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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3일 00시 26분 등록

온 몸을 흔들어 몸을 풀고 바닥에 누웠다. 거친 호흡이 본래의 호흡을 지나 명상상태로 들어갈 즈음 나지막히 선생님의 멘트가 들려왔다.

“자, 이제 서서히 손이 자연스럽게 몸의 부분을 찾아가도록 합니다. 그저 손이 움직이게 내버려 둡니다. 손의 길을 따라 나의 손이 몸에 한 부분에 머무르게 합니다. 충분히 느껴보세요.”

선생님의 멘트와 함께 나의 손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온 몸의 감각이 손에 집중되어져 손만이 오롯이 생명력 있게 숨 쉬고 있다. 외부를 향해 열려있던 손이 스스로의 길을 내며 나의 몸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의 손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가슴을 향해 다가오던 손은 어느새 목을 타고 올라와 나의 얼굴로 향하고 있다. 양손이 나의 얼굴위에 멈추었다. 얼굴과 손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아릿한 전율이 명치끝을 지나 심장을 관통했다. 마음이 아프다. 얼굴이 아프다. 따뜻한 손의 기운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의 얼굴은 모든 경계를 풀고 두 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두 손은 아픈 얼굴을 담요처럼 덮어주었다. 이름 모를 담요가 얼굴을 감싸는 순간, 눈 속에서 빛의 알갱이들이 정신없이 툭툭 터져 나왔다.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그곳에 얼굴의 방이 있어.’

얼굴의 방. 여자 아이 하나. 내려오는 계단의 꼭대기에 무릎을 꿇고 앉아 동생이 업히기를 기다리고 있다. 열린 등위로 동생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동생의 등을 밀었다. 일어나 보니 20칸이 넘는 계단 아래 나는 떨어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직 어린 막내 동생을 찾았다. 동생은 말끔하게 계단 위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뻐근한 몸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왔다. 나를 보자마자 엄마는 놀라는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셨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에 뭐가 묻었냐며 얼굴을 만졌다. 차갑고 축축한 느낌이 손으로 전해졌다. 손을 내려 바라보니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피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온 몸으로 얼굴의 통증이 전해져 왔다.

동네 남자아이의 장난으로 나의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 작은 얼굴에 빈틈없이 칼로 그어놓은 자국이 새겨졌다. 모든 통증을 얼굴에 알알이 다 주워 담은 듯, 통증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독을 하고 약을 발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흉터의 색은 짙어졌다. 상처 난 얼굴이 싫었다. 숨기고만 싶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눈길을 피했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고 다녔다.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거울을 보지 않고, 스스로 나를 피했다.

부정하고만 싶었던 나의 상처, 벌어졌던 자리에 속살을 채우지 못한 채, 그렇게 오랜 세월 그 얼굴의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상처들 얼마나 나를 향해 오랫동안 말을 걸어왔을까. 얼굴은 그 상처를 지금도 기억하고,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의 손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해. 다시 네 손을 다오’

현재의 아주 따뜻한 두 손이 다시 얼굴을 감싸 안았다. 눈 속에서 흐르는 빛의 알갱이들이 또 다시 정신없이 툭툭 터져 나왔다. 그 엷은 두 손으로 상처 하나 하나, 마음 깊은 곳까지 쓰다듬었다. 그 손길 보드랍고 향기롭다. 어느새 나는 편안하게 바닥에 누워 호흡에 집중하고 있었다.

‘보고싶어’

나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깨어나 선명하게 내 주위를 감싸 안았다. 걸음 걸음을 알아채고, 들숨과 날숨을 알아채고, 문 여는 손을 알아채고, 수도꼭지에 나오는 물소리를 알아차렸다. 물을 손에 담아 얼굴을 씻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얼굴을 거울에 비추었다. 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빛의 알갱이들 사이로 환하게 웃음꽃이 피어났다. 얼굴이 웃는다. 상처가 웃는다. 상처도 환하게 빛날 수가 있구나. ‘상처’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상처’와 ‘통증’ 자체가 고스란히 나의 육체로, 곰삭은 채로 빛나는 환한 상처이다.

혼란을 살아내는 내 현재의 따뜻한 얼굴을 다시 매만졌다. 이마, 눈썹, 눈, 코, 뺨, 입술, 턱. 손끝을 타고 피어나는 삶의 경의와 사랑, 고마움. 말이 내장 깊은 곳으로부터 치밀어 올랐다.

‘지금 보고 있는 너가 오늘 너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질 유일한 존재다! 모든 환한 상처여 그렇게 빛나는 웃음을 잃지 마오. 상처가 웃으면 웃을수록, 영혼은 몰래, 이렇게, 한없이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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