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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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스민 문학]
- 뉴욕에서의 한 가을 날
오늘 저는 이 글을 뉴욕의 한 호텔에서 보냅니다. 이번 편지도 해외 출장 일정 중에 보내게 되어서 지난 편지와 같이 현장의 생생함을 전달 합니다.
여기에서 학교를 다녔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특히 11월과 같은 가을에는 이제 기말고사를 준비하느라 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때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이 도시의 활기참을 다시 느껴봅니다. 66번가 줄리어드 스쿨을 들러 음악책 몇 권을 만져봅니다. 베토벤의 전 생애에 걸쳐 작곡했던 곡들 뒤에 숨어있는 음악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책에 자꾸 손이 갑니다. 비즈니스 미팅 때문에 거래처에 방문한 회의실 창문 너머로 펼쳐진 센트럴 파크의 단풍에도 눈이 자꾸 갑니다.
점심을 잠시 혼자 먹겠다고 하고 나와 근처 델리 가게에서 두툼한 베이글에 달짝지근한 커피를 주문합니다. 센트럴 파크의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합니다.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저는 기업회생의 늪에 빠져 과연 이 기다란 터널을 건널 수 있을지 갸우뚱거렸습니다. 비록 비행기 좌석이 제일 안좋은 곳에 배치 되었더라도, 연착으로 몇 시간을 더 걸리고, 빙 둘러서 가야 목적지에 겨우 도착하더라도, 심하게 흔들리는 비행기에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경험을 하면서도, 저는 지난날 저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 또 감사합니다.
제품 설명을 하다가 벽에 부딪칠 때, 그리고 미리 준비해 오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더라도 그저 저는 덤덤하게 제가 할 수 있는 것들만 잘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여기에, 저에게 주어진 길만을 잘 만들고 수행하겠다는 소박한 다짐을 해봅니다.
벤치에 앉아 있다 보니, 로밍을 해 간 스마트폰에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올라옵니다. 제 책을 읽고 지금 개인 파산 신청을 결정했던 한 독자로부터 도착한 메시지입니다.
형님, 지금 책을 읽고 있는데, <파산수업>에 이런 문구가 있네요.
“나와 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는 나의 모습을, 나는 상상했다. 그리고 또 상상했다. 나의 이 비천한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책을 쓰는 상상을."
저도 상상합니다. 이 고통의 끝에 같은 아픔이 있는 사라에게 도움을 주는 상상을요. 감사해요. 출장 잘 다녀오세요.
이 가을에, 센트럴 파크의 한 벤치에 앉아 베이글을 입에 듬뿍 묻힌 채, 점심을 먹던 저는, 저 문자에 그저 눈물이 핑 돕니다. 누구에게는 또 한없이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가을의 한 날입니다. 저의 뉴욕에서의 가을을 이렇게 젖어갑니다.
정재엽 (j.chung@hanmail.net)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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