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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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는 동양의 고전을 접할 기회가 여러 번 있는 달이었습니다. <강의>, <관자>,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서 주옥같은 고문 구절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여러 구절이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꼭 어디서 봤던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10년전 즈음에 강의실에서 그들을 보았었습니다.
책꽂이 한 켠에 먼지 쌓인 채 꽂혀 있던 교재와 강의 노트를 다시 펴보았습니다. 학기가 끝난 후 여태 한 번도 펴지지 않았지만, 몇 번의 책장 정리에도 불구하고 용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피땀 어린 자국이 역력한 책과 노트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안을 들여다 보니 기억이 나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는데, 여하튼 그 때 보던 것과는 뭔가가 달라 보입니다.
페이지를 몇 장 넘기다 보니 ‘기름 장수 노인(賣油翁)’ 이란 제목의 글이 들어옵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한문 생략)
"진요자(陳堯咨)란 자는 활을 잘 쏘았는데, 당시 그를 비길 자가 없었다. 그는 이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언제 그가 집 안에서 활쏘기를 하고 있는데, 기름 장수 노인이 짐을 내려 놓고 그를 보면서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10발 중 8~9발은 명중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진요자가 물었다. ‘너는 활을 쏠 줄 아느냐? 내 활쏘기 솜씨가 탁월하지 않느냐?’ 노인은 말했다. ‘별 거 아니네. 손에 익었을 뿐이야.’ 진요자는 화가 났다. ‘감히 어떻게 내 활쏘기를 깔보느냐?’ 노인이 말했다. ‘나 역시 기름을 따른 경험으로 도리를 익혔을 뿐이야.’ 노인은 병 하나를 꺼내 놓더니 동전으로 입구를 막았다. 국자로 기름을 퍼서 천천히 기름을 부으니, 동전 구멍 속으로 정확히 들어가는데 동전에 기름이 묻지 않았다. 노인이 말했다. ‘나도 별거 아니지, 손이 익숙할 뿐이야.’ 진요자는 웃으며 그를 쫓아 보냈다."
<강의>를 보신 분은 ‘庖丁解牛’이야기를 기억할 겁니다. 포정해우 역시 제가 당시 만났던 고문이었습니다. 이 글은 소를 해체함이 신의 경지에 이름을 묘사한 글이었는데, 위 이야기도 그런 맥락과 통합니다. 그 신의 경지란 도(道)를 뜻함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기름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동전 구멍에 기름을 흘려 넣는 재주를 보이면서 ‘별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노인의 모습이나 그를 쫓아 내는 진요자의 모습이 해학적으로 다가옵니다.
또 여러 장을 넘기니 익숙한 두 인물이 나옵니다. 편작(扁鵲)과 환공(桓公)인데, 편작은 전국 시대 명의이고, 이런, 환공은 <관자>에 등장하는 濟 환공이 아니라 蔡 환공이군요. 제목은 ‘扁鵲見蔡桓公’ (한문 생략)
"편작이 채 환공을 알현한다. 편작이 잠시 멈추어 서더니 말한다. ‘폐하의 병이 살결에 있습니다. 고치지 않으면 심해질 것입니다.’ 환공이 말하였다. ‘나는 병이 없다.’ 편작이 나가니, 환공이 말한다. ‘의사는 병이 없는 사람도 치료 하려 드니, 이로서 솜씨를 보이려는 게야!’ 10일이 지났다. 편작이 환공을 뵙고 하는 말이 ‘폐하의 병은 피부와 근육 안으로 이르렀습니다. 고치지 않으면 심해질까 우려됩니다.’ 환공은 대답이 없었다. 편작이 나가자 환공은 역정을 냈다. 10일이 지났다. 편작이 또 환공을 뵈었다. ‘폐하의 병은 이미 위장까지 침투했습니다. 고치지 않으면 심해집니다.’ 환공은 여전히 문제삼지 않았다. 편작이 나가고 환공은 또한 기분 나빠했다.
10일이 지나 편작이 멀리서 환공을 보다가 발길을 돌려 갔다. 환공이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자 편작이 답한다. ‘병이 피부 위에 머무를 때는 燙으로 치료하면 되었고, 근육 안에 들어갔을 때는 針으로 치료하면 되었고, 위장으로 침투했을 때는 火齊湯이 효험이 있었을텐데, 골수에 병이 들어갔을 때는 운명에 맡길 수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현재 병이 이미 골수에 들었으니 더 이상 묻지 않았던 겁니다.
5일이 더 지나 혼공은 전신에 통증이 왔다. 사람을 보내 편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진나라로 가버린 뒤였다. 환공은 이렇게 죽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諱疾忌醫 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입니다. 병을 감추고 의사를 피하다, 즉, 자기 결점을 덮어 두고 남의 충고를 피하며, 스스로 고치려 하지 않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의 안 좋은 곳을 건드리면 부정하거나 방어하고 인정하기 조차 안하려 할 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귀에 잘 안들어 오지요. 하지만 그런 메시지를 접수하면 새기고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현실에서는 쓴 충고를 멀리하고 있음을 모를 때도 많습니다. 저부터도 그랬네요.
이 충고라는 것은, 꼭 밖에서만 오는 건 아닌 듯 합니다. 우리는 종종 내면의 소리를 은연중에 무시하곤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인데 말이지요.
그런데, 10년 전 이 글을 배울 때는 그런 고사성어가 있는 줄도 몰랐답니다.
페이지를 훌쩍 넘기니 한유(韓愈 : 唐代문학가) 의 사설(師說 : 스승을 논함) 이 나옵니다. (한문 생략)
"옛날의 배우는 자에게는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스승된 자는 도를 전함으로써 학을 가르치고 의혹을 풀었다. 사람은 나면서 아는 자들이 아닌데, 누군들 의혹이 없을 것인가? 의혹이 있는데 스승을 따르지 않으면(배우지 않으면) 그 의혹됨이 끝내 풀리지 않는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 도를 깨달음이 나보다 먼저이면 나는 그를 좇아 스승으로 한다. 나보다 늦게 태어나 그 도를 깨달음이 역시 나보다 먼저이면 나는 그를 좇아 스승으로 삼는다. 나는 도를 스승으로 하니 어찌 나보더 먼저 혹 늦게 태어남을 문제 삼겠는가? 이런 이유로 귀하건 천하건 간에, 나이가 많고 적고 간에 도가 있는 곳에는 스승이 있다.(중략)"
다시 보니, 참 와닿는 구절이 아닐 수 없는데, 말로는 표현을 잘 안됩니다.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에서 ‘배움에 있어서도 스승의 마음을 파악해야지 스승의 흔적을 좇아서는 안 된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스승의 마음은 곧 도(道)와 상통하겠습니다.
뒤로 가면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孔子曰 : “三人行, 則必有我師” 是故弟子不必不如師, 師不必賢於弟子, 聞道有先後, 術業有專攻, 如是而已."
"공자가 말하길 ‘세 사람 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제자가 반드시 스승보다 못한 것은 아니며, 스승이 꼭 제자보다 현명한 것은 아니니, 도를 깨달음에 선후가 있고, 전문적으로 연구함(배움)이 이와 같을 뿐이다. (그에 따라 스승과 제자를 삼았다.)"
저는 당시 三人行, 則必有我師 이 구절을 무척 좋아하여 한동안 담아두었었습니다. 저에게는 그 때 이 문장에서 ‘누구라도 나보다 뛰어난 면이 있으니, 겸손하라’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받았었는데, 그 후 한참을 잊고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보니 그 때 기억이 나는 한편, 좀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역시 핵심은 ‘도’를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또 책장을 조금 넘기다 보니 빨간색 펜으로 ‘외우기!!!’라고 표시해둔 글이 보입니다. 소식(蘇軾 : 北宋 문학가)의 전적벽부(前赤壁賦) 라는 산문입니다. 한 마디로 소식과 객(客)이 적벽 앞에 배 띄우고 노닐었다는 글인데. 11월 초에 찾은 적벽강이 떠올라 조금 적어봅니다.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잠시 후, 달이 동산 위로 모습을 드러내 남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배회하는구나. 물안개는 강을 가로지르고 물빛은 하늘에 닿았다. 작은 배를 가는 대로 내버려두니, 만경의 드넓음을 건너는구나."
표현이 유려하고 서정적이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한문 생략)
"소식이 말하길 ‘객은 물과 달을 아는가 모르는가. 흐르는 것이 이 물과 같지만 일찍이 흘러간 것은 없으며, 차고 기우는 것이 저 달과 같으나 소멸 생장은 없다. 모두 장차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일찍이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불변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과 나 모두 끝이 없으니 또 무엇이 부러운가? 또 세상에 사물은 각각 임자가 있으니, 만약 내가 가질 것이 아니면 조금도 취하지 않는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중의 밝은 달은 귀로 들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고 경치가 되니, 취함에 금함이 없고 사용함에 다함이 없다. 고로 대자연은 끝이 없는 저장창고이고, 이것을 그대와 함께 즐기는 것이다."
흐르지만 흘러간 것이 없고, 차고 기울지만 소멸과 생장은 없다니, 세상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며, 나와 사물은 끝이 없다니, 이 알듯 말듯한 말들은 무슨 뜻일까요. 동양사상의 특징이라는 대로 모순 속에서 조화를 끌어내려 하는 것이고, 순환적 사고의 발로인 것일까요. 장파 교수라면 이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할 지 참 궁금해집니다.
제가 10년 전 이 때 이 고문 강의를 들을 때는 고전을 감상하거나 뜻을 음미하지 못하였습니다. 해석하고 암기하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그게 그 과목 공부의 전부였습니다. 유래, 의미, 배경, 감상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요. 실제로 주옥같은 구절을 많이 만났지만 대부분 그대로 흘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담당 교수님 역시 해석이나 뜻풀이, 시험에 집중하셨던 듯 합니다. 이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하지만 수업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고, 보통 학생들은 감상이나 음미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므로, 설사 그것에 좀 더 치중되었다 하더라도 호응도가 낮았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뜻풀이나 해석이 중요하긴 합니다. 그 나이 대 학생들에게 심오한 뜻이 전달되기가 그만큼 여러웠기도 하겠고요.
못내 아쉬웠다고 하면서 이유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저를 봅니다. 장파가 중국 미학을 논하면서 말했듯이, 고대 중국인들은 예(禮)에 벗어나는 갈등과 저항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스승 존경도 ‘예’이니 이것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유를 찾음은, 저 역시 동양인이라는 생각에 살며시 미소가 갑니다.
그 와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딱 두 내용이 있었습니다. <강의> 칼럼에도 언급했습니다만 빠른 실천을 강조한 ‘要做則做’라는 구절과,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라.(其責己也重以周, 其待人也輕以約)라는 구절입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실천이 느리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뇌리에 남게 되었고, 두 번째는 공감하고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만.
상황에 따라 들어오는 것도 다를 것입니다. 한 달 동안 고전을 읽고 동양 사상들을 접하다 보니 그만큼 더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10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저도 그때와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제 또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또 다른 느낌으로 접하게 되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IP *.120.66.207
책꽂이 한 켠에 먼지 쌓인 채 꽂혀 있던 교재와 강의 노트를 다시 펴보았습니다. 학기가 끝난 후 여태 한 번도 펴지지 않았지만, 몇 번의 책장 정리에도 불구하고 용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피땀 어린 자국이 역력한 책과 노트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안을 들여다 보니 기억이 나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는데, 여하튼 그 때 보던 것과는 뭔가가 달라 보입니다.
페이지를 몇 장 넘기다 보니 ‘기름 장수 노인(賣油翁)’ 이란 제목의 글이 들어옵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한문 생략)
"진요자(陳堯咨)란 자는 활을 잘 쏘았는데, 당시 그를 비길 자가 없었다. 그는 이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언제 그가 집 안에서 활쏘기를 하고 있는데, 기름 장수 노인이 짐을 내려 놓고 그를 보면서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10발 중 8~9발은 명중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진요자가 물었다. ‘너는 활을 쏠 줄 아느냐? 내 활쏘기 솜씨가 탁월하지 않느냐?’ 노인은 말했다. ‘별 거 아니네. 손에 익었을 뿐이야.’ 진요자는 화가 났다. ‘감히 어떻게 내 활쏘기를 깔보느냐?’ 노인이 말했다. ‘나 역시 기름을 따른 경험으로 도리를 익혔을 뿐이야.’ 노인은 병 하나를 꺼내 놓더니 동전으로 입구를 막았다. 국자로 기름을 퍼서 천천히 기름을 부으니, 동전 구멍 속으로 정확히 들어가는데 동전에 기름이 묻지 않았다. 노인이 말했다. ‘나도 별거 아니지, 손이 익숙할 뿐이야.’ 진요자는 웃으며 그를 쫓아 보냈다."
<강의>를 보신 분은 ‘庖丁解牛’이야기를 기억할 겁니다. 포정해우 역시 제가 당시 만났던 고문이었습니다. 이 글은 소를 해체함이 신의 경지에 이름을 묘사한 글이었는데, 위 이야기도 그런 맥락과 통합니다. 그 신의 경지란 도(道)를 뜻함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기름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동전 구멍에 기름을 흘려 넣는 재주를 보이면서 ‘별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노인의 모습이나 그를 쫓아 내는 진요자의 모습이 해학적으로 다가옵니다.
또 여러 장을 넘기니 익숙한 두 인물이 나옵니다. 편작(扁鵲)과 환공(桓公)인데, 편작은 전국 시대 명의이고, 이런, 환공은 <관자>에 등장하는 濟 환공이 아니라 蔡 환공이군요. 제목은 ‘扁鵲見蔡桓公’ (한문 생략)
"편작이 채 환공을 알현한다. 편작이 잠시 멈추어 서더니 말한다. ‘폐하의 병이 살결에 있습니다. 고치지 않으면 심해질 것입니다.’ 환공이 말하였다. ‘나는 병이 없다.’ 편작이 나가니, 환공이 말한다. ‘의사는 병이 없는 사람도 치료 하려 드니, 이로서 솜씨를 보이려는 게야!’ 10일이 지났다. 편작이 환공을 뵙고 하는 말이 ‘폐하의 병은 피부와 근육 안으로 이르렀습니다. 고치지 않으면 심해질까 우려됩니다.’ 환공은 대답이 없었다. 편작이 나가자 환공은 역정을 냈다. 10일이 지났다. 편작이 또 환공을 뵈었다. ‘폐하의 병은 이미 위장까지 침투했습니다. 고치지 않으면 심해집니다.’ 환공은 여전히 문제삼지 않았다. 편작이 나가고 환공은 또한 기분 나빠했다.
10일이 지나 편작이 멀리서 환공을 보다가 발길을 돌려 갔다. 환공이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자 편작이 답한다. ‘병이 피부 위에 머무를 때는 燙으로 치료하면 되었고, 근육 안에 들어갔을 때는 針으로 치료하면 되었고, 위장으로 침투했을 때는 火齊湯이 효험이 있었을텐데, 골수에 병이 들어갔을 때는 운명에 맡길 수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현재 병이 이미 골수에 들었으니 더 이상 묻지 않았던 겁니다.
5일이 더 지나 혼공은 전신에 통증이 왔다. 사람을 보내 편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진나라로 가버린 뒤였다. 환공은 이렇게 죽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諱疾忌醫 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입니다. 병을 감추고 의사를 피하다, 즉, 자기 결점을 덮어 두고 남의 충고를 피하며, 스스로 고치려 하지 않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의 안 좋은 곳을 건드리면 부정하거나 방어하고 인정하기 조차 안하려 할 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귀에 잘 안들어 오지요. 하지만 그런 메시지를 접수하면 새기고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현실에서는 쓴 충고를 멀리하고 있음을 모를 때도 많습니다. 저부터도 그랬네요.
이 충고라는 것은, 꼭 밖에서만 오는 건 아닌 듯 합니다. 우리는 종종 내면의 소리를 은연중에 무시하곤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인데 말이지요.
그런데, 10년 전 이 글을 배울 때는 그런 고사성어가 있는 줄도 몰랐답니다.
페이지를 훌쩍 넘기니 한유(韓愈 : 唐代문학가) 의 사설(師說 : 스승을 논함) 이 나옵니다. (한문 생략)
"옛날의 배우는 자에게는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스승된 자는 도를 전함으로써 학을 가르치고 의혹을 풀었다. 사람은 나면서 아는 자들이 아닌데, 누군들 의혹이 없을 것인가? 의혹이 있는데 스승을 따르지 않으면(배우지 않으면) 그 의혹됨이 끝내 풀리지 않는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 도를 깨달음이 나보다 먼저이면 나는 그를 좇아 스승으로 한다. 나보다 늦게 태어나 그 도를 깨달음이 역시 나보다 먼저이면 나는 그를 좇아 스승으로 삼는다. 나는 도를 스승으로 하니 어찌 나보더 먼저 혹 늦게 태어남을 문제 삼겠는가? 이런 이유로 귀하건 천하건 간에, 나이가 많고 적고 간에 도가 있는 곳에는 스승이 있다.(중략)"
다시 보니, 참 와닿는 구절이 아닐 수 없는데, 말로는 표현을 잘 안됩니다.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에서 ‘배움에 있어서도 스승의 마음을 파악해야지 스승의 흔적을 좇아서는 안 된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스승의 마음은 곧 도(道)와 상통하겠습니다.
뒤로 가면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孔子曰 : “三人行, 則必有我師” 是故弟子不必不如師, 師不必賢於弟子, 聞道有先後, 術業有專攻, 如是而已."
"공자가 말하길 ‘세 사람 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제자가 반드시 스승보다 못한 것은 아니며, 스승이 꼭 제자보다 현명한 것은 아니니, 도를 깨달음에 선후가 있고, 전문적으로 연구함(배움)이 이와 같을 뿐이다. (그에 따라 스승과 제자를 삼았다.)"
저는 당시 三人行, 則必有我師 이 구절을 무척 좋아하여 한동안 담아두었었습니다. 저에게는 그 때 이 문장에서 ‘누구라도 나보다 뛰어난 면이 있으니, 겸손하라’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받았었는데, 그 후 한참을 잊고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보니 그 때 기억이 나는 한편, 좀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역시 핵심은 ‘도’를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또 책장을 조금 넘기다 보니 빨간색 펜으로 ‘외우기!!!’라고 표시해둔 글이 보입니다. 소식(蘇軾 : 北宋 문학가)의 전적벽부(前赤壁賦) 라는 산문입니다. 한 마디로 소식과 객(客)이 적벽 앞에 배 띄우고 노닐었다는 글인데. 11월 초에 찾은 적벽강이 떠올라 조금 적어봅니다.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잠시 후, 달이 동산 위로 모습을 드러내 남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배회하는구나. 물안개는 강을 가로지르고 물빛은 하늘에 닿았다. 작은 배를 가는 대로 내버려두니, 만경의 드넓음을 건너는구나."
표현이 유려하고 서정적이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한문 생략)
"소식이 말하길 ‘객은 물과 달을 아는가 모르는가. 흐르는 것이 이 물과 같지만 일찍이 흘러간 것은 없으며, 차고 기우는 것이 저 달과 같으나 소멸 생장은 없다. 모두 장차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일찍이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불변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과 나 모두 끝이 없으니 또 무엇이 부러운가? 또 세상에 사물은 각각 임자가 있으니, 만약 내가 가질 것이 아니면 조금도 취하지 않는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중의 밝은 달은 귀로 들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고 경치가 되니, 취함에 금함이 없고 사용함에 다함이 없다. 고로 대자연은 끝이 없는 저장창고이고, 이것을 그대와 함께 즐기는 것이다."
흐르지만 흘러간 것이 없고, 차고 기울지만 소멸과 생장은 없다니, 세상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며, 나와 사물은 끝이 없다니, 이 알듯 말듯한 말들은 무슨 뜻일까요. 동양사상의 특징이라는 대로 모순 속에서 조화를 끌어내려 하는 것이고, 순환적 사고의 발로인 것일까요. 장파 교수라면 이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할 지 참 궁금해집니다.
제가 10년 전 이 때 이 고문 강의를 들을 때는 고전을 감상하거나 뜻을 음미하지 못하였습니다. 해석하고 암기하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그게 그 과목 공부의 전부였습니다. 유래, 의미, 배경, 감상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요. 실제로 주옥같은 구절을 많이 만났지만 대부분 그대로 흘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담당 교수님 역시 해석이나 뜻풀이, 시험에 집중하셨던 듯 합니다. 이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하지만 수업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고, 보통 학생들은 감상이나 음미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므로, 설사 그것에 좀 더 치중되었다 하더라도 호응도가 낮았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뜻풀이나 해석이 중요하긴 합니다. 그 나이 대 학생들에게 심오한 뜻이 전달되기가 그만큼 여러웠기도 하겠고요.
못내 아쉬웠다고 하면서 이유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저를 봅니다. 장파가 중국 미학을 논하면서 말했듯이, 고대 중국인들은 예(禮)에 벗어나는 갈등과 저항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스승 존경도 ‘예’이니 이것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유를 찾음은, 저 역시 동양인이라는 생각에 살며시 미소가 갑니다.
그 와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딱 두 내용이 있었습니다. <강의> 칼럼에도 언급했습니다만 빠른 실천을 강조한 ‘要做則做’라는 구절과,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라.(其責己也重以周, 其待人也輕以約)라는 구절입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실천이 느리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뇌리에 남게 되었고, 두 번째는 공감하고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만.
상황에 따라 들어오는 것도 다를 것입니다. 한 달 동안 고전을 읽고 동양 사상들을 접하다 보니 그만큼 더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10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저도 그때와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제 또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또 다른 느낌으로 접하게 되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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