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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26일 22시 32분 등록
인도 여행 후, 3년 동안 성실한 직장생활을 했다. 남들과 다르지 않게 매일 매일 출근하기 위하여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어느 날, 버스 안 라디오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왔다. “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지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순간, 나의 모든 것이 이 노래가사처럼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작지만 한 내 기억 속에는 3년 전 인도로 훌쩍 떠났던 그때처럼, 짐을 싸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 차 올랐다.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려 할 때 많은 이들이 만류했다. 다시 가방을 싸는 나를 바라보는 엄마는 시집도 못간 노처녀 딸 걱정에 몸이 닳았다. 의사들과 함께한 봉사활동이 지긋지긋했지만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버리자니 두려웠다. 다시 돌아올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 혹은 시집갈 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것은 심한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내가 더욱 두려웠던 것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이제껏 살아온 날들과 다름없이 반복될 것이란 예감이었다. 그래, 사람마다 쉬운 게 있고 어려운 게 있다. 나에게 어려운건 결혼이었고 쉬운 일은 떠남이었다. 쉽게 시집을 가거나 쉽게 가방을 싸고 떠나거나,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같은 것이다. 떠나는 건 지금의 일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돌아와 더 잘살기 위해서이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온 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동생의 결혼식이 끝난 후 필리핀 행 비행기에 홀로 몸을 실었다.

처음으로 거대한 인도를 여행할 때는 남들처럼 1개월 만에 인도의 북쪽 모두를 돌았다. 거의 몇 십 개의 도시를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기차에서 새우잠을 자고 한곳에 머무르는 시간은 길어야 2일 이었다.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나니, 내가 뭐하나 싶어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머지 한 달은 계획 없이, 좋은 곳을 발견하면 머물고 싶을 만큼 머물자고 마음먹었다.

남들처럼 두꺼운 여행책자를 가방 안에 꼭 들고 다녔다. 혹시라도 길을 잃지 않을까, 머물 곳을 찾지 못하진 않을까, 주의사항을 잊지는 않을까, 좋은 곳을 놓치지는 않을까, 책에 줄을 치고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한 달간의 지친 여행을 한 후, 여행책자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사람들은 여자 혼자서 무섭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여행책자도 없이 다닌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 먼저 말을 걸고 묻고 또 물어가며 여행을 했다. 신비하게도 길은 사람을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열렸다.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내게 길을 인도해 줄 거라고 믿게 되었다. 외로운 마음도, 두려운 마음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때부터 어디서 자고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 어느 곳을 가고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즐겁고 흥미진진했다. 조심할거 조심했는데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운명처럼 받아들이자. 모든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 졌다.

그렇게 떠난 두 번째 여행지 필리핀에서, 나는 머물고 싶은 작은 마을에서 오피스텔을 빌려 3개월 동안 그냥 살았다. 매일 매일 일어나 청소를 하고, 아침을 먹고, 장을 보러 가고, 여유롭게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었다. 하루 종일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었다. 주위의 한국학생들, 필리핀 선생님들과 짬짬이 나누는 만남에 깊은 향이 더해갔다. 누군가 떠난다고 하면 그저 따라나섰다. 혼자 떠나고 싶을 땐 훌쩍 떠났다 다시 낯선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필리핀 이곳저곳을 아무 맥락 없이 돌아다녔다. 목표도 목적도 없었다. 아무것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상황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대한 유연하게 살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는 의도적으로 찾아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자연스럽게 다가오게 되어 있다. 내가 유일하게 찾는 것은 그렇게 일상에 깨어있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가본 그곳에서, 잠들어 있던 몸의 모든 감각이 열렸다. 낯선 세계에 온몸을 던져놓는 일은 또 다른 일상의 꽃을 피워냈다. 대단한 일들이 생겨서가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는 노래 가락처럼 흥이 있어 좋았고, 작은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 바라보는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물이 났었고, 낯선 곳에서 홀로 장을 보고 음식을 먹는 쓸쓸함 마저도 좋았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작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일상이 좋았다. 그렇게 일상에서 나의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갖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멋진 풍경을 구경하고 다른 문화를 배운다는 것 이상의, 잠들어 있는 나의 모습과 가능성을 깨어나게 했다.

동방견문록을 읽으며 생각했다. 여행을 할 때마다 시작과 끝은 항상 같은 질문의 반복이라고. ‘내가 왜 여행을 위해 떠나야 하는가?’. 그것은 ‘내가 왜 연구원을 위해 떠나야 했는가?’의 질문과도 같았다. 나는 솔직히 그 질문에 선명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답을 어디에서 구해야 할까. 나는 나의 역사 속에 잠자고 있던 그녀를 깨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5년 전 필리핀의 작은 마을에 머무르고 있던 소라에게 다시 묻는다.

"내가 왜 여행을 위해 떠나야 했니?"
그녀는 살며시 나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소라야, 기억나니? 여행은 나에게 열린 모든 가능성을 내 삶으로 초대하는 것이야. 우주의 에너지를 나에 대한 모든 가능성으로 모아오는 일상의 축제였단다. 잊지말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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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1.27 09:41:17 *.249.162.200
인도는 누나에게 소중한 곳이구나^^

떠나는 것도 어렵지만, 돌아오는 것도 어렵네... 결국 우린 다음 주말에야 보겠구나~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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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007.11.27 10:57:08 *.73.2.112
인도라서 소중하기보다
그 공간에서 내가 만난 사람과 다양한 경험이 소중한거겠지?^^
몸으로 기억하는 모든것은 그렇게 오래오래 소중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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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웅
2007.11.30 15:46:10 *.47.83.77
맞아요, 사람마다 쉽고 어려운 게 모두 다른 것 같아요. 소라님의 글은 제가 미쳐 생각해보지 못하는 면을 비춰줘서 아주 좋으네요. 자유분방함이 물씬 느껴지는 소라님의 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파이팅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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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007.11.30 18:11:51 *.73.2.112
춤에 열광하셨던 신웅님.. 맞으시죠?
저도 드디어 자신을 오픈하기 시작하신 신웅님 글 잘 읽고 있어요.
얼마전 꿈프로그램 가시는 글도 꼼꼼히 읽었어요.
많이 반갑고 앞으로의 신웅님의 다양한 모습이 기대되요.
신웅님에게는 지금 꿈찾기 프로그램에 가시는 것이 쉬운일이시겠죠?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
신웅님과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을 꿈꾸어 봅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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