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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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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0일 18시 13분 등록


2027년 12월 3일, 오전 9시 30분. 문이 열린다.
눈이 맑은 한 청년이 파란색의 수술 가운을 입고 분만실 앞을 나온다. 그의 눈이 흥건히 젖어있다. 손에는 작고 작은 생명 하나를 안은 채.
“아버지..”

울먹이는 아들 원영이를 살포시 안으며 등을 두드린다. ‘이제 네가 아빠구나. 이제 네가 세상을 물려받을 차례구나.’ 그의 가슴에서 처음 보는 세상을 향해 비죽이 머리를 내민 핏덩이, 그리고 까맣고 검은 눈동자. 그래 나는 이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품에 안겨 있던 이 청년의 31년전 눈이 그랬다. 검은색을 몇 번이고 덧칠한 듯 새카맣게 빛나는 두 눈. 그 눈을 통해 가슴으로 전해지는 느낌.. 아이는 눈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빠, 좋은 아빠가 되어줄꺼죠?
우리를 위해 헌신해주고, 사랑해주고, 본보기가 되어 줄꺼죠?”

그 행복한 책임감, 그 때부터 내 인생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힘들거나 주저할 때면 그 까만 눈동자가 가슴속에서 말을 걸어주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훨훨 날고 싶었다.

공무원으로서의 생활은 활동적인 나에게 좁은 무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마흔 여덟이 되던 해에 나는 서기관의 직급을 마지막으로 퇴직을 했다. 퇴임식날 나를 따르던 후배들과 동료들이 조촐한 기념식을 마련해주었다. 그 동안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놓은 동영상과 사진을 보여주는 바람에 커다란 덩치에 엉엉 소리내어 울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민망하다.)

틈틈히 썼던 몇 권의 동북아 조세 관련 책들이 팔려나가면서 강의와 인세 수입으로 먹고 살 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직장을 떠났다. 심지굳게 성실히 하루를 쪼개어 준비한 덕택이었다. 국제 통상 전문가가 되기 위해 먼저 멀티-링귀얼(Multi-Lingual)이 되는 것이 우선이었다. 틈틈히 학원을 다니는 것에 덧붙여 영어는 막내 윤이에게, 일본어는 은남누나의, 중국어는 민선이의 도움을 받았다. 책을 쓰는 것은 구본형 선생님과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었고, 강의하는 것은 옹박과 희석이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3기연구원만큼 내 인생의 큰 재산도 없다.

긴장감과 여유가 공존하는 현장에서 국제통상전문가로서 세계를 누비는 것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내 적성에 잘 맞았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통해 배우는 나였고, 계획이 서면 바로 움직이는 실행가였던 나에게 국제적 무대와 박진감 넘치는 비즈니스 환경은 완벽한 무대였다. 게다가 경제권역이 늘어나고, 국가간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해외로 진출하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도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나는 주로 정보가 부족한 중소기업들을 위해 일했다. 그들은 인력과 자원 운용에 한계가 있었고, 그렇기에 나의 작은 지식과 경험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즐겼다.

북경과 도쿄에 내 사무실을 열면서 나의 해외활동은 본격화되었다. 우리는 나라마다 잘 훈련된 조세 컨설턴트들을 배치해야 했다. 신규직원이 처음 오면 나는 첫 1년을 버티는지를 두고 보았다. 그리고 첫 1년간은 50권의 책을 읽고, 50개의 생각을 정리한 컬럼을 써 내는 시험을 거쳐야 했다. 통과한 직원들은 각 나라의 조세관련 규정에 대해 속속들히 알게 되었고, 깔끔한 일처리와 상황에 맞는 조세 컨설던트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그렇게 일년중 3분의 1은 해외에서 보냈다. 50대가 되면서 3분의 1은 서울의 집에서,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적벽강 근처의 조그마한 별장에서 지냈다. 40대 후반에 이르러 돈이 좀 모이자 나는 금산 적벽강 근처에 괜찮은 한옥집을 한켠 마련했다. 담벼락을 낮게 치고, 세밀하게 조각된 해학적인 석상 몇 개를 들여놓았다. 뒷뜰로 나가면 스무평 남짓한 조그마한 소전 농장을 마련하여 해마다 농사를 지었다.

나는 밭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 그것도 맨발로 흙을 밟는감촉이 좋다. 발가락 사이로 삐집어 올라오는 촉촉한 느낌과 땅을 뒤집으면서 맡는 흙내음, 일하면서 흘리는 부드러운 땀방울도 좋다. 일이 대충 끝이나면 꿀맛같은 밥과 막걸리 한잔 마시고 옆에 풀섭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그렇게 한국적인 것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나는 우리의 문화적 DNA에 대해 책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을 많이 깨우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인’으로서의 최영훈이 되는데 한 몫을 했다. 나의 책은 가장 한국적이었지만, 세계의 다른 사람들도 그 차별적 범용성을 좋아했다.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문화적 무의식의 차이를 잘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동시에 사람으로서 가지는 보편적 공통성을 잊지 않았다. 가끔 컨설팅을 하러 해외에 주재해 있는 우리 기업을 방문할 때면 나는 한복을 즐겨 입었고, 이것이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나는 조세 컨설턴트로서, 전문가로서, 작가로서, 강연자로서, 문화계승자로서, 그리고 세계인 속 한국인으로서 괜찮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모든 성취들 보다도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있다.

집안 사정으로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했던 나는 20대를 비관적으로 보냈다. 졸업을 하고,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을 하는 동안 나는 여러 차례의 한숨과, 수많은 외로움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세상이 참 밝게 빛난다는 느낌을 받은 날이 바로 오늘, 12월 3일이었다. 우리들의 결혼식은 황홀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렇게 가족이 탄생했다. 가족은 늘 나에게 책임감과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늘 혼자였던 나에게 아내는 마음의 평화를, 육신의 안식을 주는 어머니 같은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수현이와 원영이와 함께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늘 재미와 생동감을 주었다.

원영이는 몽골여행 이후로 호기심이 부쩍 늘었다. 몽골의 먼 지평선이 소년의 통찰을 넓혀주었던지, 이제 아들은 작가이자 여행가로서 세계를 아내와 함께 돌아다니고 있다. 눈이 맑고 투명하여 좋은 장면들을 가려 뽑고, 맛깔난 글로 풀어내는 것을 아주 잘한다. 수현이는 어렸을 적에는 말수가 적었는데 크면서 대단히 외향적인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녀는 경영컨설턴트로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작았던 두 아이는 모두 힘껏 배워서 세상에서 빛나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

내 나이 오십줄이 넘어가기까지 나는 누구보다 가족에 대한 무한한 헌신과 본보기를 훌륭히 보여주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들의 작고 까만 눈에서 나오는 믿음을 져버리지 않은 것,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나는 곡식을 키우는 농부의 마음을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나의 헌신은 까만 눈동자를 만들었고, 그 맑은 눈이 또 다른 눈동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내가 살았던 이유이다. 그것이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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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12.17 01:36:03 *.118.101.155
너무 멋지게 그려 줘서 고맙다.
내 열심히 노력해서 꼭 이루도록 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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