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2007년 11월 30일 04시 28분 등록
하루가 생겼습니다.

지난 주말의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토요일, 일요일 모두 출근하기로 되어 있었다가 일요일 하루만 출근하는 걸로 계획이 바뀌었던 겁니다. 그 덕분에 없던 하루가 제 손에 떨어진 셈이 된 것이지요. 매번 금요일 저녁이면 들뜨던 기분이 유난히 더했습니다. 무엇을 하며 '공짜' 하루를 보내야 할 지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동물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결국 동물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동물원을 선택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첫 째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아이를 위해서였습니다. 집 안 곳곳에 붙여 놓은 동물 그림을 보며 '어흥', '깡총', '음메', '멍멍'을 흉내 내는 아이에게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넘치는 그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는 저를 위해서였습니다. 몇 주째 주말마다 과제에 쫓겨 도서관을 전전했던 저에게 조그만 '상'을 주고 싶었습니다. 날씨 좋은 토요일 오후의 한가로운 산책은 그 상품으로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습니다. 그 외에도 전부터 나들이를 가고 싶다고 졸라온 아내와 얼마 전부턴가 어린이대공원의 입장료가 사라졌다는 사실 등이 저희 가족을 그곳으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거리로만 따지면 동물원까지는 그야말로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오후의 교통 정체를 고려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조금씩 동물원으로 향했습니다. 회색 도시의 뿌연 도로 위에서 살짝 지쳐가던 마음이 동물원에 가까워지자 거짓말처럼 살아났습니다. 딱딱하던 가슴이 말랑말랑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동물원으로 들어서며 곰곰 생각해봐도 도대체 얼마나 오랜만에 다시 그곳을 찾게 된 것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오래 되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어릴 적 소풍날이면 종종 오곤 하던 곳을 이제 결혼을 해서 아내와 아이와 함께 찾아왔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놀이기구가 있는 곳을 지나서 동물원 구역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코끼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대한 몸짓을 하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코끼리는 그 크기만큼이나 냄새도 대단했습니다. 제 품에 안겨 있던 아이의 눈이 접시만큼이나 커졌습니다. 매번 그림책 속에서나 보았던 코끼리가 눈 앞에 서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듯이 아이는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코끼리를 시작으로 사자, 호랑이 그리고 곰의 우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하나의 동물을 제법 오랜 시간 바라보며 즐겼습니다. 아이는 물론이고 우리 부부도 오래간만에 보는 동물들의 모습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처음의 흥분과 감격은 조금씩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것들이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코끼리는 엉덩이 있는 곳의 색이 허옇게 바래서 얼핏 보기에도 그다지 건강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자와 배를 드러낸 채 누워 있는 호랑이에게서 거세된 야성에 대한 갈증을 느낀 것은 그렇다고 쳐도 털이 뭉텅 빠진 타조의 등허리와 구석에 쭈그리고 잠이 든 표범의 모습에서는 좀처럼 설명하기 힘든 안타까움이 느껴졌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바빴습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주 빡빡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출근하면 야근을 하고 밤늦게야 퇴근하는 날이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그 틈 사이로 연구원 과제를 끼워 넣고 보니 아빠 노릇과 남편 구실은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름시름 마음이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가슴 저 아래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만족감과도 같은 것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다는 자기 위로와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정체 모를 희망 같은 것이 마치 진통제처럼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 희망을 품는 것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 안에 갇힌 '나'였습니다.

'나'는 의미 없이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성직자들은 인간들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개선'된 것인가? 짐승은 단지 덜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공포감과 고통, 상처, 굶주림이 야수를 병약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_니체

우리는 자연의 험난함을 빌미로 울타리 속에 머무는 동물이 오히려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생존의 문제만 보장이 되면, 그러니까 얻어 먹고, 입고, 잘 수만 있다면 엉덩이가 허옇게 바래고 털이 뭉텅 빠져도 당연히 참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울타리에 갇힌 동물 대신 밥벌이에 얽매인 우리 자신을 떠올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써내려 오던 글을 다시 되짚어 올라가 읽어 보니까 마치 연구원 과제 때문에 아빠,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양 핑계를 늘어놓았군요. 그런데 이건 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연구원 과제를 위한 책 읽기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읽은 책에 대한 글쓰기가 아니었더라면 어느 순간 '노동'이 저를 통째로 삼켜버렸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읽은 책은 하늘의 별이 되었고, 조금씩 써온 글은 앞에 펼쳐진 길이 되었습니다.

동물원을 등지고 돌아 나오는 길에 마음이 두 개였습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가족과 보낸 행복한 시간으로 팽팽히 채워졌고, 다른 하나는 꿈처럼 살지 못하도록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는 사슬의 아픔 때문에 아려왔습니다.

동물원은 동물을 인간처럼 보이게 하는 동시에 인간을 동물처럼 보이게 하여 마음을 어지럽힌다. _알랭 드 보통, 『』동물원에 가기 중에서

누구나 느끼지만 좀처럼 표현할 수 없었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것이 좋은 작가의 조건이라면 알랭 드 보통은 참 괜찮은 작가인 것 같습니다. 이제 곧 날이 밝으면 또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지금 이 순간에는 쏟아지는 햇살 속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일광욕을 즐기던 사자의 한가로움이 부럽기도 합니다.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IP *.109.108.65

프로필 이미지
최영훈
2007.11.30 04:33:37 *.118.101.11
밤을 샌 모양이구만....고생이 많았다.
나도 원영, 수현 그만할 나일때 캐리어 매고 동물원 많이 다녔음.
부산살때, 초읍에 어린이 대공원이 있는데
안고 다닌다고 어깨 빠지는 줄 알았음.
아이들 한테 음식도 필요한 때가 있듯이,
동물원 가는 것도 소중한 한 시기인 듯..
고생 많았다. 글쓰고, 없는 시간 쪼개서 동물원 간다고...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칼럼031] 동물원에 가기 [1] 香山 신종윤 2007.11.30 2273
471 [칼럼34] 아들과 함께 몽골 말달리기 [1] 素田최영훈 2007.11.30 2705
470 [칼럼 34] 가정 기도문 海瀞 오윤 2007.11.30 3516
469 (32) 유혹의 香氣 [2] 香仁 이은남 2007.11.29 2254
468 두 곳의 외지 체험을 쓰고 다시 보기 [2] 호정 2007.11.28 1994
467 [34] 나목으로 선 씨 과실의 변증법적 희망예찬 [2] 써니 2007.11.27 2436
466 모든 가능성으로의 초대 [4] 素賢소현 2007.11.26 2329
465 변화경영연구소의 길목에서 [2] 우제 2007.11.24 2075
464 [칼럼33]팔도 오인방 [2] 素田최영훈 2007.11.26 2385
463 (32) 당신께 보냅니다. [6] 時田 김도윤 2007.11.24 2125
462 [칼럼 33] 모순 속에 길이 있다지만… [4] 여해 송창용 2007.11.22 2200
461 [칼럼 33] 정 떼는 연습 海瀞 오윤 2007.11.21 3394
460 [칼럼030] 시간을 넘어선 그리움의 메신저 [2] 香山 신종윤 2007.11.23 2361
459 (33) 가을의 끝자락에서, 찌질이에게 박승오 2007.11.22 2648
458 [33] <영웅>, 오래된 영화 리뷰 한정화 2007.11.22 3244
457 마음 안의 속눈썹 그리고 시간 [3] 호정 2007.11.21 2274
456 (31) 중이 제 머리를 어찌 깎으리 [7] 香仁 이은남 2007.11.20 2435
455 마르코 폴로에게서 배운 한 가지 [3] 현운 이희석 2007.11.19 2635
454 고전속에서 잠시 우리의 미래세대를 생각하다. [2] 우제 2007.11.19 2227
453 [33-1] 처음처럼 [4] 써니 2007.11.16 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