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2007년 11월 30일 10시 23분 등록

둘째 아이가 심심하다며 나와 놀자고 떼를 쓴다. 요즈음은 부쩍 유도를 하자고 보챈다. 유도는 어디서 보았는지 폼도 제법 그럴싸하게 잡으며 나와 시합을 한다. 그런데 매번 나는 아이와 싸우기보다 네 자신과 싸움을 먼저 한다. 마음속에서 갈등이 싸움을 하고 있다.

‘평소에 잘 놀아주지 못하니 아이와 놀아야 한다.’
‘아니야,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지금은 놀아서는 안 된다.’

이런 갈등을 하다 결국은 타협을 한다. 아이와 조금만 놀고 일을 하자. 아이에게도 협상을 한다. ‘세 판만 하고 내일 결승전을 하자. 알았지’

우리는 이런 상황을 매일 만난다. 이제는 심지어 안정을 원하는 우리를 변화하라고 협박까지 한다. 이럴 때마다 갈등 속에서 번민을 하게 된다. 모순은 늘 우리 생활 속에 존재해왔고, 괴롭혀왔다.

동양에서는 모순에 대한 개념을 서양보다 오래전에 인식해왔다. 모순은 우리에게 <한비자>에 나오는 창과 방패의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초나라 사람으로 방패와 창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기의 방패를 자랑하며, ‘이 방패는 견고하여 어떤 창으로도 이것을 뚫을 수 없다.’고 하고, 다시 창을 자랑하며, ‘이 창은 매우 예리하여 어떤 방패도 찔러서 뚫리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럼, 그대의 창으로 그대의 방패를 찌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자 그 사람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원래 어떤 창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 방패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은 이 세상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 지금 요, 순 두 사람을 다 칭찬할 수 없다는 거도 창과 방패를 자랑하는 이야기와 같다.” <한비자, 난일편>

서양에서는 모순에 대한 인식을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논리학자 러셀(B, Russell)이 끄집어내었다. 그것이 유명한 크레타 섬의 거짓말 이야기이다.

“크레타 섬에 거짓말 장이가 있었다. 하루는 이 거짓말 장이가 ‘크레타 섬 사람들은 모두가 거짓말 장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거짓말인가? 아닌가? 만일 그가 거짓말쟁이라면, 모든 크레타섬 사람들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므로 그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모든 크레타섬 사람들은 거짓말쟁이가 되므로 그 역시 거짓말쟁이가 된다. 따라서 그의 말은 거짓말인 동시에 거짓말이 아니다.”

그럼 우리는 왜 지금 모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모순을 깨면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절묘한 해결책이 나오기 때문이다. 구본형 선생님도 모순과 상생하라며 <사람에게서 구하라> 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자 한 사람이 배움에 싫증이 났다. 쉬면서 놀고 싶었다. 그래서 스승인 공자에게 휴식을 취할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자가 말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는 휴식할 곳이 없는 법이다.’
제자 사공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저에게는 쉴 곳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있다. 저 무덤을 보아라. 올록볼록 솟아 있는 저 무덤들이 바로 네가 쉴 곳이다.’
자공이 이해하고 이렇게 받았다.
‘위대하구나, 죽음이여. 군자에게는 휴식을 뜻하고, 소인에게는 굴복을 뜻하는구나.’
공자가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공아, 네가 그것을 알았구나.
사람들은 모두 삶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삶 가운데 고통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늙으면 힘들게 된다는 것은 알지만,
늙으면 또한 편안함이 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무서움만 알지,
죽음이 휴식을 준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지금은 변화의 시대이다. 더 나아가 창조의 시대라고 까지 이야기한다. 새로운 제품, 새로운 전략, 새로운 서비스로 차별화하지 않으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 자체까지 불확실한 사회가 되었다. 이 사회는 단순한 개선을 요구하는 것보다 그 이상의 혁신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대적 요구에 대한 답을 찾고자 먼 길을 헤매고 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우리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모순이다. “문제 속에 답이 있다”는 모순된 명제 속에 길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이 모순을 달갑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여 회피하거나 그저 없어졌으면 바랄 뿐이었다. 적극적으로 모순과 직면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나마 해결을 한다고 하더라도 모순과 타협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매번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돌 뿐이었다. 세계적인 경영컨설턴트도 ‘오늘날 세계에 만연한 모순은 없애거나 해결할 수 없다. 대처하고 관리할 뿐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순은 해결할 수 있다. 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모순 속에서 잠재된 우리가 은연중에 인정하는 전제를 찾아 깨버리면 가능할 일이다. 둘째 아이와 나 사이에 발생한 갈등도 이런 전제를 깬다면. 단순히 ‘5분만 놀자’라는 타협안을 지양할 수 있다. 놀면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심심하면 꼭 놀아야 한다는 인식을 깨는 것도 한 방안이 될 것이다.

구글은 ‘포탈사이트는 광고를 해야 하지만, 고객은 광고를 싫어한다.’는 모순을 멋지게 해결하여 지금의 단순한 모습으로 훌륭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제 모순을 회피해야 하는 불편한 존재로 인식하지 말고, 오히려 변화의 원동력이자 창조의 근원으로 환영하자.

‘도는 멀리 있지 않지만 도달하기 어렵고, 사람과 함께 머물러 있지만 터득하기 어렵다. 그 욕심을 비우면 신이 들어와 자리하고,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말끔히 씻으면 신이 머문다. 사람은 모두 지혜롭고자 하지만 아무도 지혜로워지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 지혜여, 지혜여, 바다 밖으로 던져서 억지로 빼앗지 말아야 한다. (바깥에서 속된) 지혜를 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땅한 자리를 얻지 못한다. 무릇 바른 사람은 (바깥에서 속된)지혜를 구하지 않으므로 虛無에 처할 수 있다.’ (p 507)

IP *.212.167.184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7.11.30 11:44:46 *.75.15.205
3기 가운데 칼럼니스트를 한 명 뽑는다면 여해가 될 것 같다. 칼럼이 한결 같이 정갈하게 달려왔다. 약간 논설조이기는 하지만 점점 깊어지고 유연해지고 나름 깔끔한 인상을 주는 사색이 될 듯 싶다. 강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92 [36] 윤을 위한 세레나데-영혼이 닮은 일상 [1] 써니 2007.12.11 2261
491 반짝이는 쓰리 아이 보이 (Twinkle Three 아이 Boy) [2] 호정 2007.12.10 2512
490 (28) 그것을 기억하기를 (이희석 편) [1] 박승오 2007.12.10 2077
489 (35) 두 개의 검은 눈동자 (최영훈 편) [1] 박승오 2007.12.10 2910
488 작은 소라 엄마, 큰 소라 [3] 香山 신종윤 2007.12.10 2360
487 [36](우제를 위한 미래소설)휴식의 공간에서 [1] 교정 한정화 2007.12.10 2385
486 옹박미래동화 -'귀를 기울이면' [7] 素賢소현 2007.12.10 2694
485 관용은 정말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덕인가? [1] 현운 이희석 2007.12.08 2559
484 [칼럼35]베트남과 두바이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4] 素田최영훈 2007.12.10 2466
483 [35] 아름다움에 눈을 뜨다 file 한정화 2007.12.06 2792
482 [칼럼032] 잊혀진 사람들, 다시 돌아온 사람들 [2] 香山 신종윤 2007.12.06 2400
481 (33) 창작론創作論 (별빛. 내린다) 時田 김도윤 2007.12.06 2276
480 '소'에 대한 단상 우제 2007.12.04 2311
479 10년 전의 강의 노트를 다시 펴다 [2] 호정 2007.12.04 2600
478 웃어라, 환한 상처여. 素賢소현 2007.12.03 2161
477 (33) 고함소리에.. 香仁 이은남 2007.12.02 2087
476 [35] 모녀가 함께하는 ‘흰 그늘의 미학’ [5] 써니 2007.12.02 2767
475 (34) 길냥이의 다섯평 탐험 [2] 박승오 2007.12.01 2646
474 [34] 당신의 숲에는 뭐가 살고 있나요? 한정화 2007.11.30 2108
» [칼럼 34] 이제 모순을 환영하자. [1] 여해 송창용 2007.11.30 2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