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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6일 22시 50분 등록
A. 창(創) _ 보다

“내 작업은 눈에 익숙한 것들을 내가 어떻게 보는지를 ‘보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 재스퍼 존스

1. 심장을 뒤흔드는 거친 락 음악과 거대한 함성 사이. 사방. 문득. 고요하다. 투명한 거미줄로 뒤덮인 촘촘한 매트릭스 속에서. 모두들. 아둥. 바둥. 거린다. 나는 너를 넘지 못하고, 너는 그를 넘지 못한다. 굉음의 파도가 출렁이는 폭풍우 사이. 한줄기 햇살처럼. 세상. 문득. 고요하다. 말간 얼굴. 그리운 너를 만난다.

2. 환승역을 한참 지나쳤다. 그냥 내린다. 답답한 지하를 빠져나와 지상을 걷는다. 안국역에서 대학로까지 걸어가는 길. 가을이 지나가고, 구름이 스쳐가고, 달빛이 뼈처럼 내린다. 창덕궁 돌담길을 지나치다 명치 끝이 쿡. 시리다. 닫혔던 기억 하나. 문을 연다. 돌아선 등 하나. 떠나 보낸다. 반짝이는 가로등 사이 투명한 물고기떼. 이리저리 유영游泳한다.

3. 내 안의 무언가가. 반짝. 하고 연결되는 순간. 오롯이 나를 보는 순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깨닫는 순간. 나를 저만치 떠나 보내는 순간. 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이 고요해지는 순간. 세상이 온 몸으로 일어나는 순간. 한 송이 꽃으로 찬란히 피어나는 순간. 발간 대낮이 스위치를 탁, 내리고 캄캄해지는 순간, 다시 불이 켜져 눈동자 안까지 환해지는 바로 그 순간.

4. 미래와 과거를 오간다. 무형의 동東과 유형의 서西를 잇는다. 높은 성을 쌓아 올리고, 다시 덧없는 벽을 무너뜨린다. 평화로이 씨 뿌리며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거침없이 말을 달리며 지평선을 휘, 둘러본다.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무엇이더냐. 부질없는 경계들을 깨부순다.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인간은 자신 속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했던가. 자신을 무너뜨리고, 다시 일으켜 세운다. 몸과 맘을 추스리고, 춤을 춘다. 혼돈의 춤을 춘다.





"생각이 팔황을 누비고, 신이 만고의 세월을 노닌다. (蕩思八荒,, 游神萬古.)" - 호응린 <시수> 권5에서

신이 만고의 세월을 떠돌며 노니는 것은 우주적 넓이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폭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핵심을 추출하여 다시 구체적인 작품으로 구현해야 된다. 각 예술 장르의 물질적 형태로 인한 제약이 드러나는 것은 이 순간이다. **





B. 작(作) _ 짓다

"시 한 편을 탈고 중이다. 오전 내내 고심한 결과, 콤마 하나를 삭제했다. 그런데 오후에 콤마를 다시 원 위치에 삽입했다." - 오스카 와일드

5. 나는 여기 있는데, 너는 거기에 있다. 내가 네가 될 수 있는가. 둘 사이의 간격이 은하수처럼 아득하다. 푸른 강에 돌을 던진다. 징검다리를 놓는다. 아프리카의 대초원을 뒤덮는 검은 누떼처럼 마라 강을 건너야 한다. 거친 급류와 악다구니 악어들이 노리고 있는 죽음의 틈새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 곳에 아련한 네가 있다. 창創과 작作 사이. 머리의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하늘의 영롱한 별 하나를 따오니, 볼품없는 차가운 돌덩이더구나.

6. 작은 원반 위에 올랐다. 몸을 한 바퀴 돌린다. 주변 풍경이 휙 스쳐 지나갔다. 다시 몸을 돌리려는 순간 가을 바람이 내 몸을 밀었다. 나는 다시 한바퀴 핑그르르 돌았다. 다시 바람이 나를 밀어주었다. 또 다시 돌았다. 그렇게 가을 바람과 함께 잠시 노닌다. 쓸쓸한 전나무며, 바람 부는 언덕이며, 평화로운 흑염소 울음소리들이 아련한 풍경으로 나를 감싼다. 2분 동안 일생이 스쳐 지나갔다.

7. 다시 현실의 혼란 속으로 돌아온다.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했는데 텅빈 손,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나. 상처투성이 맨 발로. 자그락. 자그락. 자갈밭을 걷는다. 깨어지고. 부서진다. 그럼에도 걸어야 한다. 그럼에도 써야 한다. 그럼에도 그려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처음부터. 상처 속의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난다.

8. 바위투성이 돌산을 올랐다. 떠밀려 내려오는 바람에 맞서며. 저 멀리 아득한 바다를 본다. 천지를 펼쳤다. 돌돌 말아 가슴 품에 챙긴다. 콧등 시린. 메마른 겨울 사막에서. 다시 봄을 기다린다. 환한 대낮, 깜한 별빛.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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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드리히 니체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p. 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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