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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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 편지는 남편의 ‘부모님 댁에 신문 보내 드리기’ 이야기였습니다. 이번 편지는 ‘대가족 책 읽기’ 입니다.
시댁은 대가족입니다. 시아버님이 십대 종손입니다. 십대 열 남매 중 네 명의 숙부님과 네 명의 숙모님, 그리고 사촌동생들이 명절이면 시댁에 모입니다. 설날 가족끼리 세배하는 것은 대가족의 큰 행사입니다. 저희 부부를 선두로 시동생들이 일렬종대로 늘어서서 시부모님 포함 총 열 분의 시어른들께 차례로 세배를 드립니다. 세배를 드리면 세배를 받은 어르신들은 덕담과 함께 세뱃돈을 주십니다.
종손과 종손부인 저희 부부는 시동생들과 맞절로 세배를 합니다. 물론 저희 부부는 시동생들에게 세뱃돈을 줘야하는 서열(?)입니다. 신혼 때 중고등학생, 대학생이던 사촌 시동생들이 이제 모두 어엿한 성인이 됐습니다. 얼마를 줘야하나 고민하다가 이왕이면 책 선물을 하자고 맘먹었고 올해로 14번째 세배책을 주었습니다. 매년 연말이면 시동생들을 떠올리며 세배책을 고릅니다. 배춧잎 몇 장 봉투에 넣어 건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세뱃돈 대신 세배책을 건네는 설날 문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시댁 문화에 맞추려 시작했지만, 해가 지날수록 시동생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며 그들이 처한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고르는 재미가 쏠쏠해졌습니다.
사촌 시동생들 중에 결혼을 앞둔 여동생이 있습니다. 작년부터 대가족이 모이면 사촌 시동생의 결혼이 화제였습니다. 그러나 부엌에서 주고받는 대화의 주제가 제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시댁에서 사랑받기’ 노하우 전수와 며느리로서 취해야 할 행동과 태도에 대한 품평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결혼하던 15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불편했습니다.
올 초 설 명절을 준비하며, 특히 결혼을 앞둔 사촌 시동생이 눈에 밟혔습니다. 곧 며느리가 될 시동생에게 특별한 책을 주고 싶었습니다. 고심하여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를 준비했습니다. 설날 시댁 거실을 가득 채운 가족들과 또 한 번의 세배 행사가 끝나갈 즈음, 준비한 책을 예비 며느리 시동생에게 건넸습니다. 책 제목을 보신 어머니께서 갑자가 한마디 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은 책이 있으면 나 먼저 보여줬어야지!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네!”
깜짝 놀랐습니다. 인정받는 며느리의 표본으로 45년을 살아오신 어머니 역시 변화를 갈구하고 계셨구나 싶어 반가웠습니다.
그동안 대가족 대화 소재가 바뀌기를 고대했습니다. 대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서열 최하위 며느리를 품평하는 대신, 대가족 부엌을 둘러싼 불편한 공기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길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그 불편함이 해소되길 바랐습니다. 일상 속에 숨겨진 여성혐오적인 부분을 꼬집는,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어머니와 저 사이, 소통의 벽을 허물어준 고마운 책입니다.
가족 문화가 다음 세대로 전해질 때,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새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해 문화를 재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기존 가족 문화에서 소중한 것들은 보존하고 변화가 필요한 것들은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간 대화가 불편하다면, 보다 다양하고 풍성한 대화 소재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현재의 가족 문화를 바꾸고 싶다면, 먼저 좋은 책 선물하기부터 시작해 보세요. 1, 2 년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고 가족 문화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10년, 15년 해가 더해질수록 변화를 체감하게 될 거예요.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네 번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
격주 월요일에 발송하는 마음을 나누는 편지 '가족처방전'은 필자와 독자가 함께 쓰는 편지입니다. 가족 관계가 맘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계시다면 메일로 사연을 보내주세요. 마음을 다해 고민하고 작성한 가족처방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김정은(toniek@naver.com)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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