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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일 23시 14분 등록
갑자기 조용한 동네에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누가 이렇게 음악을 크게 틀어 놓았을까 잠시 그 음률에 맞추어 흥얼거리기도 하다가 어째 시간이 가도 멈추질 않는가 슬슬 짜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일까… 그러다가 이내 쏟아지는 확성기의 고함 소리에 아하 하고 그 소리의 진위를 파악했다.
뭐든 적당해야지 지나치면 쾌가 불쾌로 변하는 건 잠깐이다.

여자고 남자고 간에 난 목 터지게 떠드는 사람은 일단 질색이다. 조용 조용 말해도 다 알아 듣는 데 왜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인상을 찡그리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好不好와는 관계없이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고 그래야만 자신감이 전달된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평소 멀쩡한 사람도 어떤 세계에만 들어가면 갑자기 목소리가 바뀐다. 사람이 변한는 건 말투에서 금방 느껴진다. 내 주변의 가족이나 친구들도 어떤 정신적인 은혜를 받았다고 믿거나 물질적인 네트워크를 찾아낸 것을 마치 이미 남이 살고 있는 땅에 들어가 그것을 발견했다고 외쳤던 그 옛날의 뻔뻔한 이들처럼 격앙된 목소리를 끝도 없이 피로하곤 한다.

참으로 유감이다. 목소리에게 상대방에 대해 배려를 해 달란다면 알아들을까? 사람의 품격은 어투에서 알 수 있다. 품격은 일종의 美이다. 시끄러움은 그 반대로 즉시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일순위다. 요즘 테레비 뉴스의 주인공들은 마이크를 잡고 누구라 할 것 없이 크게 외쳐대는 게 공통적으로 하나 있는 데 그게 바로 “경제”라는 단어일 것이다. 목소리만 작으면 좀 들어주련만..

제나라의 재상 관자는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무엇보다도 경제를 중요시 했으며 그래서 그의 책에는 예를 알기 위해서는 비로소 의식이 족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 예를 갖추기 위해서는 웬만큼 가질 것은 가져야 비로소 자기가 처한 세계가 눈에 들어오고 궁휼한 마음도 생기고 남을 생각하는 배려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없는 사람은 예를 모른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그 족함이란 말이 뜻하는 바를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일본어를 배울 때 속담을 공부하면서 알았던 말인데 이번 “관자”를 통해 이 말의 근원이 여기서 나왔음을 알았다. 만약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건 일본의 한 속담 중의 하나라고 계속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오늘 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많이 쓰는 표현 중에는 이미 몇 천년 전의 말들이 여기저기 그득하다. 사실 유한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무에 그리 다르겠냐만 막상 이렇게 접하다 보면 저 혼자 잘난 척하고 살아온 날들이 민망하기 그지없다.

20년 전 유학이랍시고 이 땅을 떠나갔을 때 나의 경제 상황은 그다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마 무언가 그 때 이 말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리고 계속 머리 속에 남아있었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듣기에는 돈이 없는 이에게는 너무나 계급차별 같은 뉘앙스를 주면서 마구 나의 속을 찔러대기도 했었다. 아마 그랬던 이유는 내가 가난하다는 것에 대해 어떤 피해의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가난이 부끄러웠다.

나의 아버지는 굶어 죽어도 그 누구한테 머리 숙이는 일을 하지 않고 떠난 분으로 나는 그의 피를 아주 혁혁하게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평을 들으며 자란 셋째 딸이다. 물론 그의 딸들은 덕택에 민감한 시기에 가난을 경험했고 그래서 될 놈은 되었고 못 되는 놈은 세월의 풍랑에 같이 휩쓸려 갔었다. 저 속담이 내게 가져다 준, “의식주가 충족되어야 비로소 예를 안다” 하고 매정하게 결론 지어진 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그 말의 무게에서 나는 혹시 내가 예를 모르는 사람이 될까 우려했었던 기억이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늘 강조했던 것은 “사람은 경우가 밝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 그 “경우 있음”과 “경우 없음”의 차이만큼은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어릴 때 영향력 있는 사람의 말은 평생을 따라간다. 그렇다고 내가 오늘 날 경우 있는 사람이란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나는 때때로 소위 말하는 “싸가지” 없는 행동도 곧잘 한다. 그건 딸의 시대에서는 가끔 필수 불가결한 행위라고 돌아간 아버지에게 가끔 양해를 구하기도 하는 부분이다. 만약 살아계셨다면 담배 한 보루나 아이스크림 한 통에 분명 어쩔 수 없이 넘어가 주셨으리라 믿는다.

내가 자란 시대는 조금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생각해보면 전부가 다 가난했다. 부와 가난의 의미를 엄밀하게 논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가난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만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객관화된 수치의 비교로 그것을 구별한다면 그 때는 분명 지독하게 가난했음이다. 60년대 70년대의 한국은 이른바 빈국에 속해 있었고 80년대 초는 인권유린이나 환경의 문제 따윈 몇몇 소수자를 제외하고 금기사항으로 치부되던 시대였다.

치 떨리게 가난을 경험한 시절을 부모세대에 가졌던 사람들은 그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힘을 쏟았다. 생태가 변해가고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절규하는 소리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몸짓을 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성능 좋은 확성기에서는 잘 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외쳐대는 소리만 틀어 주었다. 마치 양 옆이 막힌 길에다 사람들을 몰아 넣고 뒤에서 계속 밀어 넣으며 그저 걸음을 재촉하게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막힌 그곳을 통과하다 보면 언젠가 그들이 꿈꾸는 미래가 도래하는 것처럼 믿게 되었다.

믿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할 듯 그들 중에는 그곳을 달려서 통과하는 자도 속출했다. 그리고 뛰어 나간 자들은 처음엔 몰랐지만 뒤쳐진 이들 중에는 그 무리에 밟혀 죽었거나 부상을 당한 자들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몇몇 이들은 그것을 역사의 순환이라 치부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양심을 가지고 그간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알아차렸다. 내가 살고 네가 죽는 것이 우리가 꿈꿔왔던 미래가 아니었음을..
그리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이 그들을 한 길로 몰아가게 했고 어떤 길이 진정 그들이 갈 길이었는 가를…

몰아넣은 자의 잘못인가? 아니면 귀가 얇아 질주한 사람들이 잘못인가? 또 아니면 우리가 진정 믿어야 할 대상이 그것이 아니라고 일깨워 주지 못한 선각자들의 잘못인가?
누군가의 잘못이건 그 대가는 고스란히 우리가 또 우리의 다음 세대가 치르게 될 것이다.

의식주의 해결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의 충족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첫 번째는 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욕망의 적정선은 어디일까?
욕망이란 것의 끝이 과연 있는가?
또한 그것이 나만 충족하면 되는 것인가? 혹시 위정자는 그 욕망의 충족을 전제로 실은 어떤 곳의 누군가의 삶을 짓밟아 온 것은 아닐까? 우리들은 암묵적인 동의 하에 어쩔 수 없다고 묵과하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오로지 “경제”만이 우리의 살 길인가? 정말 묻고 싶다.
우리에게는 문화도 없고 토양도 없고 내가 사는 땅의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은 없는가? 우리는 앞으로도 얼마나 “경제”라는 주문에 우리가 살아온 산천을 내주고 휘둘릴 것인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요즘은 모든 것이 경제로 통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하다. 여전히 막혀진 길 위에 서 있다. 그래서 禮를 말하는 주인공도 볼 수 없다. 2000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아직도 제나라의 관자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연치 않게 들려오던 노랫소리에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독서의 시간을 빼앗긴 날이다. 24층 꼭대기까지 올라오던 소리가 이제 멈췄다. 며칠만 참으면 되려나 속으로 날짜를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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