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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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6일 21시 19분 등록


첫 번째 편지.

“길을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목적지를 바꾸는 것이다.” - 지그미 키엔체 린초체

종윤 형에게

잘 지내셨죠. 어느새 금요일 밤입니다. 저는 이제서야 노트북을 펼쳤습니다. 머리 속에 맴도는 생각들을 아직 풀어내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잡초 한 뿌리를 심는 것과 상수리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똑같이 힘든 일이다”고 했던가요. 이렇게 시작이 어렵긴 처음입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당신께 두 통의 편지를 쓰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쓰는 편지라 많이 부끄럽지만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겠습니다.

사부님과 승오와 함께 장항으로 내려가던 기차 안에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부님께선 형이 참 따뜻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전날 밤 형의 전화 한통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제 불편한 마음을 헤아린 전화였겠죠. 그렇게 형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배려할 줄 아는 다정한 사람입니다.

이번 과제를 위해 형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언젠가 말했듯 형의 글은 참 신기합니다. 글의 처음에 눈이 가닿으면 어느새 또르르 굴러 끝에 닿아 있습니다. 문장과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부드러운 글이기도 하고, 웃음이 살며시 흘러나오는 재미있는 글이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을 울리는 섬세한 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제 마음에 걸리는 게 있더군요. 그게 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북리뷰 팀 모임을 마치고 헤어지는 길, 형과 나눴던 ‘마음의 벽’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아마 두려워서 시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 자기 자신을 가두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저이지만, 평소의 저처럼 그날도 잠자코 듣고만 있었습니다.

몽골에서였죠. 형이 발표를 하던 날 밤, 당신이 모두에게 눈물을 보였던 날, 저는 무언가 들어간 듯 눈이 뻑뻑하여 조용히 게르를 빠져나왔습니다. 해언에게 빌린 안약을 넣고 바라보던 밤하늘은 어찌 그리 까맣던 지요. 별들은 또 어찌 그리 반짝거리고, 다시 웃음을 찾은 당신과 연구원들의 도란거리는 말소리는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요.

몽골에서 돌아오기 전 마지막 날 밤, 희석과 함께 묵던 호텔방 베란다에서 고요한 새벽 공기에 잠겨 있는 울라바토르 시내를 바라보며 잠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때 부끄럽게도 희석에게 저는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산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했죠. “오윤은 한 80% 정도 알 것 같고, 종윤이 형은 한 60% 정도 알 것 같다. (물론 혼자만의 착각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들이 좋다. 그리고 희석이 너는 나와는 참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또 네가 좋다.”

형을 생각하니 자꾸 몽골의 풍경들이 떠오릅니다. 이국적인 몽골의 풍광과 낯선 듯 잘 어울리던 칠갑산 노래 자락. 해가 뉘엿뉘엿 기울던 들판에서 게르를 향해 걸어가며 들이켰던 캔맥주, 함께 초원의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오후의 신나는 말타기. 형이 먼저 떠나던 날 저녁, 식사 때 마시던 와인...

언젠가 형이 제게 전화해서 “넌 회사가 재미있냐?”고 물으신 적이 있죠. 그 때 저는 또 언제나처럼 얼버무렸겠죠. 아마 형처럼 순발력이 뛰어나지 못한 탓일 겁니다. 그 때 형은 요즘 회사 생활이 별로 재미없다며 개인 출판사 이야기를 꺼냈죠.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멋진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일에는 저도 관심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이 자리의 연구원들은 다 알고 있듯이 형의 이야기에는 듣는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으니까요.

10년 뒤, 오늘 우린 무엇을 하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참 궁금합니다. 이 편지의 시작을 계속 미루며 조각난 시간 틈틈이 책을 뒤적이다, 사부님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제가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사부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사자같이 젊은 놈들”에 나오는 어느 봄날의 이야기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봄날이었대요. 처칠은 블렌엄 궁전으로 가는 저 앞 도로변 옆에 이젤을 세우고, 그 위에 캔버스를 올려놓았지요. 아이들이 몰려들었대요. 처칠은 물감통을 열고 붓을 몇 개 잡더래요. 그러고는 가만히 서서 캔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라죠. 아이들은 처칠이 언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나 호기심에 차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는 넋이 빠진 듯 했대요. 아이들은 어서 그림이 그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좀처럼 그림을 그리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작은 붓으로, 팔레트 위에 파란색 물감을 아주 조금 묻히더라는군요. 그러고는 그 눈처럼 흰 커다란 캔버스 위에 콩알만한 점을 하나 찍더래요. 그러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더라는 거예요. 아이들은 아주 지루해졌지요.

마침 그 때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나더라는 거예요. 자동차에 탄 사람은 바로 존 래버리 경의 아내였지요. 얼마 전 처칠의 초상화를 그려준 뒤였대요.자동차 문을 열고 그녀는 처칠에게 소리를 쳤지요.
“이봐요, 윈스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예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오.”

그러자 그녀는 차에서 내려 처칠에게 다가왔대요. 그러고는 담박 상황을 눈치 챈 거죠. 아주 영리한 여자였던 모양이에요. 그리고는 장난기가 밴 목소리로 놀리듯 말했대요.
“윈스턴, 왜 안 그리고 있지요? 뭐가 문제에요?”
처칠이 대답했죠.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러자 그녀는 처칠의 손에서 가장 커다란 붓을 빼앗아 들고서는 파란색 물감을 듬뿍 묻혀서 캔버스 위에 거침없이 마구 칠하기 시작했지요.
그러고는 처칠에게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이봐요, 윈스턴. 이놈은 이렇게 공략하는 거예요.” 그러고는 차를 타고 가버렸대요.”

형은 참 재능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재다능한 끼를 삶 속에 풀어내는 현실감각도 뛰어나고, 어느새 주위 사람들을 무장 해제시켜 웃게 만드는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또 가슴 속 시린 슬픔도 아는 섬세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 지기 싫어하는 숨겨진 승부욕도 가진 사람입니다.

이제 당신 안의 영웅을 일깨우는 일만 남았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때로 찬란한 시작은 빈 캔버스 위에 파란 물감을 마구 칠하듯 무모하고 불안해 보이는 것인가 봅니다.

모두가 당신을 기다리는 그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그럼 오늘의 편지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건강하세요!

2007년 12월 7일, 도윤 씀


추신: 형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드립니다. 당신의 섬세한 손길이 아로새겨져 있을 멋진 책이 마구 기대됩니다. “전체에서 디테일로 가는” 즐거운 번역 작업이 되길, 삶이 변화하는 위대한 순간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두 번째 편지.


“나의 작업은 예술이 아니라 놀이에 가깝다.” -모리츠 에셔


다시, 종윤 형에게

우리가 처음 만난 지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벚꽃 날리는 섬진강을 따라 남해로 향하던 아름다운 그 길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말이죠. 그 곳에서 저는 참 멋진 인연들을 만났습니다. 평생을 저와 함께 할 사람들,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되뇌어 봅니다.

사부님, 종윤 형과 윤이, 승오와 희석이, 소라 누나, 민선 누나, 정화 누나, 창용 형, 영훈 형, 선이 누나, 은남 누나, 정희 누님, 그리고 초아 선생님, 승완이 형, 기찬이 형, 요한 형, 병곤이 형, 그리고 멋진 선배님들 얼굴이 차례차례 스쳐 지나갑니다.

그 때는 이런 멋진 날이 정말 내일로 다가오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리버리한 봄날의 저는 다만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는 부담감에 긴장하고,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에 잔뜩 취해 있었습니다. 그 때 제 눈에 들어온 당신의 첫 인상은 어딘가 편안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한 듯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연구원을 함께 하는 1년 동안, 형을 조금씩 알기 시작하면서 그 약간의 이물감이 바로 우리의 공통점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10년 전,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만 있었던 어렴풋한 안개 같은 꿈들이, 우리가 “대낮에 꾸었던 위험한 꿈들”이 이제는 찬란한 꽃들로 피어나 온 세상을 가득 채웠습니다. 연구원들의 향긋한 묵향으로 가득 찬 한쪽 벽면의 책꽂이에서 그제 새로 사 고이 꽂아 둔 형의 책을 뽑아듭니다. 두 달 전에 초고를 읽긴 했지만, 저는 다시금 당신의 글 속에 스르르, 빠져들어갑니다.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당신의 경쾌한 글 솜씨는 10년 사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마치 맑음과 깊음을 동시에 갖춘 신라의 은은한 에밀레 종소리 같습니다.

형과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을 잠시 돌이켜 봅니다. 생각해보니 즐거운 순간도 많았고, 때론 가슴 졸이는 사건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10년 전, 형과 윤이, 희석이와 함께 북 리뷰 팀을 만드는 순간, 1년 동안의 연구원 수업이 끝난 뒤에도 이들과 함께 하며 가슴 뛰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정말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자연스레 제 현실과 우리의 미래로 연결되었습니다.

1년 동안 읽었던 책들의 땀방울 어린 리뷰를 모은 '북 리뷰' 프로젝트 이후에도, 우린 실험적인 출판 기획사를 창업하고, 그 작은 회사를 통해 이런 저런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새로운 상상의 지평을 열어나갔습니다. 형의 순발력 있는 실행력과 윤이의 재치와 희석의 밝은 차분함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화음을 만들어냈고, 우린 위험한 순간들을 슬기롭게 헤쳐 나갔죠.

유명 작가이자 멋진 벤처 사업가로 성공한 종윤이 형, 한국의 조엘 오스틴으로 널리 알려진 명 강연가 희석, 그리고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 서양 문화 전문가이자 번역 작가 오윤. 이제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아주 가끔 얼굴을 맞댈 뿐이지만 저는 연구원 이후 3,4년 동안 함께 했던 그 짜릿한 나날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며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집니다.

어느새 새벽 1시가 넘었습니다. 어쩌면 이글은 편지가 아니라 당신을 핑계삼아 저를 다독이는 속삭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에 대한 기대감 탓인지, 묘한 긴장감 때문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습니다. 마치 봄 소풍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이리저리 뒤척입니다. 내일은 제 10대 풍광 중 마지막 장면인 새로운 형식의 공연“꿈잔치”를 선보이는 날입니다. 단 하루 동안의 축제를 위해 지난 40년 세월을 살아온 듯 한 느낌입니다. 모든 생의 장면, 장면들이 어느 한 점에로 모이는 바로 그 순간… 10년 전, 첫번째 레인보우 파티에 참석하며 느꼈던 그 미세한 떨림을 거대한 폭풍우로 바꿔내는 바로 그 날입니다.

1년 전, 전시회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오늘이 그들 안의 '바로 그것'을 일깨우는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터져 나오듯 '내 안의 내'가 용솟음치며 깨어나는 위대한 전환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호한 영감을 구체적인 현실과 연결시키는 날, 10년 전 사부님께서 우리를 일깨워주셨듯이, 오늘은 우리가 그들을 일깨워주는 축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되는” 소중한 하루를 만들기 위해 저는 3기 연구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엽서 한 장씩을 보냈습니다. 당신께 보낸 엽서에는 조금 모자란 듯한 장정일의 시 한 편을 담았습니다.

Job 뉴스 - 장정일

봄날,
나무벤치 위에 우두커니 앉아
(Job 뉴스)를 본다.

왜 푸른하늘 흰구름을 보며 휘파람을 부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호수의 비단잉어에게 도시락을 덜어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소풍 온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놀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비둘기 떼의 종종걸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뭇잎 사이로 저며드는 햇빛에 눈이 상하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무벤치에 길게 다리 뻗고 누워 수염을 기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이 40억 인류의 Job이 될 수는 없을까?

그리고 이런 부탁을 덧붙였습니다. “2017년 3월 31일, 그들에게 당신이 처음 그렸던 서툴지만 심장 뛰던 푸른 하늘을 펼쳐 보여 주세요.”

너무 많은 사람을 모으진 않았습니다. 오래 전 형의 첫 번째 강연회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에 우리가 만난 지 10년 되는 이 날을 기념하여 딱 1,000명을 모았습니다. 형을 비롯한 3기 연구원들 모두가 쟁쟁한 유명 인사가 되었으니 이 정도의 인원을 모으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지요. 그러나 새로운 축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이 정도의 인원이 딱 적당할 듯 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오늘 잠을 자긴 틀린 모양입니다. 형의 책을 읽으며 남은 밤을 지새워야겠습니다. 그리고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 무렵, 오늘의 축제를 다시 한번 머리 속에서 리허설해 보아야겠습니다. 오늘이 되기 전,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즉흥 공연이기에 피치 못할 돌발 사태는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눈부신 오늘 하루의 소중한 일부분입니다.

오늘의 깜짝 선물로 제가 좋아하는 형의 글귀에 영상을 붙여 작은 영화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부디 마음에 드는 당신 강연의 인트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당신을 위해 준비한 무대를 마음껏 즐겨 주세요. 오늘은 바로 당신의 날입니다. 우리의 날입니다. 여러분들의 날입니다.


2017년 3월 31일, 도윤 씀


추신 : 멋진 오늘이 지난 뒤, 우리 앞에 펼쳐질 거대한 호주의 풍광이 기대됩니다. 승오가 강연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이 많이 아쉽긴 하지만 형과 함께 말을 달리며 바라보는 지구 반대편의 일몰과 푸른 해안의 하얀 모래사장이 벌써부터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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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12.16 17:53:14 *.152.82.96
종윤인 좋겠구나.
그럴 수 있는 時田이 부럽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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