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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4일 05시 19분 등록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부터 3년 전이다. 당시 나는 지나간 사랑의 잔재에서 벗어나 마음을 추스르며 새로운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한 때의 열망이 삶을 흔들고 떠나가던 날, 송곳처럼 찔러대는 심장에 소주잔을 부으며 결심한 것은 다시는 불나비 같은 사랑에 나를 던지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여자 때문에 우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라 되 내이며 그 날 마신 술의 양만큼 눈물을 흘려버리고 그 다음 날부터 사랑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에 굳게 족쇄를 채웠다. 그리고 이직을 했고 지금의 회사에서는 나의 세계를 굳혀가며 소위 말하는 상류사회로의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그 날도 여전히 입국장의 긴 줄에서 시계를 보면서 게이트 번호를 확인하는 차였다. 그런데 갑자기 옆 쪽 라인에서 가슴으로 뜨거운 바람이 훅하고 밀려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찬찬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 때 어떤 환함이 이 쪽을 향해 있었다. 하얀 이를 가지런히 하고 웃고 있던 모습, 나는 처음에 그 환하던 아우라 때문에 그 주변의 물체가 인식이 안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나도 모르게 불에 덴 사람처럼 고개를 바로 했다. 묻어 두었던 어느 곳에선가의 쿵쾅거림이 두들겨대는 소리가 나의 귀를 멍멍하게 하고 있었다. 몸 왼쪽의 근육이 마비된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던 줄과 그녀의 줄이 점점 카운터 쪽으로 줄어들면서 우리는 동시에 입국장을 통과했다.

게이트를 찾는 척 하며 그녀의 옆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큰 키에 피부가 하얀 전형적인 미인이다. 서류가방을 들었고 베이지 색 바바리를 걸쳤다. 당당하면서도 수줍은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신비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나는 순간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우연하게도 내가 가려는 게이트 앞에서 발을 멈추더니 이윽고 그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고 있었다. 내심 안도의 한숨과 기대감이 몰려왔다. 나도 의자에 앉아 신문을 꺼내 들었다.

비행기에서는 내 좌석에서 두 번 째 앞자리였다. 그녀는 음식을 먹는 시간 외엔 꼬박 책을 읽는 듯했다. 베이징에 내릴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몰입하고 있었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내 설렘과 망설임 속에서 그녀를 지켜 보았다. 베이징 공항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게 한 번 말을 걸어볼걸 하는 후회가 밀려오면서 나의 점잖은 척 하는 껍데기에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결국 시내로 가는 버스가 왔고 나는 그냥 무거운 마음과 더불어 몸을 실었다.

출장은 무사히 마쳤다. 계획된 수순으로 설명회가 이어졌고 연이은 파티에 몸이 나른한 채 다시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앞에 도착했다. 바로 그 때다. 삼박 사일 동안 나를 아련하게 만들었던 예의 환함이 저 멀리에서 비쳐오기 시작했다. 그 아우라 속에서 걸어 오는 커다란 키의 해맑은 여자. 분명 그녀다.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바로 운명이라고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하지만 단호한 소리였다. 알 수 없는 용기가 나를 일어서게 했다. 나는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그녀와 만난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가 부부가 된지 1년 되는 날이기도 하다. 식탁 한쪽엔 케익이 놓여 있고 와인 글래스가 반짝거린다. 몇 가지 음식을 다 나르고 앞치마를 걸어 놓고선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앉았다. 특별하고 소박한 파티다. 자리에 앉아 와인을 따르고 잔을 들자 활짝 웃는다. 여전히 아름답다. 사랑하는 내 아내여..

아내는 참으로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천사 같은 미소는 나를 환하게 만드는가 하면 어떨 땐 개구쟁이 소년으로 돌아가 나를 골탕 먹이기도 했다. 또 너무나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어가며 사물을 분석을 하는 가하면 그러다가 이윽고 나에게만 보이는 애교로 근엄함을 확 바꾸는 재주도 있었다. 가끔 싸울라치면 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보이기도 하는 데 그러면 내가 더 이상 화낼 수가 없다.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고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아내가 울면 갑자기 온 세상이 슬퍼져 내가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첫 느낌 그대로 그녀는 나의 운명이 되었다. 우리는 잔잔하면서 이윽고 격렬한 연애 끝에 결혼으로 골인했다. 우리는 만나야만 할 사람들이었다. 잘 맞는 사람들, 어디 하나 논쟁이 필요하지 않았던 만남,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꼭 들어맞는 존재였다. 처음에 아내는 머뭇거렸다. 나는 그녀의 가까운 문이 되기로 했다. 그녀가 노크하고 싶은 거리에서 그녀의 문으로 있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지붕으로 있었다. 차양으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다림으로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와 주었다.

어느 날 그녀가 나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그녀의 세계가 온전히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해 주었다. 나 역시 그녀와의 사랑을 통해 내가 사는 존재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전해왔을 때 나는 내 온 마음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서재에서 그녀가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차를 끓였으며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서재에서 아내는 몰두하고 있었다. 여린 어깨가 안쓰러웠다. 아내가 쓴 책이 처음 서점에 나왔을 때 그 때도 우린 건배를 했다. 여보, 정말 축하해……

그리고 이번엔 나의 작품이다. 패션쇼를 준비하면서 아내에게 어울릴 옷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의 무대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결국 나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뜻하지 않게 여러 곳에서 모델 제의를 받게 되었다. 처음엔 그렇게 수줍어하던 아내가 이제 무대에서 스포트 라이트를 받아도 여유 있게 웃을 만큼 당당해졌다. 어떤 의상도 썩 잘 소화를 해낸다. 역시 그 예의 아우라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활짝 웃는 아내는 흥분을 감추지 않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것은 대륙을 탐험하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다. 무대에서의 아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때때로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매번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쇼가 끝났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오늘은 우리 둘만 하는 1주년 파티의 밤이다. 오늘의 의상은 웨딩드레스였다. 마지막에 나는 무대에 나가 아내의 손을 이끌었다. 각별한 1주년 기념이었다.

사랑은 서로를 구한다. 서로를 살린다. 사랑은 기쁨이다. 절대 고통이 아니다. 운명처럼 이란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그렇다. 나는 오늘 존재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아내가 눈을 반짝였다.
“당신과 만나서 정말 행복해, 그리고 고마워”
3년 전의 그녀는 이런 표현은 하지 않았었다.
“아니 내가 더 감사해, 지금보다 더 많이 사랑할께, 여보”
그녀의 밝은 변화가 기쁘다.

이 세상에 사랑이 정말로 존재함을 내게 보여준 여자. 환한 얼굴 뒤에 여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포용하며 모자란 나를 감싸주는 여자, 자신의 길을 조용하게 천천히 가고 있는 여자,
내 아내 민선,
언제까지나 그녀를 지켜주는 남자로 그렇게 있고 싶다. 그녀와 예쁘게 살다가 늙어가는 모습을 꿈꾸며 다시 한번 잔을 들어 아내의 잔에 부딪힌다.
IP *.48.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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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12.14 08:52:38 *.223.85.195
누나~ 첫 책으로 연애소설을 써보는건 어떨까요? 지난 번에 제 미래 소설도 그랬고, 이번 민선이 미래 소설도 그렇고... 누나만의 색이 단단히 드러나네요. ㅎㅎ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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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12.14 09:59:42 *.244.218.10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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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2.14 12:22:44 *.48.43.19
하하 연애소설이라… 허긴 연애 못하는 인간들이 상상은 잘하지. 고칠게 많은데 리뷰도 그렇고 어째 비번이 틀린다고 정정의 기회를 안 준다. 새벽에 마신 산딸기 물 때문에 손가락이 흔들렸는지 어쨌는지.ㅎㅎ

민선, 소설이나 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환타지의 세계라는 거. 그래도 이런 일이 진짜로 현실에서 그대에게 일어나기를 빌어볼께. (서로 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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