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우제
  • 조회 수 2074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07년 11월 24일 14시 59분 등록
변화경영연구소의 길목에서서

몇 일전.
아침 출근길에서 바라본 동트는 새벽은 ‘황홀함 그 자체였습니다. 저 멀리 하늘가에선 불그스레한 한줄기 빛이 구름 가를 맴돌고 늦도록 생각에 잠겼던 몇 몇의 별들이 허둥대고 있었지요. 아침기온이 영하권을 맴돌고 있던 때라 공기는 차갑고 매서웠지만 알 수 없는 희열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박차고 올라왔습니다. 그것은 다시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온 몸을 휘감았습니다.

‘황홀함이 일상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그는 전염성이 무척이나 강합니다. 집안 식구는 물론이고 내가 접하는 온갖 물상들에게 까지 파고들었으니까요.
그는 갖가지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우선 자주 히죽거린다는 것입니다. 비실거리는 웃음이지요. 그리고 또 다른 증상은 타인을 히죽거리게 만든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히죽거림은 기쁨으로 다시 태어나고 그것은 타자에게 ‘황홀’로 환생하기까지 합니다.

잠시 저의 큰 딸아이에게 나타난 ‘황홀’의 모습을 엿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탁월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탁월하다’는 것이 엄마의 일방적인 판단일 수 도 있습니다만 이것을 뒷받침 해 줄 객관적 사실들이 충분이 있기에 저의 판단에 별 염려는 하지 않습니다. 몇몇 지인은 큰 딸아이가 전화만 받아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고 하니 엄마인 저는 쳐다만 보아도 웃음이 나온다는 표현에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가을에 접어들어서 큰딸이 새벽 약수터 길에 저와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출발은 엄마를 염려함에서 시작하였습니다만 이제 딸아이 자신이 더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오고 가는 길은 웃음이 넘치지요. 딸과 함께 새벽길을 걷는다는 것에서 저 자신이 행복함은 물론이고 그녀 특유의 어법이 저를 소리 내어 웃게 만듭니다. 딸아이는 말합니다. 새벽 약수터 길은 엄마가 행복해 해서 좋고 자기는 운동 까지 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는 내용입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면서 우리는 30분가량을 걷습니다. 서로의 손을 잡고 걷기도 하고 가볍게 뛰기도 합니다. 간혹 새벽 산책길에 같이 따라 나온 강아지라도 발견하는 때면 우리는 또 그 강아지를 소재로 하여 한 참을 웃기도 합니다. 강아지 흉내 내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저이기에 강아지 흉내 내는 일로 딸아이를 웃게 만듭니다.
물을 길러 집에 도착하면 보통 아침 6시 가까이 됩니다. 그 때쯤이면 남편이 일어나 물통가방을 받아듭니다.
“보라돌이 안녕”
“큰 딸 안녕, 뚜비도 안녕”
아빠의 큰 딸에 대한 응답이지요.
“ 보라돌이도 일찍 일어나셨군요. 뭐 도와드릴 일 없나요”
그러면서 딸아이는 또 한마디 합니다.
“ 엄마, 은경이는 아무리 보아도 완벽한 얼굴을 가졌어요. 여드름만 없다면” 하하

직장에서 나타난 황홀함은 ‘떠나고 싶었던 일터’에 다시 애착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소그룹의 독서모임을 만들었지요.
모임의 시작은 지극히 단순하였으며 필요한 것은 ‘몰입할 수 있음’에 두었습니다.
비올라를 연주할 줄 아는 88학번을 비롯해서,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아 감당을 못하겠다는 사십 중반의 동료, 그리고 시(詩)를 다년간 써 온 중학생 자녀를 둔 동료도 있습니다. 구성원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넷입니다.
이들 모두는 내가 괴로워한 ‘교육 현장의 모순’에 함께 고뇌할 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대안을 찾아보기도 하고 실천적 행동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 번 주 책 읽기는 신영복의 ‘강의’였습니다. 제가 추천한 책이었지요.
우리 넷은 어제 금요일 저녁, ‘강의’를 들고 퇴근 시간 후 저의 교실에 모였습니다. 오뎅 국물과 김밥을 시켜놓고 책상을 중심으로 넷이 둘러앉았습니다. 저자 신영복을 시작으로 해서 책 속에서 만난 다양한 중국의 인물과 그들의 사상, 그리고 자기에게 다가선 그들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각자의 가슴에 어떻게 파고들었는지도 이야기 했지요.
시를 쓰는 동료는 책을 읽는 내내 모든 초점을 교육과 연결 지어 바라보았답니다.
‘권력은 폭력적 수단을 가지고 있다’라는 부분은 교실에서 교사의 권력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는군요. 교사 개인이 한정된 교실 공간에서 아동들에게 행하는 언어적, 행동적 폭력 양태의 허울을 벗겨본 셈입니다. 그리고 ‘배우지 않으면 완고해진다’라는 말도 그녀는 덧붙입니다.
이야기는 또 다른 동료의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삶에 있어서 그녀의 기준은 ‘좌경적 생각과 우경적 행동’입니다. 생각은 글로 나타나고 행동은 보임으로서 실천합니다. 그녀도 신영복의 ‘강의’에 있어서 진지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몇 권의 책을 통하여 익히 저자를 만나왔던 그녀였던지라 할 말도 많습니다. 신영복 교수의 ‘현실적 부딪침의 부족분’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정신적 리더의 자리매김으로도 충분하다는 결론입니다. 그녀도 ‘강의’를 교육현장으로 연결지였습니다. 내면에 흐르는 사유의 세계가 우리를 붙잡아 매어 주듯이 교육 현장에는 함께 고민하고 염려하는 우리들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은 필요한 곳에 있을 때에 그 빛을 발 한다’ 는 의미를 저는 전해 듣습니다. 항상 내가 몸담고 있는 자리를 떠날 생각 만 한 저도 한 마디 덧붙입니다. 내가 앉은 자리가 꽃자리임을 알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교육 현장이 뜻과 같지 않음에 떠날려는 저의 마음을 되돌렸습니다. 돌아보니 교육현장이 꽃자리가 맞습니다. 아이들이 꽃 봉우리고 동료들이 꽃바람입니다.

아무도 등교하지 않은 토요일 한 낮.
교실에 혼자 앉아있습니다. 학교는 적막입니다. 바깥의 시끌벅적함은 있지만 평소와 같은 재잘거림은 없음을 뜻합니다.
마이클 호페의 Lincoln's lament를 배경음악으로 하여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내 인생의 길목’에서 잠깐의 돌아봄입니다.
먼저 나는 나를 꼭 안아줍니다. 때로는 타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正道’에 반하는 행동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해야 다시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음을 알기에 끌어안음을 우선으로 한 것입니다.

다음은 내 앞에 펼쳐진 몇 갈래 길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선택한 한 갈래 길을 응시합니다. 길은 아늑하고 푸근합니다. 약간의 덤불은 있지만 그것은 야생의 열매를 달고 있기에 덤불로 보이지 않습니다. 길목 길목에서 내가 해야 할 일과 경계해야 할 일들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나를 여기 머물게 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황홀’의 출처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일상에 찾아든 황홀은, 길게는 태생과 성장과정에 있지만 짧게는 변화경영연구소에서의 책읽기에서 왔음이 명백합니다.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내면의 충만함은 고달팠던 변경연의 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변경연에서의 글읽기 활동과 쓰기 작업이 녹록다거나 나의 글 솜씨가 발전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지금에라도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이 간혹은 파고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마음이 솔직하다는 해석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이쯤에서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봅니다.
지금 듣고 있는 Lincoln's lament는 1864년 남북 전쟁 당시 5명의 아들을 전쟁에서 잃어 실의에 빠진 한 어머니에게 아브라함 링컨이 보낸 친서의 편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이클 호페가 그 감동을 선율에 담았지요. 조용히 흐르는 선율에서 슬픔을 느끼기보다는 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따뜻한 한 사람의 힘을 발견합니다.
내가 타인에게 한 줄기의 따뜻함으로 다가서고자 합니다. 생활의 길목 길목에서 그 온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나를 휩싸고 있는 황홀감이 사부님으로부터 왔듯이 나도 그 누구에게 작은 온기로 다가서고자 함입니다. 11월의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 비치는 오후입니다.








IP *.114.56.245

프로필 이미지
향인
2007.11.25 00:45:46 *.48.43.19
멋져요.
때때로 두꺼운 이불로 온 몸을 감싸게 하지만, 두터운 장갑을 찾게 하지만, 그래도 좋은 계절입니다. 나름 잘 지내보리라 다시 한번 마음 먹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우제
2007.11.25 21:01:42 *.86.177.103
향인님 잘지내시죠. 밤이란 밤이 다 모인 어둠 속, 그 어둠을 뚫고 달려온 밤바람에게 따뜻한 아랫목을 내어 줄 수 있는 겨울이 황홀하도록 좋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72 [칼럼031] 동물원에 가기 [1] 香山 신종윤 2007.11.30 2266
471 [칼럼34] 아들과 함께 몽골 말달리기 [1] 素田최영훈 2007.11.30 2698
470 [칼럼 34] 가정 기도문 海瀞 오윤 2007.11.30 3510
469 (32) 유혹의 香氣 [2] 香仁 이은남 2007.11.29 2249
468 두 곳의 외지 체험을 쓰고 다시 보기 [2] 호정 2007.11.28 1989
467 [34] 나목으로 선 씨 과실의 변증법적 희망예찬 [2] 써니 2007.11.27 2425
466 모든 가능성으로의 초대 [4] 素賢소현 2007.11.26 2322
» 변화경영연구소의 길목에서 [2] 우제 2007.11.24 2074
464 [칼럼33]팔도 오인방 [2] 素田최영훈 2007.11.26 2375
463 (32) 당신께 보냅니다. [6] 時田 김도윤 2007.11.24 2124
462 [칼럼 33] 모순 속에 길이 있다지만… [4] 여해 송창용 2007.11.22 2199
461 [칼럼 33] 정 떼는 연습 海瀞 오윤 2007.11.21 3390
460 [칼럼030] 시간을 넘어선 그리움의 메신저 [2] 香山 신종윤 2007.11.23 2351
459 (33) 가을의 끝자락에서, 찌질이에게 박승오 2007.11.22 2646
458 [33] <영웅>, 오래된 영화 리뷰 한정화 2007.11.22 3244
457 마음 안의 속눈썹 그리고 시간 [3] 호정 2007.11.21 2265
456 (31) 중이 제 머리를 어찌 깎으리 [7] 香仁 이은남 2007.11.20 2435
455 마르코 폴로에게서 배운 한 가지 [3] 현운 이희석 2007.11.19 2634
454 고전속에서 잠시 우리의 미래세대를 생각하다. [2] 우제 2007.11.19 2225
453 [33-1] 처음처럼 [4] 써니 2007.11.16 2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