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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8일 07시 12분 등록
저명한 재야 철학자에게 상대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절대주의자가 살아가는 어려움과 그 방법에 대하여 물었던 적이 있다. 그 분의 답변은 나의 질문이 21세기의 시대사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분은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의 구분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이 시대를 지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에 대한 담론을 거부한다. 그들에게는 절대 선이 없다.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게는 그 사람이 상상하는 그것이 곧 실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의 여부는 각 사람의 주관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작용하거나 적용되는 객관적으로 권위 있는 진리를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 진리에 대한 담론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진리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믿었던 시대도 있었다. 장파 선생은 이렇게 당시를 잘 정리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적 세계에는 영원한 진리의 추구를 공통 정신으로 가지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로부터 기독교의 하나님, 헤겔의 절대 이념에 이르는 서구 사상에 그 정신이 담겨 있고, 중국의 경우 유 ․ 불 ․ 도의 도와 진여에도 그 정신이 담겨 있다."
이 시대가 남긴 아름다운 미덕이 많다. 유교의 사상, 기독교의 사상, 불교의 사상 모두 아름다운 가치를 많이 남겼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것은 고작해야 관용이다. 나는 '포스트모던의 관용'이 어떠한 놈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포스트모던과 모던(근대)에 대하여 살짝 정리해 본다.

포스트모던이란 제1차 세계대전 또는 1870년 이후의 세계를 의미한다. 곧 “합리주의가 붕괴되고 무정부주의가 처음 대두되기 시작한 가장 최근의 역사적 시기”를 지시하는 말이다. 대개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는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서구 역사를 크게 암흑기, 중세기, 모던, 포스트모던의 네 시기로 구분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포스트모던은 모던(modern), 즉 근대와 관련된 말이다. 근대란 대략 ‘16세기 이후의 과학 기술과 계몽 사상에 근거한 인본적이고 이성적인 삶의 양식이 지배하는 시대’를 말한다. 근대는 과학과 이성의 시대이다.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과학을 문화의 토대로 삼았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근대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실재로 인정하는 이성과 과학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근대 이전의 세계, 전근대란 신화나 계시에 기초한 신앙을 토대로 이루어진 문화였다. 전근대는 보통 역사에서 말하는 고대와 중세가 포함된다. 전근대는 신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객관적인 진리에 대하여 동의했던 시기였다. 전근대를 살던 사람들이 신에게 진보를 의탁했다면, 근대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도 진보를 이뤄낼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20세기가 다가오면서 근대의 절대 진리였던 인간의 이성을 향한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산업화는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며, 환경오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이성이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전근대의 사람들은 신에게서, 근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에게서 진보와 진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시도 모두 기대를 충족시켜 준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해체된 세계’를 낳았다.

포스트모던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근대의 문제점에 대한 이해없이 포스트모던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은 문제를 모른 채 답만 들여다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의 사상적 기반인 모더니즘의 위기를 이해해야만 포스트모던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래서 근대와 전근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길게 논했다. 다시 포스트모더니즘 얘기로 돌아가자.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리와 도덕의 문제에서 공통적 토대, 그리로 그 토대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부정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이로 인해 야기되는 삶의 토대가 없어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학자는 이 시대를 ‘터가 무너진 시대’라고 불렀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제껏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절대적인 것들이 무너진 시대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동의하여 그에 호소하여 논쟁을 종결할 수 있는 공통적 토대가 사라지고 보편적 세계관이 종말을 고하고 있다. 보편이 해체되고 차이에 대한 존중과 지역적이고 개체적인 것을 축하하는 정서가 강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 온 긍정적인 것들도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기존의 과치관을 과감히 깨뜨리고 새로운 인식의 틀을 마련해 주었다는 데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인 ‘탈중심 사상’과 ‘이분법적 경계 해체’는 현대인의 인식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탈중심 사상은 단 하나의 경직된 절대 진리보다는 유연한 다수의 상대적 진리에, 또 특권적 지배문화보다는 소외되어 온 주변부 문화를 새롭게 조명해 주었다. 그 결과 그 동안 무시되었던 동양이나 유색인이나 소수인종 문화가 새로운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하게 되었다.
‘이분법적 경계 해체’ 또한 우리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편협한 경계선들과 칸막이들을 제거함으로써, 현대인들로 하여금 제3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인식에서는 이제 더 이상 선과 악, 진리와 허위, 미와 추, 현실과 허구 또는 리어리티와 판타지 사이를 확연하게 구분하는 경계가 없어지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찬동하든 반대하든, 그것이 삶의 토대라고 믿어 온 것들에 대한 비판 또는 ‘해체’를 핵심으로 보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근대 문화의 가장 중요한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이성적 통일성의 붕괴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단지 이 토대의 무너짐을 인해 통곡할 것인지 아니면 그를 축하하고 환영해야 할지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통곡한다. 내가 기독교 진리를 믿는 절대주의자여서가 아니다. 포스트모던의 절대 가치인 ‘관용’이 굉장히 나약한 미덕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중심 사상과 이분법적인 경계를 해체하여 준 것이 그간의 억압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에 대한 객관적 탐구는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만들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핵심 가치는 ‘관용’이다. 관용에 대한 숭배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앨빈 토플러는 21세기를 여행하려는 사람들의 필수품으로 ‘관용’을 들었는데, 적확한 지적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에서 관용의 개념은 기독교가 원수들에게까지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는 사랑에 비하면 너무 유약한 개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관용의 개념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절대로 틀렸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내하고 배려하고 용서하는 관용이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용은 사상을 위한 것이다.

존 맥아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용 지상주의가 우리 사회 안에서 진짜 미덕에 지대한 해악을 끼쳤다고 지적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인 지금은 한때는 금기시되었던 것들이 도리어 장려되고 있다. 생각의 차이를 존중하고 인정하다 보니 도덕의 개념이 무너졌다. 역사적으로 상대주의가 만연한 시대에는 늘 도덕의 붕괴가 뒤따랐다. 누구에게나 부도덕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이제는 도리어 즐기는 것이 되고 있다. 결혼 생활의 부정이나 이혼이 도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음행이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용 개념은 진짜 미덕의 방향을 조직적으로 돌려놓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어떤 A라는 의견이 다른 B라는 의견보다 더 낫다, 라는 논쟁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진리를 바라보는 어떤 사람의 관점은 다른 사람의 관점만큼이나 선하다는 것이다. 예전에 이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묻고 대답하는 지식 커뮤니티로서, 지금의 네이버가 생기기 전에 많은 인기를 끌었던 사이트였다. 여기에 어느 중3 남학생이 이런 고민을 올렸다. 자기 여자 친구와 만남 100일을 기념하여 놀다가 그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얘기다. 여자 친구는 임신을 하게 됐고,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서 고민하다 못해 그 사이트에 올렸던 것이다. 댓글이 많이 달렸다.

장난으로 달려진 답변 속에서 몇 개의 진지한 답변이 있었다. 이 중의 하나는 이런 조언을 했다.
“딱하게 됐지만, 결국 잘 생각해서 님이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세요.”
포스트모더니즘에 걸맞는 답변이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존중하는 듯하나, 이는 그 사람이 제대로 된 식견과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고 있을 때에나 유익한 조언이 될 수 있다. 지금 중3 남학생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고 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지금의 이 학생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관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조언이 필요하다.

나는 객관적 진리에 대한 탐구를 포기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리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모두가 각자 나름의 생각대로 진리를 정의한다. 그 진리는 결국 인류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 같지만, 오히려 불행과 타락을 안겨다 주었다. 하나의 예가 ‘간음’에 대한 정의다.

얼마 전, 회사 동료와 혼전 순결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순결한 여인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를 했다. 정말 사랑하면 혼전이라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의 대중문화는 사랑의 ‘진정성’만 있으면 누구와도 성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풍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달라스 윌라드는 현대 윤리학 분야의 저자 중 간음을 전적으로 나쁘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니다.

고전 도덕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간음을 전적으로 나쁜 일로 보았다. “간음이란 전적으로 잘못된 일이기에 정당한 여자와 정당한 시간에 정당한 방법으로 간음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나는 이것이 진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용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관용이 아니다. 사람들을 위한 관용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상의 존재를 위한 관용이다. 얼핏 보면, 아주 신사다운 것 같지만, 그 신사다움 속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사상, 미덕으로 여기기에는 한없이 나약한 사상이 숨어 있다.

포스트모던이 가진 탈중심사상과 이분법적인 경계 해체는 분명 인류에게 보다 아름다운 눈을 안겨다 주었다. 우리는 나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비로소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고, 타자와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의 유익은 여기까지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넌 나그네가 배가 고맙다고 하여 배를 짊어지고 여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포스트모던은 사상의 다양화와 상호 존중, 그리고 주변부를 이해하는 길로 가데에는 성공했지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21세기 여행에 관용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던의 관용이 사상만을 위한 관용임을 이해해야 한다. 앨빈 토플러가 말한 관용이 어떤 개념인지 모르겠지만, 포스트모던의 그것이라면 거부해야 한다. 포스트모던의 관용은 미덕이 아니다. 이 가짜 관용은 다른 미덕들(절제, 사랑 등)을 모두 해치고 있다.

탈중심사상을 통하여 넓어진 시각과 타자를 이해하는 정신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포스트모던이 거부하는)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나는 이 길이 21세기 인류에게 행복을 안겨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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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촌
2007.12.09 15:02:24 *.123.173.16
저 역시 자기 정체성의 확립 없는 관용은 원칙없는 양보요, 명분없는 타협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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