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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1일 19시 52분 등록


“안녕하세요. 3기 연구원 이희석입니다. 8기 연구원이 되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기 오는 버스 안에서 들었는데 이번 8기는 과거 어느 기수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하셨다고 하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가 3기 연구원인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앞으로 연구원 생활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점은 모두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만큼 다른 어떤 일보다 이 연구원 생활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 계영배[戒盈杯]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늘 곁에 두고 보면서 스스로의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사용했던 의기라고 합니다. 술잔의 이름은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이며, 잔의 70% 이상 술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리도록 만들어졌는데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참 모순이죠. 사람은 넘치기를 원하는데 성인들은 지나침을 경계하라고 하니 말입니다. 현실에서 만나는 수많은 모순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나가느냐가 여러분의 꿈을 이루는데 중요할 것입니다.”

벌써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시작된 모양이다. 서둘러 온다가 왔는데 고속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일정보다 1시간정도 늦어버렸다. 조용히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안녕하세요. 창용 형님.” 승오가 내 옆으로 오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아니 승오가 아니라 이제는 박 실장이라고 해야 한다. 그는 최근에 리더십 관련 회사에 기획실장으로 스카우트되었다. 젊은 나이지만 그의 기획능력을 인정받아 회사를 옮기게 된 것이다.

“어, 승오구나. 반갑다. 그동안 잘 지냈어?” 자그마한 소리로 대답했다.
“오랜만이에요. 언제 한국에 들어오셨어요?” 승오가 물었다.
“한 달 정도 되었나.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서 조금은 힘드네. 근데, 사업은 잘 되어가니?”

“예, 책을 쓰고 난 이후로 더 많은 강연 요청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도와주셔서 잘 되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그래, 잘 되었네. 근데 희석이가 연구원 생활을 일순위로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희석이가 사부님께 야단맞던 일이 생각나는군. 세월 참 빠르다. 벌써 5년이 흘렀네.”

“그러게 말입니다. 희석이는 확실히 글보다는 강연을 해야만 하는 체질인 모양입니다. 희석이는 글보다 말에 감성이 더 많이 묻어나잖아요. 참, 희석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형님 대단하십니다. 족집게 도사로 나서도 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의아한 듯 물었다.
“기억 안 나세요. 형님이 5년 전에 희석이를 위해 쓰신 미래 소설을 말입니다. 저도 몰랐다가 희석이가 이야기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 얘기를 듣고 전율을 느꼈어요.”

“글쎄. 쓴 것 같기는 한데 그 내용은 잘 떠오를지 않네. 그런데 그게 왜?”
“그 소설 내용대로 실제로 희석이가 되었잖아요.”

그 말을 들었지만 내가 쓴 소설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몹시 궁금했다. 미국으로 연구년을 보내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차적응이 안되기도 하였지만 3기 연구원들을 만난 지도 1년이 훨씬 넘은 것 같다.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또는 인터넷으로 가끔 소식을 접하기는 하였지만 자세한 내용은 잘 몰랐다.

“기억이 잘 안 나시는 모양이네요.” 승오가 재차 물었다.
“그래.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질 않는데. 무슨 일들이 있었는데.”

“먼저, 희석이 첫 번째로 쓴 책 기억나세요?”
“그래. 그것은 기억이 나지. 제목은 모르겠지만 ‘시간관리’에 대한 내용일걸.”
“맞아요. ‘시간의 힘’이었어요. 그 책이 대박나면서 다니던 회사에서 독립했잖아요. 회사이름이 아마 엔씨월드였을 거예요. 처음에는 1인기업으로 출발했다가 워낙 호응이 좋아서 여기저기 강연다니느라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서 직원 몇 명을 더 채용해서 같이 꾸려 나갔죠.”

“맞아. 그랬지. 그래서 그해 연말에는 3기 연구원들을 회사에 초대해서 파티도 하고 와인도 마셨잖아.”

“그리고 노래방 기기도 빌려서 노래자랑도 했잖아요. 거기서 누가 일등 했는지 기억나세요?”

“누구지? 의외의 인물이 일등을 했었는데. 혹시 사부님 아니야.”
“맞아요. 그 때 모두가 그 기기가 이상하다며 얼마나 즐거워했는데요.”

이런 대화가 오가던 중, 희석이의 인사가 끝났다. 두리번거리던 희석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면서 내게로 다가온다. 3기 연구원 인사가 모두 끝나고 4기 연구원 인사가 시작되었다.

“창용이형,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내 옆에 앉으면서 반갑게 껴안으며 인사를 한다.
“너도 잘 지냈어. 참,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미안해. 와이프도 잘 지내지? 애기는 있던가?”

“형님, 한 가지씩 물어보세요.” 너무 반가운 나머지 한꺼번에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미안. 방금 승오랑 네 이야기 하다가 네가 오는 바람에 묻고 싶은 것이 많아서 말이야. 그런데 승오가 나더러 족집게 도사를 하라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아! 그거요. 형, 정말 고마워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를 꼭 껴안으면서 말한다.
나도 희석이를 껴안기는 했지만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였다.

“무슨 일이야. 도대체 왜 그러는데”
“죄송합니다.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실은 형이 써 주신 내 미래소설 때문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아요.”

“그 얘기는 승오한테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이야긴데.”
“희석아, 형님이 기억이 잘 안 나시는 모양이야. 네가 독립해서 회사를 차린 것까지는 내가 말씀드렸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네가 자세히 설명 드려라.” 옆에서 지켜보던 승오가 거들며 이야기한다.

“제가 차린 엔씨월드가 연 매출 3억까지 달성하면서 자기계발분야에서는 꽤 잘 나가던 회사였어요. 그런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건지 아니며 직원들을 너무 믿은 것인지 모르지만 부도가 나버렸습니다. 직원 한 사람이 공금을 다른 데 써버린 거예요. 그래서 대출금을 갚지 못했죠. 그래도 다행히 빚을 지지 않고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참 허망하더군요.”

“많이 힘들었겠군. 그래서 연락이 안 되었구나. 근데 그 직원은 왜 그렇게 했데.”
“알고 보니 그 직원도 딱한 사정이 있더군요. 희귀병에 걸린 자식 수술비로 썼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 욕심이 지나쳐서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하느님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강연부터 다니기 시작했는데 연락할 면목이 없었어요.”

“그래, 그건 그렇고. 와이프는 어떻게 만났어?”
“참, 형님도 급하시긴. 안 그래도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입니다. 사연을 이야기하자면 한참 걸리거든요.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말씀드리고 요점만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하루는 저녁 강연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요. 할머니 한 분이 길에 쓰러져 계시는 겁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못하시는 거예요. 갖고 계신 소지품도 없어서 가족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었죠. 그래서 일단 병원응급실로 모시고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부탁드렸죠. 저는 다음날 지방에 강연을 가야 하기 때문에 병원에 연락처만 남기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그 할머니 손녀라고 하는 사람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정말 감사하다며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기에 만났는데, 그때 만난 인연으로 지금의 아내가 되었죠. 인연이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그리고 아내가 다니는 회사가 헤드헌터를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였는데 그 때 마침 자기계발 분야의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아내가, 아니 그 때는 결혼하기 전이었으니까 아내가 아니네요,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입사하게 되었죠. 그 이후로 자주 만나면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죠. 결혼 후에 책상을 정리하다가 형님이 써주신 글을 발견하고 읽어보았는데 너무나 똑 같은 겁니다. 참 기분이 묘하데요. 그 내용을 아내에게도 보여주었죠. 정말 소설 같다며 믿지를 못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끼쳤다. 그저 희석이가 바라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쓴 소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일 뿐이다. 희석이가 평소 사람을 잘 믿고 어려운 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품 때문에 하늘이 도우신 것이다. 나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희석이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연구원 소개가 끝나고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바람을 쐬러 바다가 보이는 베란다로 나갔다. 해가 서쪽 하늘로 지며 붉은 노을을 뿜어내고 있다. 붉은 빛으로 물든 바다가 아름다워 보인다.

5년 전 사부님은 3기 연구원 첫 수업을 시작하면서 우리들에게 의미 있는 말씀을 남기셨다.
“지금은 나를 통해 내 뒤로 보이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지만 연구원을 졸업하는 시점에는 여러분의 눈으로 바다를 보게 될 것이다. 아니, 여러분의 바다가 될 것이다.”

희석이도 바라던 꿈을 이루어가고 있다. 자신만의 바다를 향해 조금씩 흘러가고 있다.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가파른 폭포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힘든 과정도 겪으면서 항상 낮은 데로 임하는 물처럼 마침내 자신의 바다에 도달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글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희석아, 고맙다.

이제는 혼자가 아닌 푸근한 가족이랑 행복한 삶을 살기를 푸른 바다에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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