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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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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22일 00시 14분 등록
울보 승오에게

아직 힘들어하고 있니? 여전히 슬픔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니?
늘 함께 있지만 네가 어떤지 알아채기가 힘들구나. 가까이 있지만 등을 마주댄 듯 우린 다른 곳을 볼 때가 많으니 말이야. 그래, 주어진 날들을 어떻게 지내고 있니?

오늘은 내 안의 어디선가 울고 있을 너에게 편지를 써 보려고 해.
가까이 있기에 전하지 못한 말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진심을 담아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려구. 그럼, 네가 한번 고개를 돌려 바라봐 주지 않을까? 다시 한번 예전의 그 순수한 미소를 보여주지 않을까?

우리 이번 가을 참 힘들었다. 그치?
외로워서 힘들었고, 눈물이 나서 힘들었고, 안타깝게도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어 힘들었어. 까닭을 알 수 없는 것 - 그게 참 힘들더구나.

하늘은 온통 쪽빛이고 바람은 선선한데 누군가 곁에 없어서였을까?
키가 작고 코를 벌렁거리며 장난치기를 좋아하던 그 아이가 자꾸 생각나서였을까?
사람들 앞에 서면서 혹시나 강의에 재능이 없을까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면 말하는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사실 이젠 생각하는 것에 지쳤어.

어쩌면 신비에는 결코 해답이 없나봐. 그러니까 신이 숨겨놓은 것(神秘)이라고 부르나봐. 신이 숨겨 놓았기에 사람은 원인을 찾을 수 없고, 다만 그 주위를 맴돌 뿐이지. 네 고통을, 그러니까 나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고, 그냥 너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으면 어떨까? 나는 너의 가장자리에, 너는 나의 가장자리에서 온전히 신비를 받아들인 채로 말이야. 고통받는 우리를 향한 신의 사랑은 우리를 '고치는'게 아니라 함께 고통받음으로써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일지 몰라. 우리 고독의 가장자리에서 존경과 믿음을 가지고 서 있음으로써 우리는 신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당신은 우울증을 당신을 망가뜨리려는 적의 손아귀로 보는 것 같군요. 그러지 말고 당신을 안전한 땅으로 내려서게 하려는 친구의 손길로 생각할 수 있겠어요?"

파커 팔머가 우울증에 시달리며, 매일 매일을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치료가가 해준 말이 가슴에 남는다. 너도 듣고 있지? 그래, 어쩌면 이런 우울함을 친구로 생각하라는 제안은 말도 안되는 소리같지만 사실일지도 몰라. 애니 딜라드의 말대로 ‘자기 내부에 있는 어둠의 괴물들을 타고 아래로 계속 내려가면’ 우리가 보지 못한 중요한 한 지점에 도달하게 될 테니 말이야.

신은 하늘 위 어딘에 있지 않을꺼야. 틸리히는 신은 ‘존재의 토양’이라고 말했다지? 신에게 이르는 길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게 아닐까? 아래로, 땅으로 내려서는 것이 완전함의 방향일 수도 있겠다 싶어.

사부는 "방황을 할 때에는 깊이 하거라" 라고 말했어. “하늘은 파랗지만 너는 계속 울어라” 라는 전화기를 타고 들어오는 웃음 섞인 목소리도 농담은 아니었을꺼야. 그런데 처음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가슴을 움직이는 말이긴 했지만, 왜 그런지, 어떻게 하는지 알수 없었거든. 이렇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지탱하는데 더 어두운 곳으로 깊숙히 들어가라니..

이번 책에서 관중이 말했어.
"도는 멀리 있지 않지만 도달하기 어렵고, 사람과 함께 머물러 있지만 터득하기 어렵다. 그 욕심을 비우면 신이 들어와 자리하고,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말끔히 씻으면 신이 머문다.”
이제 알겠다. 퍼 울고 나면 눈과 마음이 깨끗해지는거야. 그간 쌓였던 거품들을 다 토해내고 나면 비로소 빈 마음에 신이 들어서겠지.

요즘 ''이제 난 괜찮아졌어"라고 너에게 몇 번 말했지. 그런데 허우적댈수록 더 빠져드는 수렁처럼, 부정하려고 해도 슬픔은 늘 우리와 함께 있었어. 이젠 그러지 않을래. 우리 그러지 말자. 그저 슬픔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히 서서 기다리는거야. 바라봐주고, 때론 함께 울며, 소리치고, 어깨를 두드려며 그렇게 함께 있는거야.

가을은 대단히 아름다운 계절임에 틀림없지만, 또한 조락의 계절이기도 해. 나뭇잎은 서서히 죽어가고, 해는 점점 짧아지며, 풍요의 여름은 죽음의 겨울로 쇠퇴하기 시작하지. 피할수 없는 겨울을 목전에 두고 자연은 가을에 어떤일을 할까? 자연은 새 봄에 다시 자라날 씨앗을 뿌리지. 그것도 놀랄 만큼 풍부하게 뿌려대는거야.

우리가 슬픔과 우울함에서 여름의 무성한 초록빛의 죽음만을 먼저 떠올린다면, 그렇게 될꺼야. 허나 갈색의 잎사귀 속에서 새생명의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날카로운 햇볕 속에서 따사로운 희망을 느낄 수 있다면, 뼈마디만 남은 앙상한 가지 속에서 힘찬 영혼의 줄기를 느낄 수 있다면, 또한 그렇게 될 꺼야.

우린 지금 ‘참자아를 향한 순례여행’을 하고 있는거야. 우쭐해진 마음을 비우고 낮고 안전하게 조금 웅크리기 위해, 지식의 허물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성숙한 인격과 영롱한 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 잠시 그러나 지독하게 외로워짐으로써 그간 받았던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사람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어쨌든 우리는 우리의 여행을 계속해야지.

어떤 여정은 곧은 직선으로 뻗어 있고 어떤 여정은 빙빙 에두르는 길이겠지. 어떤 여행은 영웅적이고 어떤 여행은 두려움과 혼란 투성일꺼야. 하지만 모든 여행은 정직하게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세상의 절실한 요구를 만나는 어떤 지점으로 이끌어주리라 믿어.

그러니, 힘내서 걷자 승오야.
승완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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