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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0일 15시 40분 등록
벌써 3시간째 계속되는 통증에 몸과 마음이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조금씩 주기가 빨라지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동안 무수히 연습했던 무통호흡과 요가는 효과가 있기는 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폭풍처럼 쏟아지는 통증 속에 그나마도 없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잠시 찾아온 평화가 조금이라도 더 계속되어주길 바라는 마음만이 간절하다.

처음에 인도에서 아이를 낳겠다는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꺼냈던 순간이 떠올랐다. 가족들은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인 분위기였다. 엄마의 눈에 물빛이 비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거짓말처럼 눈물이 흘러 내렸다. 엄마의 반응은 이미 흘러나온 말을 도로 주워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처로웠다. 그러나 엄마는 그렇게 울면서도 안 된다고, 가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지만 덕분에 이 곳으로 올 수 있었다.

처음 아쉬람 센터에서 아이를 낳겠다는 생각을 전했을 때에는 이곳 사람들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시설 좋고 깨끗한 병원 대신 이곳을 선택한 나의 결정을 센터의 사람들은 금새 이해해주었다. 이곳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공간인지, 그리고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 모두들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진통이 시작됐다. 몸에 대해서라면 제법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나이지만 이건 경우가 조금 달랐다. 저 깊은 어딘가에서 시작된 통증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가늠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온 몸과 마음을 휘감아버렸다. 그냥 통증이 몸을 훑고 지나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면 될 것도 같은데 그게 마음 같지 않았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픈가 싶더니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러다가 다시 몸이 돌처럼 굳는가 싶더니 한 순간 고통이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 딱 그만큼 마음이 돌아왔다. 오른손으로 더듬더듬 만져보니 온 얼굴이며, 가슴이며, 온 몸이 땀으로 가득했다. 몸의 반대편을 더듬어 볼 요량으로 왼손에 힘을 주자 그제서야 그 손을 꼬옥 붙들고 있는 그 사람의 존재가 살아났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금새 눈물을 떨구기라도 할 듯한 얼굴로 작게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은 처음 만났던 그 날의 기억을 되살려내게 했다.

작년에 첫 책을 세상에 내놓고 처음으로 가졌던 출판기념세미나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혹시라도 자리가 텅 비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했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작은 강당에 마련된 공간은 어느새 소복소복 사람들로 들어차 있었다. 이런저런 걱정과 설렘으로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채로 강단에 올라선 나는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긴장한 채 바짝 굳어있던 내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첫 책은 여자를 그 대상으로 삼은 터라 자리를 메운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자들이었다. 그런 자리의 한 구석에 멀뚱한 남자가 나만큼이나 긴장된 모습으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눈에 뜨인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엔 잔뜩 얼어 있었던 나는 강의가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웃었고, 또 울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간간히 그의 시선을 느꼈다.

강의가 끝나고 마련된 자리의 앞으로 내 첫 책을 들고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은 꽤나 감동적이었다. 한 명씩 이름을 묻고 책 속에 짧은 글과 함께 사인을 하는 동안 나는 내 책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은 어느새 그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더 크게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책은 사람과 더불어 커가는 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와는 눈웃음을 나누고, 또 다른 이와는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첫 강연의 마지막 순서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책에 서명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틀림없이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약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책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몇 마디의 말이 오고 갔을 터인데 나는 이 부분을 잘 기억할 수가 없다. 그나마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가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기보다는 깊이 용서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에 대해서만큼은 반대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부분이다. 나는 그런 그가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진통과 진통의 사이에서 반쯤은 잠들고 반쯤은 깨어있는 채로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시 파도가 밀려들었다. 그때 나르바다 마이(Narbada Mai) 여신의 것과도 같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소라야, 기억해봐. 네 몸은 벌써 아이 낳는 방법을 알고 있단다. 모르는 것을 새롭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지만, 잠시 숨겨진 것을 다시 찾아서 끄집어내는 거야. 네 유전자에 새겨진 너의 꿈처럼 말이야. 아무렇게나 힘을 주면 아이도 너도 다칠 수 있단다. 순간과 리듬 그리고 여백을 떠올려봐. 그리고 자연스럽게 거기에 몸을 실으렴. 자! 지금이야."

직감적으로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반신을 가득 차지하고 있던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몸 밖으로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생전 경험해본 적 없는 엄청난 통증이 죽음처럼 달려들었다. 이러다가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피어날 즈음 이미 바닥난 줄 알았던 힘이 솟아났다. 딱! 숨이 넘어갈 듯한 그 순간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머리다! 머리카락이 보인다."

순간 안도의 마음이 공포의 사이를 비집고 고개를 들었다. 아직 끝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두려움은 희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다시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순간 울컥!하는 느낌과 함께 묵직한 무언가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반쯤 나가있던 정신이 한꺼번에 되돌아왔다. 조금은 낯설지만 상쾌하고 시원한 기분이 온 몸을 휘돌았다.

자기의 오른손으로 내 왼손을 쥐고 있던 그가 손을 바꿔 쥐는가 싶더니, 손을 꼭 잡은 채로 탯줄을 잘랐다. 탯줄에서는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을 텐데도, 나와 아이를 둘로 가르는 가위의 금속성은 마치 살을 베는 것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 틈에서 아이는 울지 않았다. 평화롭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태어난 아이는 낯선 바깥 나들이에도 울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하얀 배냇저고리에 쌓인 여자 아이를 내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는 고요한데, 그는 울고 있었다. 미처 아이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흐릿해진 눈을 통해 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작은 소라가 거기에 있었다. 깊은 눈매와 오뚝한 콧대가 마친 그려 넣은 듯이 예쁜 내 딸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이제 예전의 소라가 아니다. 나는 이제 엄마다. 작은 소라의 엄마 큰 소라다.

IP *.223.85.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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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2.11 17:35:45 *.72.153.12
아이도 낳고, 책도 낳고, 많이 낳고, 그리고 또 낳고....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 히히히.
소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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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007.12.12 11:19:01 *.231.50.64
그러게, 내 인생에 아기가 있을까... 늘 물음표였는데..
종윤오빠덕에 생명에 대한 설레임아닌 설레임을 가져보게 되었어..
누군가가 나의 생각의 한계를 넘어선 꿈을 그려주는건 정말 뜻밖의 선물인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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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12.13 22:58:16 *.120.66.234
생각의 한계를 넘어선 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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