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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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여섯 번째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 편지는 ‘종손부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에 대해 썼습니다. 이번 편지는 ‘생각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나’ 입니다.
종손을 출산하지 못한 11대 종손부인 저는 글을 쓰면서 점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시댁 어른들이 뭐래셔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마음이 단단해졌습니다. 하지만 글만 쓰고 있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어떻게든 행동으로 옮겨야했습니다.
10대 종손부인 시어머니 포함 10대에는 총 다섯 명의 며느리가 있습니다. 10대 며느리들은 일종의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했습니다. 종가의 부엌에는 여섯 명의 여성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다섯 분의 10대 며느리들이 9대 종손부인 시할머니 흉을 보기도 하고 10대 종손인 시아버지 험담을 하면서 며느리된 자의 스트레스를 풀곤 했습니다. 11대 종손부이자 외며느리인 저는 혼자였기에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였습니다. 같은 입장에 처한 동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웠습니다. 시댁 문화를 맘껏 비판하고 함께 개선해 나갈 동지이자 동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촌 시동생이 결혼하면서 오랫동안 기다린 동서가 드디어 생겼습니다. 11대 며느리가 둘이 됐습니다. 종가 부엌에는 이제 10대 며느리 다섯, 11대 며느리 둘 총 일곱 명의 여성이 있습니다. 처음엔 동서가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하지만 곧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저에게 주어졌던 ‘아들 출산’이라는 막중한 임무가 동서에게 위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종손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일가의 조카뻘 항렬이 되는 자를 양자로 들인다. [1][2]”
[1] 사후(死後)양자 제도는 1990년 민법 개정으로 폐지되었다.
[2] 보통 양자는 차남의 아들, 3남의 아들을 들이나, 굳이 양자를 들이지 않으면 차선으로 차남의 아들이 승계하고, 그렇게도 안 되면 차차선으로 3남의 아들이 승계해 나가기도 한다.
종손부가 종손을 낳지 못하면 조카뻘 항렬이 되는 자를 종손으로 들인다니, 사극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현실이 되는 중이었습니다. 해가 지나고 예쁜 딸을 낳은 동서 얼굴이 썩 밝지 않아 염려가 됐습니다. 동서는 마음이 어떨까, 저처럼 마음고생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됐습니다.
“나 죽고 나면 니들 알아서 해라. 살아있는 동안 내 도리는 할란다.”
어머니 입장은 한결 같았고 그 ‘도리’라고 이름 붙인 일련의 일들이 종손부인 저에게 종적으로만 승계되는 것이 아니라, 저를 넘어 동서에게로 위임돼 횡적으로도 승계되고 있었습니다.
사촌 시동생과 술잔을 기울이던 재작년 겨울 어느 날 새벽, 시동생 부부 또한 ‘아들 출산’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서 그동안 글로만 썼던 것들을 행동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횡적 승계를 막지 않는다면 저 또한 가부장제의 가해자 입장에 서게 되는 거란 걸 자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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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toniek@naver.com)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