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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0일 05시 06분 등록
휴식의 공간에서

“일찍 일어났구랴.”
마당 한 쪽에 있는 바깥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시던 민박집 아주머니가 돌아보시며 말을 건네신다.
“어제 아침에도 일어나 손빨래를 하시더니..... 세탁기 두고 왜 직접 빠세요?”
“나는 이게 좋아요. 시원하고.”
“벌써 몇몇이 산책한다고 마을 당산나무 있는 쪽으로 간다는 데 나가 보실라우. 아마도 일찍 일어난 사람은 거기 다 갔을 거예요. 밭에서 상추랑 배추도 가져온다고 했으니.....”
“예. 저도 거기 가봐야겠네요.”
집을 나서니 빨래 소리는 작아지고 어느덧 조그맣게 들리던 지저귀는 새소리가 크게 들린다. 나는 당산 쪽으로 향한다. 일찍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벌써 새,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분주하다. 당산까지 가는 길목에서 벌써 여럿을 만난다. 집 앞을 쓸고 있는 분, 이른 아침에 벌써 밭에가서 뭔가를 한짐 해가지고 돌아오시는 분, 오토바이에 뭔가를 싣고 밭에 나가시는 분. 그리고 나처럼 이곳에 농촌체험을 온 사람들이다.

당산의 넓은 공터. 소리가 요란하다. 한때의 사람들이 축구공을 두고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우리 아이 닮은 아이도 끼어 있다. 아니 우리 아이다. 뒤통수의 머리가 꼿꼿이 선걸 보니 분명 우리 아이다. 벌써 일어났단 말인가.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믿기지 않는다. 늘상 깨워야 일어나던 아이인데.
“엄마~”
멀리서 공차다 말고 아이가 부른다. 헐레벌떡 뛰어온다.
“엄마 내가 한꼴 넜어.”
아. 우리아이가 내게 달려와 먼저 말을 걸다니. 눈물이 날 것 같다. 선배 말을 따라서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활기차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는 행복. 아이 학교 보내야 한다고 아침마다 깨우고 밥을 먹이는 전쟁은 이곳에서는 없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직장에 서둘러 출근하는 매일의 아침은 전쟁이었다. 이곳에서의 며칠은 편안한 휴식이다. 아이에게도 그런가 보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는 것. 그리고 아이가 내게도 말을 건다는 것.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한달 전 직장 선배와 얘기하는 도중에 이곳을 소개 받았다. 아이가 심하게 학교에서 싸우고 매번 말썽을 부려서 한달 전부터 나는 학교에 자주 가야 했다. 물론 직장에는 조퇴횟수가 많아졌다. 그때마다 내 일을 나누어서 해주던 선배가 있다. 이곳에 오자고 아이랑 같이 여행하는 기분으로 와서 며칠 쉬는 것이 어떠냐고 나를 꼬여낸 선배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의 입장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를 잘 이해해 주고 있는 선배이다. 나는 그 선배의 소개로 지금 이곳에 아이와 함께 와 있는 것이다. 선배는 아이와 몇 번을 이곳에 찾았단다. 그리고, 그 경험을 내게 얘기했다. 이번에는 같이 온 것이다.

“우리는 아침먹고 좀 있다가 담배 심으러 갈꺼다. 아침 제대로 안 먹은 놈은 안데려간다.”
이곳에 아이들을 인솔하는 체험학습을 담당하는 선생님이다. 까무잡잡하고 훨칠한 키. 선한 얼굴이 아이같다. 키만 아니라면 아이들과 똑같아 보인다. 선생님 말씀과는 달리 아침 먹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아침 한때 뛰었던 것 때문인지 아이들은 각기 제 밥그릇과 국그릇 챙기기에 바쁘다.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먹었다. 민박집 우제 선생님과 설거지를 마치고 나와보니 아이들은 남자 선생님을 도와 밭에 갈 준비물을 챙기고 있다. 준비물은 별거 없다. 물통, 모자와 장갑정도다. 담배를 심는다고 하더니 담배는 보이지 않는다. 담배와 그밖에 필요한 것들은 오늘 담배를 심는 집에서 챙겨올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왁자지껄 대문을 나선다.

아이들이랑 같이 노래 몇 곡을 부르니 어느새 소나무 숲이었다. 그리곤 그 숲을 지나니 이랑이 곱게 물결을 치고 있는 언덕배기 밭에 도착했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1톤 트럭 한대가 밭 한쪽에 세워져 있고, 아저씨 한분과 아주머니 한분이 뭔가를 내리고 있다. 오늘 심기로 한 담배 모종인가 보다.
“어서와라. 니들이 오늘 일할 일꾼들이냐?”
“안녕하세요?”
“이게 담배예요? 담배는 편의점에서 나는 건데.”
“너 바보냐? 공장에서 만든 거 갔다가 파는 거야.”
“지만이 바보. 수진이도 바보.”
우리 아이 편의점에서 담배난다고 한다. 아이쿠.지만이 바보. 아니다, 엄마인 내가 바보다. 언제 이런 걸 보기나 했겠는가.
“요즘 얘들은 쌀나무에서 쌀나냐고 묻는다더니 니들이 그렇구나. 요놈들아, 담배는 담배나무에 달린 거 따서 수퍼에서 판다.”
“에이 거짓말. 그림 우리가 오늘 심는 거는 뭔데요?”
“요게 커서 여름이면 여기 있는 선생님 키보다 훨씬 커진단다. 잎사귀 하나가 아저씨 팔뚝만큼 아주 커지지. 그 잎사귀 따다가 말려서 썰어서 공장에서 담배라는 걸 만들어.”
“거봐. 공장에서 만드는 거 맞잖아?”
“허허허. 그래 네 말이 맞다.”
“아저씨 이제 담배 심어요.”
“그래 그러자. 우선 이거 들고 저리로 가자.”
담배 모 한판을 들고 밭고랑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하나를 직접 심으면서 설명하신다.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모두 진지하다.
“구멍 하나를 손으로 조그맣게 파는거야. 그리고는 이렇게 담배를 하나 꺼내서 흙이 붙은 채로 구멍에 넣지. 너무 깊숙이는 말고 흙이 붙은 데까지 살짝만 덮는거야. 그리고 옆에 파낸 흙을 주위에 넣어서 다독여줘야지.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물을 조금 주는거야. 오늘 저녁에 비가 오면 물을 안줘도 되는데, 날씨가 너무 좋구나."
아저씨의 설명은 계속이어진다.
"흙으로 덮을 때랑 물 줄때, 담배에는 되도록 안묻게 하는 게 좋아. 혹시나 해서 흙이랑 물이 뭉쳐져서 담배에 묻어 있으면 거기가 썩거나, 벌레가 살면서 다 잎사귀를 다 먹어버리기도 하니까.”
“그러면 다 심은 건가요?”
“음 그렇지. 다음 거 심으면 되겠네.”
“다음 거는 어디에 심어요?”
“이렇게 한발 정도 떨어져서 또 하나를 심지. 구멍하나에는 하나씩 심는거다.”
"인제 우리 해도 돼요?"
아이들은 둘 셋씩 뭉쳐서 담배를 심기 시작한다. 잠시 후 보니 구멍을 파는 놈, 주전자로 물을 주는 놈. 제법 진지하다.

담배를 거의 다 심었을 무렵 해가 머리 꼭대기를 비추고 허기가 진다. 밭 주인 아주머니와 선생님은 소나무 숲에서 밥 먹으라고 우리를 부른다. 한쪽에 솥을 걸고 국을 데우고 있다. 아저씨는 어디선가 보리 한단을 베어서 나타나셨다. 아직 파랗다. 이렇게 파란 보리를 왜 베어왔을까. 아저씨는 솔잎을 긁어 모으고는 거기에 나무를 몇 개 언더니 이내 불을 붙이셨다. 그리고는 파란 보리 단을 한 웅쿰 쥐고서는 불에 굽기 시작하셨다.
“뭐예요?”
“보리다. 너희들 이거 먹어봤니?”
“보리요? 보리밥?”
구운 보리는 옆으로 두시고 또 한 웅쿰 쥐고서는 굽는다. 우제 선생님도 옆에 앉으셨다.
“이리들 와서 구운 보리 먹어봐라.”
“이거 어떻게 먹어요?”
“요렇게 먹지. 이렇게 구워진 보리를 손에 받고서 싹싹 빌어요. 어구 뜨거. 호호.”
빙 둘러서 아이들이 장벽을 친 곳에 끼어들어 나도 지만이 곁에가 앉았다. 선생님은 연신 손을 비비시며 말씀하신다.
“니들 보리 먹을 때는 이렇게 싹싹 빌어야 혀. 그동안 잘못한 거 있으면 이참에 싹싹 빌면서 말해봐라. 엄마가 용서해 주실 거다.”
설명을 하시다 말고 선생님은 엄마들을 쳐다보며 눈을 찡긋 하신다. 그리고는 검은 손 위에 올려진 보리 거플을 후후 부시고는 입안에 톡 털어 넣으신다. 다시 한줌을 쥐시고는 비신다.
“나도 잘못한 게 많지. 나는 말야. 아주 개구져서 지만이 엄마 얼굴에 검댕을 잔뜩 묻혔어.”
“어, 하나도 안 묻었는데.”
“어, 그렇구나. 내가 거짓말을 했구나. 하하하. 요렇게.”
선생님은 손에 있던 보리를 입에 털어 넣으신 후에 검댕 묻은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셨다.
“하하하. 선생님.”
“헤헤헤.”
“학교에서 얘들하고 자꾸 싸워서 미안, 엄마”
"아들, 엄마도 미안"
나도 검댕 묻은 손으로 아이 볼을 꼬집는다. 고양이로 변신 중인 아들 녀석이 씩 웃는다. 그러고는 손으로 내 볼을 감싼다. 검댕묻은 입, 검댕묻은 볼, 검댕 묻은 이마 그 속에 웃음이 있다.

아이들은 마당 한쪽에 걸어둔 솥에다가 실컷 불 때며 불놀이가 한참이다. 감자를 굽는다, 고구마를 굽는다 부산을 떤다. 실제로 구워내는 것보다는 불 때는 것 자체에 더 흥미가 있나보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말리거나 나무라지 않으신다. 아이들 원하는 대로 즐겁게 놀도록 두신다. 밤은 깊어가는 데 아이들은 집안에 들어올 생각이 없나보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마지막 밤이라는 것은 아이들만 아쉬운 게 아니라 엄마들도 그렇다. 체험학습 인솔 선생님과 민박집 우제 선생님, 내 직장 동료이자 선배인 수진이 엄마, 민호 엄마, 그리고 나는 거실에 둘러 앉았다. 선생님이 손수 담근 탁주가 몇 순배 돌고 있다. 안주는 아이들이 구운 설익거나 탄 감자, 고구마다.
“선생님, 저 내일 이 탁주 한 병 싸주세요.”
“그러시우. 맞 좋죠?”
“예 전도사님.”
“내게 전도사라니 하하하........ 수진엄마도 또 많이 전도해 주시구랴.”
선생님은 몇몇 뜻이 맞는 분들과 함께 이곳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셨다 한다. 나를 이곳에 소개해 준 선배는 선생님이 만든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분을 알게 되었단다. 선배 말에 의하면 선배처럼 인터넷으로 농촌체험학습을 찾아서 알게된 사람들, 탁주제조로 알게 된 사람. 그리고, 선생님의 몇몇 제자들. 모두 선생님을 통해서 알음알음 모여든 사람들이다. 선배 말대로라면 우리는 우제님에게 전도된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선배가 붙여준 별명이 전도사이다. 우제 선생님은 참 별명이 많으시다.

밤이 깊어간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가물가물하다. 몇 잔 마신 막걸리의 취기가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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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님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들리고 싶었고,
그리고, 우제님이 만들고자 하는 공동체를 시골에 하나 만들었고,
그 속에서 다른 사람이 휴식과 치유를 얻는 것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IP *.72.153.12

프로필 이미지
우제
2007.12.11 14:29:36 *.114.56.245
덕분에 편안한 휴식의 의미를 되뇌이게 되었습니다. 휴식은 새로운 창조의 시간에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어서 고마워요. 아울러
작은 그림교실 기대해 봅니다. 벌써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해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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