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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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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4일 18시 32분 등록

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가 다닌 학교는 AIT(Asian Institute of Technology) 라는 인터내셔널 칼리지로, 전세계 60개국의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고 있었다. MBA 프로그램의 학생들은 절반은 유럽과 북미의 백인 학생들로, 절반은 베트남과 미얀마 등지의 동남아 학생들로 채워졌다. 교실로 들어설때면 검은 색과 흰 색이 적당이 섞여있어 바둑판을 연상시켰다.

당시 MBA 과정의 ‘아시아 비즈니스 환경’이라는 수업을 수강했는데. 교수님이 아주 괴짜였다. 그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지역에서 매년 2~3년씩 번갈아가며 살고 있는 프랑스인이었다. 수업은 한 학기 동안 ‘글로벌 회사를 아시아 지역의 어떤 나라에 어떻게 런칭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업 첫 시간에 교수님의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 각 나라의 현재 장점과 강점, 미래의 기회와 위협요소에 관한 스왓(SWOT)분석을 들려주었다. 나는 궁금했다. 노장 교수의 한국에 대한 평가가 어떨까?

한국의 강점에 대해 교수는 몇 가지 말을 했다. 파란 화면의 스크린에 흰색으로 몇 가지의 문장들이 적혀있었다. 그 중 내 눈에 띈 것은 “높은 교육 수준의 사람들(Highly Educated People)”이라는 대목이었다. 한국에 살 때 학생들이 학습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높아 무척 놀랐다고 덧붙였다. 시험 전날까지도 텅텅 비어있는 유럽이나 동남아의 도서관과는 달리 한국 학생들은 방학 때에도 쉬지 않고 공부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실제로 똑똑하다. 말을 듣는 순간 애국자가 된 듯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럼 그렇지. 한국 사람이 똑똑하긴 하지.

“Highly Educated People” 이라는 같은 문장은 한국 미래의 위협(Threaten) 요소에도 들어가 있었다. 한마디로 헛똑똑이가 많다는 소리였다. 교육 수준은 높은데 방향을 잃은 교육이라 했다. 그것이 머지않아 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것이라 했다. 나는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코흘리개 꼬마들도 평균 두 세 개의 학원을 다니고, 학부모들은 매일 학교에 전화를 해대고, 성적이 늘 전교 1등이었던 학생이 2등 되었다고 목을 매다는 나라가 우리나라였다. 10년 동안 영어를 공부해도 정작 외국인이 ‘쏘리’, 하면 당황하여 ‘유어웰컴’을 더듬거리고, 안 되는 걸 미적거리며 배운 미적분은 ‘적분은 미적 거꾸로’ 빼고는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그래서 젊고 능력 있는 부모들이 앞다투어 조기유학을 보내는 나라가 우리나라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공부를 잘한 편이지만, 언제나 나에게 공부는 억지로 참으며 해야 하는 것이었다. 책상 앞에 앉으면 30분에 한번은 담배를 태우러 들락날락 거리며 다시 방으로 들어올 때마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파이팅!’을 강하게 외치지 않으면 좀처럼 집중할 수 없는 종류의 활동이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오기가 있었다. 억지로 붙들고 ‘될 때까지 해보자’는 강한 의지 덕분에 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다.

나와는 달리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경영대학원에서 내가 동경했던 한 형은 여덟 시간짜리 시험을 치르고 녹초가 된 몸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형 왜 그래. 하니, 슬며시 웃으면서 “야, 지금까진 시험을 위해 공부했으니까 이젠 내가 좋아하는대로 공부해 봐야지” 하며 책을 폈다. 세상엔 그런 종류의 사람도 있었다. 그는 공부(Study)를 배우기(Learn)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배움은 목적이었고 공부는 자신이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수단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모든 학생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끔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동기들에게 왜 공부를 더 하려고 하는지 물을 때가 있었다. 술잔이 채워지는 속도가 느려지고 솔직한 이야기를 할 때즘 몇몇의 대답은 ‘군대에 가는 것보다 박사과정 전문연구요원으로 있는 것이 나아서’라던가, ‘교수만큼 안정된 직장이 없는 것 같아서’였다. 그게 일부 엘리트들의 모습이었다. 전문경영인이 되고 싶다고 했던 나처럼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씁쓸한 모습이었다.

나는 살아가면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향해야 할 ‘정북향(正北向)’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믿는다. 마치 산을 오르는 길은 무수히 많지만 결국 정상에서 모든 길들이 모이는 것처럼,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길을 치열하게 걸었던 사람들이 비슷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볼 때 ‘진리는 하나’라는 말을 실감한다. 현재 대한민국이 말하는 교육은 그 길을 하나라고 규정하는 듯 하다. 적어도 대학교까지는 국영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될성싶은 떡잎이고, 그렇지 못하면 썩은 씨앗이다.

나는 학교를 다닐 때 늘 무언가에 목말라 있었다. 배우는 것은 많은 것 같은데 중요한 무엇이 빠진 것 같았다. 예컨데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거리를 던져주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질문들은 강의실에서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학생 각자가 도움없이, 알아서 풀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학위가 올라갈때마다 더욱 쪼개지고 복잡해지는 과목들을 들으면서도 내 인생이 깊어짐을 느낄 수 없었다. 법정 스님은 ‘서있는 사람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이 말은 얼마나 복잡하게 분별하고 있느냐의 뜻이다. 안다는 것은 산스크리트어의 어원으로 보면 아는 것을 쪼갠 것, 즉 분별의 지식이다. 그래서 이것을 분별지(分別智)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이 분별지는 인격과 직접 관계가 없다. 그저 아는 것을 뜻할 뿐이다. 일찍부터 인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지식을 ‘분별 망상(妄想)’이라고 해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 대신 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지의 세계를 추구하고, 또한 거기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여기서 말하는 무분별지는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쪼개고 하는 분별 망상을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끝없는 빛, 즉 지혜라고 불교경전에서는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학교가 모든 답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코 그럴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나 도움을 주고 가이드 라인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혜보다는 기능적 지식, 도움보다는 평가에만 치중한 것이 교육의 현실이다. 다중 지능 이론의 창시자인 하버드대의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지능의 종류를 7가지로 정의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수리력과 언어력 이 두 가지만이 측정될 수 있다고 했다. 사회 지능(Social Quotient)과 같은 성품적인 것들은 단지 평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측정의 편의성을 위해 학생들은 평범해 질 것을 요구 받는다. 평범의 분주함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지 못한다.

하고 싶은 것을 이미 찾은 학생이라도 그는 학업에 더해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오히려 고달픈 인생을 두 배로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여러가지를 다 잘하려다 결국 평범해진다. 그런 환경에서 학생들은 공부를 참아야 하는 어떤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인생을 참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불행은 언제나 사회적인 기대와 내부의 목소리 사이에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교육이 바뀌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 과정에서 내가 조그마한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IP *.218.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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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12.16 17:46:13 *.152.82.96
그럼 이 쪽으로 방향을 잡은겨?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끄적 끄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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