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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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 편지는 남편의 ‘양가 부모님 생신 공평하게 챙겨 드리기’ 였습니다. 이번 편지는 ‘엄마의 글쓰기’ 입니다.
‘결혼=출산’ 등식이 확고한 대한민국 가족주의와 종가의 가부장적 가족문화로 11대 종손부인 저는 결혼과 동시에 ‘아들 출산’이라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10대 종손부 시어머니께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시집와서 형선이 낳기 전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다. 아들 못 낳은 며느리 돌아오지 말라고 하실까 봐 친정도 못 다녀왔지.”
늘 같은 말씀이었지만 그 말씀을 들은 날이면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꿈 속에서 저는 누워 있었고, 시댁 어른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누워있는 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저는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어른들은 일제히 저를 잡아당겼습니다.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손가락 발가락이 다 빠져나가도록 세게 잡아당겼습니다. 능지처참을 당하고서 꿈 속에서 저는 무(無)가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아들 출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종손부입니다. 둘째 딸 수린이가 태어난 날의 기록 중 일부입니다.
‘엄만 깜짝 놀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너희들인데, 남아 선호 사상에 물든 사람들에겐 그저 아들이 아니어서 안타까운 존재로만 비춰지는 건가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지. 맏며느리인 엄마에게 “반드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거세게 다가올수록,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인습 추종자들을 상대할수록, 엄마는 더욱 당당해져야겠다고 다짐했어. 내가 당당해야 내 딸들도 당당할 수 있다고 믿었거든. 그러기 위해 일단 엄마부터 먼저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했어. 대를 이어온 가부장 권력에 내 삶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기로 말이야.
엄마가 만약 아들 둘을 낳았다면 어땠을까? 가부장제의 막강한 권력을 계승받았겠지. 기존의 제도와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을 지도 몰라. 하지만 엄만 금쪽보다 소중한 너희들이 있었기에 제도 너머를 상상할 수 있었고, 이 땅의 여성들 삶에도 관심이 생겼어. (…) 엄마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수민이 수린이가 속상해하겠지. 그래, 이건 당연하지 않아. (…) 불과 몇 년 사이에 바뀌기란 쉬운 일이 아닐 거야. 다시 힘을 내 소통을 시도해야겠지?” (<엄마의 글쓰기> 중에서)
“아버님, 어머님, 손녀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주세요.”라고 직접 말씀을 드리고 싶을 때마다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11대 종손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철학자를 꿈꾸는 유형선 씨, 낡은 인습을 부서뜨리는 망치가 되어주세요.”
둘째 딸 수린이가 태어난 2009년부터 썼으니 엄마의 글쓰기도 이제 곧 10주년을 맞이합니다. 처음엔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신기하게도 글을 쓰면서 악몽을 꾸는 횟수가 줄고 시댁에서 눈치를 보는 일이 점점 없어졌습니다. 글쓰기는 내면에 힘을 불어넣는 일이었습니다. 대를 이어온 인습 때문에 힘든 날들을 보내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먼저 예쁜 공책을 한 권 사세요. 그리고 한 줄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써 보시기 바랍니다. '쓰는대로 이루어진다' 당신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질 거예요.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여섯 번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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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 월요일에 발송하는 마음을 나누는 편지 '가족처방전'은 필자와 독자가 함께 쓰는 편지입니다. 가족 관계가 맘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계시다면 메일로 사연을 보내주세요. 마음을 다해 고민하고 작성한 가족처방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김정은(toniek@naver.com)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