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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6일 11시 16분 등록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휴대폰이 주머니를 빠져 나오는 순간 손에서 미끄러지며 허공으로 솟구쳤습니다. 어릴 적 하던 공기놀이마냥 두어 차례 잡힐 듯 말 듯 공중제비를 돌더니 변기 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퐁당'

제가 그렇게 동작이 빠른 줄 평소엔 몰랐습니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변기 속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그리고는 단숨에 핸드폰을 건져 올렸지요. 손을 밀어 넣은 곳이 변기였다는 것은 핸드폰을 건져 올린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다행히 맑은 물이긴 했지만 흠뻑 젖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머리 속이 하얗게 번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얼른 배터리를 핸드폰 본체에서 빼냈습니다. 젖은 채로 핸드폰을 켜면 영영 못쓰게 된다고 하더군요. 화장지와 뜨거운 바람을 동원해서 핸드폰을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빠지자마자 건져낸 덕인지 핸드폰은 제법 멀쩡해 보였습니다. 닦아내고 바람을 쏘이니 깨끗해진 겉모습이 오히려 빠지기 전보다 나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멀쩡한 겉모습에 속아서 욕심을 부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배터리를 연결하고 전원 버튼을 눌렀습니다. 화면에 이상한 모양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핸드폰이 동작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차 싶은 마음에 다시 배터리를 빼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핸드폰 안 쪽에 깊이 스며든 물기가 제대로 마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데, 그 때는 빨리 원래대로 돌리고 싶은 욕심에 그 당연한 일조차 생각을 못했습니다.

자! 이제는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핸드폰을 되살릴 수 없는 상황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벌써 3년이 넘도록 써온 녀석이었고, 요즘엔 번호이동만 하면 최신식의 공짜 핸드폰들이 넘쳐나기에 기계 자체에 대한 미련은 별로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들어있는 전화번호였지요.

한 5년쯤 전에는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저장해둔 전화번호를 몽땅 날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직후에 미국으로 파견근무를 일년 남짓 다녀오는 통에 많은 사람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때 속으로 되새기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말이 있습니다. '어차피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어있다.' 이 말을 다시 불러내서 써먹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근데 그때는 핸드폰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괜찮았는데, 뻔히 손에 핸드폰을 쥐고도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상황이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이놈을 꼬옥 쥐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대화라도 나누듯 그 안에 들어있던 사람들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한동안 찾아 뵙지 못한 부모님 얼굴도 생각나고, 멀리 인도에 가 있는 둘째 동생과 추운 날씨에 군대에서 고생하는 막내의 얼굴도 보고 싶어졌습니다. 아무튼 이들의 전화번호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기도 하거니와 정 안되면 아내의 핸드폰을 뒤적이면 금새 찾을 수 있으니까요.

다음으로는 사부님과 연구원들의 얼굴이 두서없이 몰려들었습니다. 지난 달 수업이 사라진 탓에 조금은 흐릿해진 얼굴들을 모처럼 생생하게 떠올려보았습니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립니다. 이들의 전화번호도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전에 승오가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준 엑셀 파일을 가지고 있으니 언제고 다시 열어보고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또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이번에는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생각났습니다. 얼마 전에 잘 지내냐고 문자 보냈던 홍석이에게 답장을 보내지 못한 것이 그제서야 기억났습니다. 올해 말쯤에 둘째를 갖겠다던 범식이는 또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날 좋은 가을 바람 맞으며 소주 한잔 하자던 성웅이는 살이 좀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핸드폰이 물에 빠진 날이 지난 토요일이었으니 주말 내내 때때로 이렇게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궁금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습니다. 전화번호부에 적어놓은 번호는 제법 많았던 것 같은데, 가까이 지내는 이들을 빼곤 도대체 누가 그 안에 그렇게 가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핸드폰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큰일이 날 것처럼 살았는데, 물론 주말이어서 더 그랬겠지만 막상 고장이 나고 보니 없어도 그냥 살듯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말이 지나고 새 핸드폰을 사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전원 스위치를 꾸욱! 누르니 글쎄 화면이 켜집니다. 그러더니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제대로 돌아갑니다. 숫자판이 조금 뻑뻑해지긴 했지만 전화를 걸고 받고 주소록을 열어서 사람들을 찾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사람들과의 끈이 그렇게 되살아났습니다.

핸드폰의 주소록을 열고 뒤적여보니 참으로 많은 이들이 그 안에서 잊혀진 채 살고 있었습니다. 몇 년째 연락 못한 친구도 있었고, 가물가물 잊혀진 후배도 있었습니다. 그저 스쳐 지나온, 그래서 잊혀져도 될만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 때는 소중했던,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퇴근길에 핸드폰을 뒤적여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해봐야겠습니다. 어제 통화한 듯 반갑게 내 전화를 받아줄 그 녀석의 목소리가 벌써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IP *.223.85.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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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향기
2007.12.06 13:07:05 *.109.104.19
전화번호는 다운 받아 놓으시고, 다시 한번 빠뜨리세요...
과감하게 핸드폰 바꿉시다!
(으...그 동영상 없어졌겠구나 하고 안심했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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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12.10 13:00:27 *.99.242.60
아웃룩과 연동시켜서 사용하시게..
나도 최근에야 아웃룩을 알게 되어서
불안감 없이 연동하여 사용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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