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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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미국인에 대한 코드는 꿈(dream)이다.’
‘직업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정체성(who you are)이다’
‘음식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연료(fuel)이다.’
??????
<컬처코드>에서 이렇게 ‘무엇에 대한 무엇의 코드는 무엇이다.’라고 간단한 표현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문화마다 그 특성이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한 마디로 표현되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 담지 못하는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코드가 그 문화권에 속한 모든 구성원에게 적용되는 것일까. 분명 아닐 거야.’
이 책에서 다루는 ‘컬처코드’란 어떤 문화권의 특성을 무의식을 동원하여 코드로 풀어보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하면 그 역시 동의합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의심이 드는 것은 나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저자도 책의 뒷부분에 밝히지 않던가요. 프랑스인인 저자는 자신이 미국 문화에 맞는 성향을 이미 갖추고 있었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 속에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나태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프랑스인들은 계속 유럽에 살고, 용기와 결단력 있는 사람들은 미국에 왔다고 하며, 이들은 ‘조국’을 발견했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배웠으면서 이와 같은 생각으로 사는 곳을 바꿀 정도라면, 프랑스 문화와는 상당부분 맞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개체이며 저마다 동기와 영감, 행동 지침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복합체, 즉 개인적 코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 코드라는 것, 개인을 또 단순화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지만, 한 문화권 안에 다양한 구성원이 있다는 사실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 셈이네요. 그 다양함 속에 해당 문화권 안에서 융화되지 못하거나 배기지 못하는 특이한 개체도 있다는 것을, 저자 자신과 미국에 거주하는 저자 지인(프랑스인) 몇몇이 증명한 셈입니다.
여기에 이르니 가슴에 담아두었던 구절 하나가 생각납니다. 일전에 읽은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에 있는 것인데, 저에게는 가슴에 들어오는 정도를 넘어 마음을 후려치는 구절이었습니다.
“명료성은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명료성은 사방을 밝혀 주지만 그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더욱 어둡게 만든다.”
‘무엇에 대한 무엇의 코드는 무엇이다.’. 간단명료하고 쉽고 시원시원한 표현이죠? 시험문제로 나오면 외우기 딱 좋겠습니다. 사실 <컬처코드>에서 ‘아, 그렇구나.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코드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단정지어버림으로써 오는 위험이 염려되기도 하였습니다.
좀 전에 인용한 구절이 그런 뜻입니다. 서구 문화는 오랜 기간 동안 ‘진리’가 존재다고 믿고 그것을 숭앙하였습니다. 그 진리라는 것은 각종 법칙, 공리, 법칙, 규정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억겁세월 일체 불변할 절대적인 무엇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리라고 믿어지는 것들은 막강 권력을 주위에 휘둘렀습니다. 이것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묵살되고 무시되었습니다. 아예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싹이 보이면 잘라버렸습니다. ‘진리’라는 명료함은 오로지 그 주위만을 비출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 꾸물대는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도망친 것들이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리’의 내용이야 바뀌기도 했지만, 이것은 명료함이라는 불빛의 위치만 옮겨짐을 의미했습니다.
명료함은 이분법적이거나 직선적 사고에서 오는 것이기 쉽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있다 아니면 없다. 맞다 아니면 틀리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의 사고가 더 쉽기도 하고 많이 젖어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無)에서 유(有)가 나온다거나,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無可, 無不可)라는 등의 동양적 사고관을 나타내는 몇몇 구절을 앞에 두고 헤매기도 합니다. 사실 명료함 자체보다는 이분법적이고 직선적인 사고가 더 문제 삼을 만한 것이겠습니다.
다시 돌아가 말하면, 컬처코드라는 이 간단 명료한 표현이 그것과 어울리지 않은 다양한 현상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지, 가려 버리는 건 아닌지, 구성원 개개의 특질이 묻히고 마는 것은 아닌지, 문화적 특질을 직선화해서 이해하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눈 옆 가리개를 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말처럼 말입니다.
문화라는 것, 어떤 문화권이 이러이러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역시 이런 수많은 다양성과 역동성을 내포하고 있겠지요. 문화권의 어떤 특성으로 나타내는 것은 그 가운데 대표성을 지닌 어떤 특질일 것이겠지요. 그리고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다양성과 역동성을 전제로 하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개인도 마찬가지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안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문화나 개인이나 복잡 다단한 유기체이고, 삼차원을 넘어 시공간을 벗어나는 사차원의 세계가 아닌가 합니다. 무수한 넘나듦이 있고 생성하고 소멸하고 변화하는 무엇이 아닐런지요. 그런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잡힐 듯 하면서 잡히지 않고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너무나 간단히 이르기도 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러이러하지.’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 뱉고 나서는 마치 그런 사람인 양 행동합니다. 일단 말에 맞는 행동을 해야 좀 더 편할 테니까요.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불일치감에 불편하지는 않았었는지요.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본 적은 없었는지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쉽게 규정함으로써 자신을 그것에 옭아매고 다른 면을 보지 못하지는 않았는지요. 삶의 다양한 이입과 표출을 막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과연 그런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단정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는 오랜 시간 동안 실험하고 도전하고 탐험하고 숙고한 끝에 나온 것인가요. 이렇게 오랜 기간 공을 들였다면 오히려 단정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그 이유를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명료(明瞭)함은 밝은 이미지이죠. 그러나 밝음과 동시에 어두움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명료함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이겠지요. 명료함 간단함 이 시원 깔끔함 뒤에 이것이 비추지 못하는 어둠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명료함으로 인해 더욱 어두울 수 있습니다.
이제 명료함의 모순을 새기려 합니다. 명료함에 눈이 부셔 옆에 있으면서 애써 보려 하지 않고,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물리쳐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명료함에 맞지 않는 것을 흘리지 않으려 합니다. 명료함에 현혹되어 이것에 편협하지 않으려 합니다.
---
편협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쓸 것이 있지만 힘이 딸려 여기서 멈춤.
IP *.120.66.177
‘직업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정체성(who you are)이다’
‘음식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연료(fue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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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코드>에서 이렇게 ‘무엇에 대한 무엇의 코드는 무엇이다.’라고 간단한 표현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문화마다 그 특성이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한 마디로 표현되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 담지 못하는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코드가 그 문화권에 속한 모든 구성원에게 적용되는 것일까. 분명 아닐 거야.’
이 책에서 다루는 ‘컬처코드’란 어떤 문화권의 특성을 무의식을 동원하여 코드로 풀어보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하면 그 역시 동의합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의심이 드는 것은 나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저자도 책의 뒷부분에 밝히지 않던가요. 프랑스인인 저자는 자신이 미국 문화에 맞는 성향을 이미 갖추고 있었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 속에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나태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프랑스인들은 계속 유럽에 살고, 용기와 결단력 있는 사람들은 미국에 왔다고 하며, 이들은 ‘조국’을 발견했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배웠으면서 이와 같은 생각으로 사는 곳을 바꿀 정도라면, 프랑스 문화와는 상당부분 맞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개체이며 저마다 동기와 영감, 행동 지침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복합체, 즉 개인적 코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 코드라는 것, 개인을 또 단순화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지만, 한 문화권 안에 다양한 구성원이 있다는 사실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 셈이네요. 그 다양함 속에 해당 문화권 안에서 융화되지 못하거나 배기지 못하는 특이한 개체도 있다는 것을, 저자 자신과 미국에 거주하는 저자 지인(프랑스인) 몇몇이 증명한 셈입니다.
여기에 이르니 가슴에 담아두었던 구절 하나가 생각납니다. 일전에 읽은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에 있는 것인데, 저에게는 가슴에 들어오는 정도를 넘어 마음을 후려치는 구절이었습니다.
“명료성은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명료성은 사방을 밝혀 주지만 그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더욱 어둡게 만든다.”
‘무엇에 대한 무엇의 코드는 무엇이다.’. 간단명료하고 쉽고 시원시원한 표현이죠? 시험문제로 나오면 외우기 딱 좋겠습니다. 사실 <컬처코드>에서 ‘아, 그렇구나.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코드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단정지어버림으로써 오는 위험이 염려되기도 하였습니다.
좀 전에 인용한 구절이 그런 뜻입니다. 서구 문화는 오랜 기간 동안 ‘진리’가 존재다고 믿고 그것을 숭앙하였습니다. 그 진리라는 것은 각종 법칙, 공리, 법칙, 규정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억겁세월 일체 불변할 절대적인 무엇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리라고 믿어지는 것들은 막강 권력을 주위에 휘둘렀습니다. 이것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묵살되고 무시되었습니다. 아예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싹이 보이면 잘라버렸습니다. ‘진리’라는 명료함은 오로지 그 주위만을 비출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 꾸물대는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도망친 것들이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리’의 내용이야 바뀌기도 했지만, 이것은 명료함이라는 불빛의 위치만 옮겨짐을 의미했습니다.
명료함은 이분법적이거나 직선적 사고에서 오는 것이기 쉽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있다 아니면 없다. 맞다 아니면 틀리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의 사고가 더 쉽기도 하고 많이 젖어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無)에서 유(有)가 나온다거나,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無可, 無不可)라는 등의 동양적 사고관을 나타내는 몇몇 구절을 앞에 두고 헤매기도 합니다. 사실 명료함 자체보다는 이분법적이고 직선적인 사고가 더 문제 삼을 만한 것이겠습니다.
다시 돌아가 말하면, 컬처코드라는 이 간단 명료한 표현이 그것과 어울리지 않은 다양한 현상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지, 가려 버리는 건 아닌지, 구성원 개개의 특질이 묻히고 마는 것은 아닌지, 문화적 특질을 직선화해서 이해하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눈 옆 가리개를 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말처럼 말입니다.
문화라는 것, 어떤 문화권이 이러이러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역시 이런 수많은 다양성과 역동성을 내포하고 있겠지요. 문화권의 어떤 특성으로 나타내는 것은 그 가운데 대표성을 지닌 어떤 특질일 것이겠지요. 그리고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다양성과 역동성을 전제로 하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개인도 마찬가지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안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문화나 개인이나 복잡 다단한 유기체이고, 삼차원을 넘어 시공간을 벗어나는 사차원의 세계가 아닌가 합니다. 무수한 넘나듦이 있고 생성하고 소멸하고 변화하는 무엇이 아닐런지요. 그런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잡힐 듯 하면서 잡히지 않고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너무나 간단히 이르기도 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러이러하지.’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 뱉고 나서는 마치 그런 사람인 양 행동합니다. 일단 말에 맞는 행동을 해야 좀 더 편할 테니까요.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불일치감에 불편하지는 않았었는지요.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본 적은 없었는지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쉽게 규정함으로써 자신을 그것에 옭아매고 다른 면을 보지 못하지는 않았는지요. 삶의 다양한 이입과 표출을 막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과연 그런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단정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는 오랜 시간 동안 실험하고 도전하고 탐험하고 숙고한 끝에 나온 것인가요. 이렇게 오랜 기간 공을 들였다면 오히려 단정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그 이유를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명료(明瞭)함은 밝은 이미지이죠. 그러나 밝음과 동시에 어두움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명료함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이겠지요. 명료함 간단함 이 시원 깔끔함 뒤에 이것이 비추지 못하는 어둠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명료함으로 인해 더욱 어두울 수 있습니다.
이제 명료함의 모순을 새기려 합니다. 명료함에 눈이 부셔 옆에 있으면서 애써 보려 하지 않고,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물리쳐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명료함에 맞지 않는 것을 흘리지 않으려 합니다. 명료함에 현혹되어 이것에 편협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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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쓸 것이 있지만 힘이 딸려 여기서 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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