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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23일 08시 43분 등록
새벽 2시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 핸드폰이 요동을 쳤습니다. 과제 마무리로 한참 정신이 나가 있던 터라 갑작스런 소란에 의자에서 떨어질 만큼 깜짝 놀랐습니다.

'미안하지만 조금 시간 내서 미국에 전화 좀…'

안방에서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아내가 보낸 메시지였습니다. 과제덕분에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자고 있는 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기가 어려웠나 봅니다. 물끄러미 핸드폰을 바라보다 보니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디지털이 꼭 차갑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날아온 아내의 메시지에서는 미안한 마음이 잔뜩 묻어났습니다. 수화기로 손을 뻗었습니다.

아! 그 전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 2주쯤 전인가, 장인어른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웬만한 일로는 전화하시는 법이 없는데, 그 날은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저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미국으로 편지를 보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한 제게 팩스가 한 장 날아 들었습니다.

'아리랑' 정겹게 울려퍼진 美평화봉사단 동창회'라는 제목을 단 기사가 실린 신문을 스크랩한 것과 그 기사를 쓴 특파원에서 연락해서 알아낸 이메일 주소가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기사에 실린 사진에는 흐릿하긴 하지만 활짝 웃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기사를 읽고도 궁금함이 다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왜', '누구에게', '무엇'이라고 메일을 적어 보내야 할지 아직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장인어른께 물었습니다. 제가 들은 사연은 이랬습니다.

지금부터 40년쯤 전, 그러니까 장인어른이 고등학생이었을 무렵에 한 무리의 미국인들이 '평화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그리고는 한 명씩 나뉘어서 한국 가정에 묵게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홈스테이(home stay)쯤 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해서 스무 살을 갓 넘긴 미국 청년 빌(Bill)과 한 한국인 고등학생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둘은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형제처럼 그렇게 어울렸습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했던 빌에게 학생은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었습니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운 빌은 당시에 개최되었던 외국인 웅변대회에 참가해서 대통령상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둘은 그렇게 친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고, 태어난 문화도 달랐지만 그런 것들은 두 사람의 우정에 별다른 방해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흘렀고, 빌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둘은 종종 서툰 영어와 서툰 한국어로 소식을 주고 받았지만 바쁜 생활과 넓은 바다는 아쉽게도 서로를 지워갔습니다. 조금씩 그렇게 잊혀졌습니다. 그리고 40년의 시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때의 고등학생은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중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빌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전화를 하신 다음 날, 장인어른께서 집에 들르셨습니다. 손주 녀석 얼굴을 보고 싶어서 오셨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조심스럽게 40년 전의 사진과 미국으로 보낼 편지의 내용이 적힌 종이를 꺼내놓으셨습니다. 빛 바랜 사진 속에는 잘생긴 미국청년과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장인어른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같이 찍은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메신저로서의 임무(mission)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으로 보낼 편지를 정성스럽게 번역하고 메일을 보냈습니다. 미국 시간을 따져서 밤이 되면 전화도 걸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뛰어넘어 두 사람을 잇는 다리가 되고자 했습니다. 이럴 때면 영어로 말하고 쓰기를 배우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여러 번 보낸 메일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답장이 없었고, 전화는 걸 때마다 자동응답기가 가로챘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밤, 아내에게 문자를 받기 전까지의 상황이었습니다.

한 손에는 수화기를 손에 쥐고 다른 손에서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더듬더듬 번호를 눌렀습니다. 지난 몇 번의 실패는 이번에도 자동응답기가 전화를 받을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습니다. 벨이 몇 차례 울리고 정확히 자동응답기가 답할 그 순간에 빌(Bill)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Hello"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비교적 편안하게 그를 그리워하는 한국 청년(?)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낸 메일을 통해 대충 내용을 알고 있었던 덕에 대화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이어졌습니다. 여러 번 답장을 보내려고 시도를 했는데, 메일이 되돌아왔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간의 엇갈림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통화 내내 그의 목소리는 그가 몹시 기뻐하고 있음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짧은 통화가 긴 시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임을 말해주었습니다.

막 수화기를 내려 놓는데 살짝 방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아내가 걸어 나왔습니다. 지난 2주 동안 신통치 않았던 메신저의 쾌거에 아내도 같이 기뻐해주었습니다. 어떻게 이 시간까지 안자고 문자를 보낼 생각을 했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예약 문자로 걸어두고 자다가 제 목소리에 잠이 깼답니다. 디지털에 감동했던 마음이 다시 웃음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래도 내일 아침엔 장인어른께 당당히 낭보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과제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남편과, 그런 남편 때문에 잠이 홀딱 깬 아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디지털로 가까워진 세상과 시간을 넘어선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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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찬
2007.11.22 05:07:05 *.140.145.26
아름다운 이야기로구나.. 이럴때 살맛 나는거 아니겠나.. 아내도 사랑스럽고 그런 세밀한 부분까지 캐치하고 배려하는 종윤이가 멋있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종윤이는 참 잘났어.. 조금 모자란 구석을 만들어 주어야지..ㅋㅋ 시간되면 연락해라.. 재능해석 해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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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1.22 08:20:21 *.72.153.12
역시 종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어서 좋다.
메신저 잘 하고, 나중에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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