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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4일 13시 39분 등록
우리에게 소는 가축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웬만한 장정 하나보다 나은 노동력 제공자였고 농가의 부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한갓 짐승을 사람대접했을 만큼 소는 귀중한 존재였고 인간과 정을 나누었다. 평생 순종하며 우직하게 일하다가 죽어서도 육신으로 봉사하는 존재
-허영만-

어느 무더운 여름날 저녁 무렵.
일박의 짧은 일정으로 강원도 산골을 여행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스쳐지나가는 산야는 푸르렀다.
마을 입구를 지날 무렵.
때 마치 불어오던 바람을 타고 멀리 목장에서부터 날아오는 소똥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 때 네 살 난 딸이
“아빠, 무슨 냄새죠?” 하고 물었다.
남편은 싱긋 웃으면서
“ 아, 이 구수한 냄새 말이지, 너 소똥 냄새를 말하는 구나.”
그리고 마을 어귀에 있는 소목장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되 뇌였다.
‘ 아 냄새 한번 좋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자라면서 아빠가 이야기한 소똥의 ‘구수한 냄새’의 의미를 잊지 않았다. 동시에 소는 그들의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친근한 벗이며 가끔은 고향의 돌아볼 수 있는 여유로움으로 각인되었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식객’.
생동감 있는 영상과 공감이 있는 에피소드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서민적인 음식에서부터 궁중요리까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고 오감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혹 그 사이에 나름의 개인적인 공감의 영역을 만들어 나갔던 관객이라면 영화의 맛은 더했으리라 믿는다.
영화관에 동행한 한 동료는 마음껏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단다. 또 다른 동료는 원작자의 다른 영화 ‘타자’를 연상했고 학창시절의 그 짜릿한 라면 맛도 되살려 내었다. 또한 혀끝을 자극시킨 다양한 먹 거리의 등장은 우리 모두를 고깃집 식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내가 영화의 앵글을 맞춘 곳은 생동감 있는 영상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푸짐한 먹 거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영화관을 나서며 난 울었다. 성찬이 동생 ‘소’ 때문에 울고 내 마음속에 영롱한 빛으로 남아있는 ‘부룩이’라고 불리었던 ‘기억의 소’ 때문에 울었다. 이로 인해 나는 한동안 가슴앓이를 했으며 잠잠하던 어지럼증이 되살아났다. 생선이라도 먹어야 된다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간간이 먹던 소량의 어패류도 먹지 않았다.

영화속에서 되살아난 기억속의 부룩이는 우리 가족의 중심이었다. 그(숫소)는 가난한 우리 집의 희망이고 웃음이었다.

소마굿간은 뒷간 가는 길목에 자리했다.
“부룩아”
뒷간 가는 길이 아무리 급해도 우리는 그를 이렇게 불러주고 지나쳤다.
“ 이잉”
대답치고는 참으로 단순하다. 가끔 우리 중 누군가가 대빗자루로 그의 등을 쓸어주면 그는 긴 혀를 이용해서 우리의 옷에 입맞춤하고 평안의 숨을 들이 마신다. 그가 우리에게 가족이었듯이 그에게 있어서도 우리는 그와 동일한 하나의 의미체였던 것이다.
부룩이가 팔려 가던 날을 우리 모두가 울었다. 할머니도 울었고 어머니도 울었다. 나도 울고 동생도 울었으며 부룩이도 몇 번을 돌아보며 우리 집을 떠났다.

영화속의 성찬이 동생도 그렇게 떠났다. 그는 울었고 성찬이도 울었다. 그리고 형 성찬이에게 육신으로 다가갔고 죽음으로써 충직한 아우가 되었다. 울되 울지 않았으며 슬펐으되 슬퍼하지 않았다. 그러함으로써 그는, 그를 사람대접해 준 형에게 현존하는 최고의 요리사 자리를 가져다주었다.

‘소’
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제 그는 우리에게 ‘먹 거리’ 이상은 아니다. 우리의 가족도 아니고 성찬이 동생도 아니다. 그는 아롱사태고 등심이고 우둔이다. 때로는 광우병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고 FTA라는 괴물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나의 부룩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성찬이 동생은 어디로 갔을까?
또한 마르코 포로가 여행길에서 만났던 그 소들은 아직도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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