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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27일 19시 20분 등록


밀알과 씨 과실 그리고 나목裸木의 변증법辨證法을 통한 나의 인생길에 대한 정체성 모색.

신영복선생의「강의」를 읽으며 특별히 내게 다가오는 대목이 있었다. 마음에 꽂히는 이 부분에 이르러 자신 없는 듯 긴장을 하며 이 느낌이 뭘까 미심쩍은 걸음을 머뭇머뭇 스쳐가다가 맴도는 이 자리에 와서 다시 들춰본다.

산지박山地剝

『산지박괘의 상괘는 산山이고 하괘는 지地입니다. 박剝은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박괘는 괘사와 상구上九의 효사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괘가 나타내는 상황과 그것에 대한 독법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합니다. 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剝 不利有攸往
박괘는 이로울 것이 없다. 잃게 된다.

박괘는 64괘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괘입니다. 초효부터 5효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효입니다. 음적양박陰積陽剝의 형상입니다. 양을 선善, 음을 악惡으로보면 악이 득세하고 있는 말세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단 한 개의 양효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한 개의 양효마저 언제 음효로 전락할지 알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붕괴직전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박괘를 다섯 마리의 고기가 꿰미에 매달려 있는 고단한 형국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산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형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상이지만 천지비괘와 마찬가지로 막힌 괘로 읽고 있습니다. 이 책에 효사를 전부 싣지는 않았습니다만 초효에서 5효까지의 효사는 상床이 그 다리부터 삭아서 무너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박괘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표현하는 절망의 괘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상구上九의 효사가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象曰 君子得輿 民所載也 小人剝廬 終不可用也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소인은 거처를 앗긴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백성의 추대를 받게 되고, 소인은 거처를 앗기고 종내 쓰일 데가 없어진다.

상구의 양효는 관어貫漁의 꿰미 또는 ‘씨 과실’ 혹은 최후의 이상으로 읽습니다. ‘碩果不食’은 내가 좋아하는 글입니다. 붓글씨로 쓰기도 했습니다. 왕필 주에서는 이 석과불식을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독전불락獨全不落 고과지우석故果至于碩 이불견식而不見食”, 즉 떨어지지 않고 홀로 남아 씨 과실로 영글고 먹히지 않는다고 풀이합니다. ‘먹지 않는다’ 보다는 ‘먹히지 않는다’ (不見食),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괘의 상황은 흔히 늦가을에 가지 끝에 남아 있는 감(紅柿)을 연상하게 합니다. 까마귀밥으로 남겨두는 크고 잘생긴 감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비단 감뿐만 아니라 모든 과일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을 먹지 않고 씨 과실로 남기지요. 산지박 다음 괘가 지로복괘地雷復卦입니다.』 p121~122

지뢰복地雷復
『땅 밑에 우레가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씨가 땅에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잠재력(雷)이 땅 밑에 묻혀 있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復은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광복절光復節의 복復입니다. “일양복래一陽復來 일양생一陽生 붕래무구朋來无咎 반복기도反復其道 춘래春來”가 괘사입니다. 친구가 찾아오고 다시 봄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천지비괘를 설명하면서 대성괘 역시 다른 대성괘와의 관계에 의하여 재해석되는 중첩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만 산지박괘는 그 다음 괘인 이 지뢰복괘와 함께 읽음으로써 절망의 괘가 희망의 괘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한 사회, 한 시대의 양심과 이상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는 메시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희망은 있는 법이지요. 그런 점에서 박괘는 64괘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을 상징하는 괘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는 변증법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 박괘는 흔히 혼돈 세상에서 사상적 순결성과 지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어려운 때일수록 현명한 판단과 의지가 요구된다는 윤리적 차원에서 읽힙니다. 가빈사양처家貧思良妻, 세란식충신世亂識忠臣,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 등이 그러한 풀이입니다. 가정이 어려울 때 좋은 아내가 생각나고, 세상이 어지러운 때 충신을 분별할 수 있으며, 세찬 바람이 불면 어떤 풀이 곧은 풀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 만들기입니다. 희망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비록 박괘의 상전과 단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희망을 만들어가는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괘는 늦가을에 입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끝에 빨간 감 한 개가 남아 있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裸木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IMF 사태’ 때 내심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IMF 사태는 우리의 취약한 경제구조를 직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식량 자급률이 27%에 못 미치는 반면 철광석, 원면, 섬유, 에너지 등의 거의 100%를 수입하는 구조입니다. 경제의 거품을 걷어내고 취약한 구조의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 소위 문민정부 출범 때에도 그러한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만 불 소득이라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거품과 허위의식을 청산하고 4, 5천 불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단이 필요했지요. 그러나 그때나 IMF 때나 미봉책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물론 우리가 주체적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종속성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계 경제구조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모든 책임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도 문제가 있지요. 그러한 인식 능력과 의지력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엽락이분본’葉落而糞本, 잎은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됩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자립성, 정치적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p122~125

→ 이편의 글을 읽으며 무어라 용단할 수는 아직 없지만 애틋함으로 맴돌다 다시금 적어보았다. 그리고 내 생각의 편린들을 모아본다.


「剝 不利有攸往
박괘는 이로울 것이 없다. 잃게 된다.」 p121

「산지박괘에서는 상구가 최후의 양심, 최후의 이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p123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으며 심장이 찡하고 높게 출렁거렸다. 언젠가 어디에서 본 듯한 구절이기도 하다. 이것이 내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 어쩌면 나는 이미 나의 인생을 산지박괘와 같이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인지 모르겠다. 그렇다, 정말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알아야만 한다. 내 자신에 대해, 나의 그릇에 대해, 그리고 내가 가야할 인생길에 대해, 그리고 이제 그것이 무엇이건 이해하고 받아드려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쉽지 않다. 나는 꿈만큼 의지가 굳건하지도 못하고, 의욕만큼 체계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허욕과 허영심이 아닐까 두려워하거나 의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감豫感이라는 것이 있고 나의 미약함으로 감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이 보이지만, 그래도 해야만 할 것 같아 마음을 가다듬고는 있다. 하여 크게 욕심을 내지는 않으나 그때처럼, 아니 10여 년 전 그때보다 더 강렬한 어떤 느낌, 아니면 도전 내지는 겨루어볼만한 용기가 다시 한 번 솟구쳐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당시처럼 하나의 일념으로 단순하고 명료하게 살아가고 싶다. 힘이 빠진 걸까? 그 독한 슬픔이 약발을 다했나? 왜 지금은 그렇게 절박하지가 않은가. 아니면 맥이 떨어지는 것일까? 혹은 정체성의 결핍일 런지도 모르겠다. 미성숙의 허우적거림이랄까, 아니면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꿈이 너무나 큰 것일까? 나의 약간의 허영 끼와 사치스러움만큼이나 내 계획도 그러할지 모른다는 반성을 하는 가운데 다시 한 번 이 문단을 음미해 보고자한다.

어떻든 이미 내 인생이 평탄하기는 글렀고, 지은 죄罪와 업業이 많기 때문에 내 원래의 뜻대로 인생길을 제자리로 이끌어 다시 제대로 돌리기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자꾸만 미흡함이라는 암초에 부딪치거나 쓸데없는 조바심이 먼저 앞선다. 우선은 내가 내 자신의 행적과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여태도 그것을 만회 혹은 뒤집을 만한 어떤 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 같아 애달프기도 하다. 이 괘에서처럼 나는 상구의 마지막 한 개의 양효 씨 과실에 이르지 못하고 박剝이라는 글자에 머물러, 그저 다 잃고 마는 것이 고작 내가 타고난 복은 아닐까? 하고 턱하니 숨이 막혀올 따름이다. 그래서 어쩌면 한참을 넋을 놓고 철퍼덕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언저리에 이르러 마치 계절통이라도 앓는 것처럼 여기저기 온몸이 아파가면서.

어려운 산지박괘와 같이 읽어야 한다는 지뢰복괘에서처럼 내 인생의 나에게 아직 어떤 지뢰가 묻혀 있을까? 몇 년이 남아 있기는 해도 낼 모레면 벌써 5학년이(?) 가까워오는데, 아직도 스스로의 길에 대해 불확실과 미심쩍어 하면서 여태도 힘차게 나아가지 못하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때때로 걱정스럽고 갑갑하다. 철없이 너무 비현실적 이상향과도 같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내고 있는 탓일까? 혹여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산지박괘의 숨겨진 뜻 <씨 과실>이 내게 주어진 운명은 아닐까 막연히 생각을 해본다. 이 구절에서 숨이 턱하니 막히는 것 자체가 어떤 암시를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렵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렇게 알고 이해하려고 딴엔 몸부림을 쳐대 보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엔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두려운 가운데 내가 가야할 인생길이 아닌가 하고는 주입시키듯 이따금씩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 인생의 그 휘황찬란했던, 꿈이라기보다는 당연히 이루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던 단지 한편의 계획, 운이 좋았으면 그보다 얼마든지 힘차게 뻗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되던, 나의 고운 꿈들은 나와 내 인생의 부조화로 말미암아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던가. 마치 만만하게 짜대던 최소한의 초등학교시절 생활계획표와 다르지 않았던, 내 나의 기본적이며 내 인생의 마스터플랜이었던 설계들은 이대로 산산조각이 나고야 마는 것인가. 나는 늘 애달아했다. 나, 이대로 살다가 결국 죽게 될까? 사는 것이 지금에서 벗어나 별반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은... . 아, 너무나 평범한 일상... . 이렇게 살아가도 되나? 안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아니, 아직까지도 단 한 번도 결코 포기하지 못했던 꿈이었을지 모른다. 그래,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찌할 방도도 따로 없다. 한쪽 날개를 잃고야만 그래서 날지 못하는 새의 꿈, 적막강산寂寞江山의 심정이다. 내가 뒤적이던 어느 역술인(東易居士)의 서적에는 나의 해당 부부애정궁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ㅋ)「인생을 살아가는데 엔 많은 인내와 수행이 필요하다. 타고난 원앙궁鴛鴦宮에 애틋한 정이 결여되어 있으니 거문고 비파 줄이 어인 일로 한 줄은 팽팽하고 한 줄은 늘어져, 마치 한편은 동쪽으로 한편은 서쪽으로 등을 맞댄 형국과 같이 서로의 마음 뜻이(心思) 합일치 못하도다....... 」이게 맞는 해석일지는 모르겠다. 이 구절은 어떻게 생각하면 맞는 것 같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맞는다기보다 맞춰지는 것 같기도 하다.(ㅎㅎ) 어쨌거나 그래서 나는 이러한 고민들로 인해 늘 혼자서 생각에 잠기다 지치고 나자빠지곤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날개를 잃거나 거문고 줄이 끊겨버린 이것이 내 숙명일지 모른다는, 따라서 나를 다시 갈아 업고 다시 계획을 짜서 대대적인 수정을 가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이대로 어영부영 살다가 죽게 되는 것이 고작인 인생이 되지나 않을까하여 자못 염려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겠다. 어쩌면 내 그릇의 한계를 들여다보며 한숨짓는 당연함일 수도 있다. 미화시켜 말하자면 현실직시가 되기도 하겠거니와 제법 자신의 꼬락서니를 아는 것이리라. 허나 한편으로 이러하기에 지극히 마땅히 더 나은 내일을 간직하며 남들보다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기울여 의연히 헤쳐나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알면서도 거부하거나 외면한 채 주저하고 회피하며, 해결이 안 나는 일상을 오래도록 방치하고 무방비로 이끌고 있는 나태와 무력감의 반복적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이미 너무 오랜 것은 아니던가. 짚고 또 짚어가며 반성과 가책으로 돌아본다.

삶의 낭만을 잃어버려 황량한 허허벌판을 서성이며 낙천적 기질만이 쓸쓸한 초겨울 낙엽의 몸부림으로 아스라이 부서지며 흩날리는가. 앙상한 가지 위의 마른 나뭇잎은 무얼 그리 안타까워 안간힘으로 매달렸다가 이제야 차가운 아스팔트 거리로 곤두박질치듯 쏟아져 내리며, 이리저리 속절없이 나부끼고 구르다 어느 곳으론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인가. 겨울은 어찌하여 무심하게도 그 봄의 새순과 여름의 무성함과 단풍의 색 단장도 무색하게 한달음에 홀딱 벗겨 나목의 형체만을 남겨둔 채 황량하고 추운계절을 버티어 살라하는 것이더냐.

『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象曰 君子得輿 民所載也 小人剝廬 終不可用也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소인은 거처를 앗긴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백성의 추대를 받게 되고, 소인은 거처를 앗기고 종내 쓰일 데가 없어진다.』

소인인 내가 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 밖에는 길이 없다. 선생에게 시비를 걸듯 그분께 나를 반추하여 내 문제와 나의 인생길을 모색해 봄이 어쩐지 어색하지 않은 것 같다.

신영복선생은 무슨 뜻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며 주절주절 늘어놓았을까. 작가 자신과 동일시했던 것은 아닐까. 박괘를 희망의 괘로 찾아 읽으며 IMF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우리나라에 대한 희망을 논하였다지만, 작가 자신의 인생의 질곡을 생각하노라면 그의 내면의 세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 구절에 이르러 총망 받던 한 젊은 엘리트가 어느 날 시대와 인생의 숙명에 처하여 무려 20여 년간을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청천벽력靑天霹靂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며 깨달은 생의 철학을 읽는다. 그것은 자기 합리화나 인생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하찮은 변명이 결코 아니었다. 받아드려야 하는, 받아 드릴 수밖에는 다른 어떠한 방도와 길이 없는, 그 애달프고 무심하기 그지없는 한탄과 원망을 어찌 다 감수하였을까. 애간장을 녹이며 타들어갔던 속내를 가다듬어 어떻게 이리도 일반 대중의 언어로 간결하고 쉬우며 참신하게 풀어놓을 수 있었던 것일까? 도道의 경지를 이룬 선생의 인내와 성실하게 일궈온 일상에 찬사와 숙연함이 더해진다.

마침내 선생은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고 숙명과 타협하며 자신의 생의 터전이 되고 있는 감옥을 사랑하기 시작했으리라. 철창 안이나 세상 밖에서의 생활이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동양의 철학서인 주역을 읽으며, 선생이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 이 겨레 이 땅에서의 자신만의 인생길과 생의 철학을 의연히 세워나갔으리라. 그것은 삶에 대한 의문이었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 탐색이며 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 되었을 것이다. 나와 같은 괴로움을 딛고, 나의 초라하게 느껴지던 삶의 지난했던 현상과 다르지 않은 상황들을 극복하며 굴하지 않는 신념으로 맞섰으리라. 그리하여 절체절명의 암흑과도 같은 고난을 박차고 일어나 부수어 깨버리고 다시 반듯하게 세우듯, 한 알의 씨 과실로서의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차라리 감사와 기쁨의 나날을 마음껏 즐겼으리라.

삶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지, 어디에서 어떤 지위를 획득하고 어떤 삶을 누리느냐가 전부는 아니다. 어디에 위치하고 어느 역할에 처하고 있든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느냐하는 처세인 것이지, 위치가 얼마만큼의 선망의 대상이고 어디서 어떻게 어떤 대접을 받고 버젓이 살아가고 있느냐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고 이 세상 전체가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느꼈을 것이다. 비록 한 평짜리 독방이거나 비좁은 감방 안이라 할지라도, 인생을 사색하기에는 너무 충분한, 그러므로 도道는 어디에서나 자랄 수 있고 철학哲學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세워나갈 수 있다는 것을 참선하듯, 구도하는 자세로 싹틔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스스로의 인생과 나아가 더불어 함께 일궈가야 하는 세상을 두 팔 가득 품에 껴안으며 처연히 신념을 굳혀 나갔으리라.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모순과 조화의 균형/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입니다/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낭만주의와 창조적 공간/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山地剝/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의 형태/ 배움과 벗/ 옛것과 새로운 것/ 그릇이 되지 말아야/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공존과 평화/ 낯선 거리의 임자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참된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 이론과 실천의 통일/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의 형태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도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노자』가 보이지 않는 노자/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닙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빔이 쓰임이 됩니다/ 스스로를 신뢰하도록/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봅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됩니다/ 예禮란 기르는 것이다/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교사는巧詐는 졸성拙誠보다 못한 법/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 도전과 응전/ 가슴에 두 손』

새삼 저자가 쓴 책의 소제목들을 다시 펼치면서 삶의 여유와 맑고 깊게 닦여진 철학이 담긴 의미들을 되새겨 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내게 자문한다. 나는 나의 길을 아는가. 두려워 떠는 것이 무엇인가. 군자의 길, 씨 과실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거처를 잃은 소인배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 내 몫의 삶의 전부일까를 생각하니 안타까운 흐느낌에 목이 매인다. 누가 봐도 소인의 길인 것을 한탄함에 머무르고야 말 것이던가. 신영복선생은 동양고전을 강의하는 자신을 소인배라고 느꼈을까 군자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다만 자신을 사랑하고 이 사회와 나라를 사랑하였으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당당한 나목으로써의 자신과 세상의 한 사람으로써의 자기명분과 의미를 자각하고, 한갓 나목의 <씨 과실>로서의 변증법을 이루어내기 위해 일상에 무던히도 몰입하며 기도 같은 소망으로 날마다 거듭나기를 애써 왔으리라.

그러한 그의 삶의 태도가 군자라고 생각되어진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사랑하며 꿈을 가지고 의연히 노력하며 펼쳐나가는 가운데, 마침내 좋은 끝(최후의 양심, 최후의 이상을 향해)을 실행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를 알아주고 몰라주고는 이미 선생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의미도 아니었던 것이리라. 선생은 단지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의 의미와 할 수 있는 바를 정하여 부단히 성실하게 노력하며, 자신의 일에 성의와 사랑을 다하여 임했으리라. 그저 어떠한 상황에 처해서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헤쳐 나가는 가운데, 모든 것을 신에게 또는 세상의 이치와 순리에 맡겼던 것이겠다. 무려 20년 동안의 수형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고 포기하지 않으며, 소명을 다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살아 강의하면 좋고 죽어서라도 누군가에게 읽혀져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맸듯, 하나의 <씨 과실>이 되리라고 자신을 깨우쳤던 것이리라. 죽으면 밀알이 되고 살아남으면 <씨 과실>이 될 자신의 영원무궁한 일상에 대한 정체성을 확고히 다지며 확립하여 나아갔던 것이리라. 하루 또 하루 성실하게 한걸음 또 한발자국을.

나는 신영복선생을 감히 함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선생의 그러한 자기 겸허와 꿈과 이상을 흠모하여 배우며 일깨움을 가져보고 싶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힘과 기를 모아서 흉내라도 내보며, 그 가까운 삶에 이르러 살고자 하는 나의 과대망상 혹은 허영심을 버리고 싶지 않다. 선생의 느닷없던 20년 옥살이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 자유로운 인생이요 못할 것이 없는 군자 부럽지 않은 삶의 현장에서, 손만 뻗어 열심히만 하면 잡을 수 있고 찾을 수 있으며, 도달할 수 있는 온갖 가능성과 자유로움과 평화 속에서 그야말로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멀쩡한 육신과 가두는 이 없는 떳떳함을 가지고서 만들고, 어디든 가고, 하지 못할 것이 도대체 무어란 말이던가. 나의 치졸하며 편협한 일상과 나태와 게으름, 사상의 빈곤함과 우유부단함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박괘는 늦가을에 입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끝에 빨간 감 한 개가 남아 있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裸木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 나는 나의 이기심과 나태함을 발가벗겨 보다 진솔한 원래의 내 자신의 의욕과 만나고 충분한 대화와 갈등을 함께 나누어 풀며 좀 더 가치롭고 의미 있는 나다운 인생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나의 중년은 매우 불안정하고 힘겨웠더라도 이제부터라도 보다 나은 장년을 향한 한 걸음 한 발자국을 신중하게 내달을 일이다. 나의 정체성의 확립과 함께.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강의>p25

신영복선생의「강의」를 읽는 동안 나는 제대로 키워주지 못한 나의 아이들을 생각함과 동시에 선생과 거의 비슷한 불운의 시절을 슬기롭게 헤쳐나가신 역사의 인물 다산 정약용선생의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선생과 같은 맥락에서 떠올려 본다. 어느 날 폐족이 되어 오랜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 동안에도 의지와 정신을 놓지 않고 정념正念으로 책을 쓰며 나라와 목민을 생각하던 연구원 과정 중에 읽었던「다산문선」에 담겨진 선생의 사상적 정서와 그의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글을 통해 훈육의 메시지들을 다시금 새겨보며, 오늘 이 같은 나의 바람이 나의 아이들에게도 절연되지 않는 영감靈感으로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먼저나의 마음가짐들을 가지런히 다져본다. 아울러 나의 연구원 생활을 되짚어 보며 반성과 다짐을 새로이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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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견문록은 읽었으나 신영복선생의 <강의>를 읽던 중 꽂힌점들을 뒤늦게 소고小考해 보았습니다.
IP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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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웅
2007.11.28 11:28:20 *.47.83.77
글들이 구구절절 제 마음에 꽂혀 들어오네요. 역시 무언가를 되돌아보는 글은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찡~함을 느끼게 하나 봅니다. 글을 읽고 나니 '강의'를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고마운 글입니다. 그리고 써니님에게서는 항상 시원시원함과 생명력이 팍팍 느껴져서 좋으네요. 마치 '비타민C 레모나' 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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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1.29 06:44:09 *.70.72.121
에고~ 애써 긴 글을 읽어주었네요.ㅋㅋ

사실, 신웅님 같은 젊은 친구들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운 글입니다. 글 솜씨야 차치하고라도 내용 또한 부실하기에...

서른 후반으로 넘어갈 즈음에 갖 서른을 넘긴 박사 선생님께로부터 회계학을 受學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수업 중에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마흔이 넘은 중년의 아줌마들이 그때까지도 아무런 삶의 기반을 다지지 못하고 무엇을 하겠다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우리 과정도 그렇고 다른 반 수업에도 그런 것들이 있었음.) 안쓰럽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다고요.

사는 것이야 또 어떻게 살아지기도 하는 것이지만, 자신을 알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가운데 보다나은 가치지향을 하며 뜻을 세워나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드네요. 물론 내 처지와 상황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아직 인생의 초반에(질적 기량 말고 물리적인 나이로^^) 해당하는 신웅님과 같은 분들은 이번 꿈 프로그램 참가 등을 통해, 보다나은 인생의 기반을 다지고 정체성 확립을 하여 좋은 뜻 잘 세워 나가길 바래요.

더 가차이 볼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좋은 기회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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