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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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 이야기입니다.
지난 편지에서 ‘생각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나’에 대해 썼습니다. 이어서 쓰겠습니다.
작년 추석 귀성길, 차 안에서 두 딸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당시 큰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작은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작은아이가 말했습니다.
“언니가 불쌍해.”
이유를 묻자, 할아버지할머니들로부터 잔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랍니다. 처음엔 언니를 생각하는 작은아이 마음이 느껴져서 흐뭇했습니다. 하지만 곧 큰아이 걱정이 됐습니다.
큰아이는 종가의 가장 첫손주로 할아버지할머니들의 관심의 대상입니다. 아이들 입장에서 시아버지인 첫째 할아버지부터 다섯째 할아버지까지 총 다섯 분의 할아버지가 계시고, 시어머니인 첫째 할머니부터 다섯째 할머니까지 총 다섯 분의 할머니가 계십니다. 명절이나 제사로 시댁 어른들이 한 자리에 모일 때면, 화제의 중심에는 ‘장손녀’인 큰아이가 있었습니다. 타인의 관심과 인정에 민감해지는 사춘기를 맞이한 큰아이가 과연 괜찮을지 저도 내심 걱정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휴!”
큰아이의 한숨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유를 묻자, 할아버지할머니들의 잔소리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평생을 종손으로 살아온 남편에게 당신은 어땠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난 가출했어!”
고교시절 가출 경험이 있는 남편은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습니다. 남편이 가출하자 놀란 어른들은 기대와 간섭, 잔소리를 어느 정도 거둬들이셨다고 했습니다.
“그럼, 나도 가출해야 하는 거야?”
큰아이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른이라면, 아이가 가출할 지경에 이르기 전에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큰아이가 부담을 덜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남편과 저는 큰아이에게 언제 가장 힘든지 물었습니다. 큰아이는 몇 가지를 털어놨습니다. “네가 고추 하나만 달고 나왔어도… 쯧쯧” 등 자신이 여성임을 부정하는 말을 들을 때와 “장손녀는 늘 웃는 표정이어야 돼. 헤프지 않게. 품위 있게 입 꼬리만 살짝!” 등 장손녀라는 가면을 덮어씌우려는 말을 들을 때를 꼽았습니다.
종가인 시댁에서 ‘장손녀’의 존재는 ‘종손’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종손’은 가부장제의 대를 잇기에 존재자체로 ‘권력’이 되지만, ‘장손녀’는 종손이지만 여성이라서 안타까운 존재이며, 종손이 태어나기 전까지 성차별적 시선을 감내하며 종손으로서의 의무를 짊어져야하는 존재입니다.
사춘기, 자아정체성을 확립할 중요한 시기를 맞은 큰아이는 매우 혼란스럽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서 남성성을 발견할 때면 굉장히 반가워하시면서 동시에 안타까워하시는 할아버지들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들이 강요하는 괴이한 ‘장손녀’의 이미지(이를테면, 남성의 자리를 넘보지 않되 위엄 있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에 자신이 왜 부합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윗세대의 남아선호사상과 남존여비 인습이 종손부인 저에게는 ‘아들 출산’ 강요로, 저를 넘어 우리 아이들에게는 ‘정체성 혼란’으로 위임되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동안 종가의 어른들을 위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며 종손과 종손부로서 좋은 아들 좋은 며느리 역할에 노력했다면, 이제는 우리 아이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엄마아빠가 먼저 나서서 가부장 문화가 후대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 여덟 번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
격주 월요일에 발송하는 마음을 나누는 편지 '가족처방전'은 필자와 독자가 함께 쓰는 편지입니다. 가족 관계가 맘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계시다면 메일로 사연을 보내주세요. 마음을 다해 고민하고 작성한 가족처방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김정은(toniek@naver.com)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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