또 이 시기를 주제로 다룬 흥미로운 저작들도 다수 발간되었는데 그 중 한 권이 바로 앤드류 파커의 '눈의 탄생 _ In the blink of an Eye'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원인을 설명하는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빛 스위치' 이론이다.

이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에 따르면 지질 시대는 시각 이전과 시각 이후의 두 시기로 나뉜다. 그리고 캄브리아기가 바로 그 경계에 위치한다. 태양계의 위치, 대기의 농도, 바다의 투명도 변화 등의 이유로 지구를 감싸고 있던 담요안개가 걷히고 한 순간에 하늘은 맑아지고 시계는 선명해졌다. 이처럼 빛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오감 중에서 시각의 필요성이 갑자기 증대되었고, 어느 날, 드디어 한 생명체가 눈을 떴다.

"상이 있으라! 동물세계에 완전히 새로운 감각이 들어왔다. … 더구나 이 감각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감각보다 막강해지게 될 감각이 삼엽충으로 변화하던 어느 원시삼엽충의 탄생과 함께 세상으로 나왔다. 눈을 가진 최초의 삼엽충이 출연한 것이다. 지구 역사에서 처음으로 한 동물이 눈을 떴다." **



이전까지 어둠으로 뒤덮여 있던 세계가 순식간에 밝아졌고, 이에 따라 느릿느릿 평화로이 진행되던 진화의 속도는 초고속으로 빨라졌고, 생존 경쟁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해졌다. 위의 그림처럼 거대 포식자인인 1) 아노말로칼리스가 등장했고, 다른 생명체들은 먹이 사슬의 피라미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진화해나갔다.

가령 2) 오파바니아는 5개의 눈으로 정보습득 전략을 취했고, 3) 삼엽충은 두꺼운 껍질을 통해 방어 위주의 전략을 취했다. 뾰족한 촉수를 가진 4) 할루시제니아는 공수양면 전략을 취했고, 5) 피카니아는 유연성 전략을 취해 이후 민물로 이동하고, 육지로 이동하는 담수어와 양서류의 시초가 되었다.

어떤 종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물들의 틈새를 파고 들었고, 또 어떤 종은 다른 종이 가지 못한 미개척지를 탐색해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해나갔다. 빛과 함께 시작된 각각의 진화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는 것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주제일 테지만, 이 글에선 여기 쯤에서 까마득한 캄브리아기로의 여행을 일단 멈출까 한다.

앤드류 파커에 의하면 '보지 않는다'에서 '본다'로 뛰어오른 도약이 이 모든 변화를 이끌어냈다. 마치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가 깨달았던 한 순간처럼, 아담과 이브가 한 입 베어 물던 선악과처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과 부활처럼, 그렇게 눈 깜박 하는 순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금단의 과일을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졌다. 낙원의 복락은 그들에게 닫혔고, 그들은 변형의 베일의 다른 쪽에서 창조된 세상을 보았다. 그로부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얻기 위해서는 수고해야 했다." (p. 366)

감았던 눈을 뜨자, 한데 어울려 뭉쳐있던 흐릿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차츰 또렷해지고, 나와 너로 나뉘고, 선과 악이 생겼고, 강한 것과 약한 것이 생겼다. 하늘과 땅으로 나뉘고, 생과 사가 나뉘고, 각각의 경계는 더욱 명확해졌다. '눈의 탄생'과 함께 나는 우리에서 떨어져 나왔고, 자아가 생겨났고, 살아남아서 더 좋은 먹이를 찾기 위해선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발견하고 끊임없이 계발해 나가야 했다. 캄브리아기의 시작과 함께 바다 속의 흐릿한 에덴 동산은 사라졌고, 선명한 삶의 투쟁으로 가득 찬 고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너희는, 선인(先人)이 격은 것과 같은 시련을 겪지도 아니하고 지복(至福)의 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코란의 한 구절을 생명체들의 기나긴 삶과 진화의 여정과 연결시켜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3. 눈을 감아라!

저녁을 먹고 아내와 함께 호수 주변을 걷는다. 세상이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다. 나는 잠시 멈춰 가을의 밤이 담긴 호수를 카메라에 담고, 아내는 커피를 마시며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우리 삶의 한 조각이 스쳐 지나갔다. 영원이 지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말한다. "고요한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꼭 호수 속에 있는 것 같다"고…



우파니샤드에선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과 땅과 대기 아래 있는 그는 꾸며진 존재다.
마음과 생명의 모든 숨결 또한 마찬가지다.
사물을 <영혼>으로 아는 자는 그뿐, 다른 말은 해서 무엇하랴?
그는 불사에 이르는 교량이다." (p. 356)

태초에 눈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밝아지자 우리는 어두워졌다. 자, 이제 눈을 감고 그곳으로 가라. 모든 것들이 뒤엉켜 있는 그곳, 생과 사가 하나가 되어 꼬리를 무는 그 곳으로 가라. 그 두렵고 질척한 길 속, 네 마음의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라. 길은 몰라도 우리는 떠나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얕은 삶을 살고 있는가? 눈을 감아라. 자아의 스위치를 끄고, 네 영혼의 중심을 느껴라. 어둠 속에서 눈 속의 눈을 떠라! 레트커의 시구처럼 "어둠의 순간에 눈이 보기 시작한다."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 파스키난스(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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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다윈, 종의 기원 (1872, 최종판)
** 앤드류 파커, 눈의 탄생, p. 357
***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


IP *.249.1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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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11.07 13:19:40 *.244.218.10
못말려..역시 도윤의 글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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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1.08 11:33:16 *.249.162.56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연결이 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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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찬
2007.11.09 01:59:30 *.140.145.26
내가 이런 글들때문에 감히 연구원에 도전을 못하겠다니까..ㅜㅜ 도윤의 글이 점점 익어가는 느낌이다.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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