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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0일 11시 16분 등록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여덟 번째 이야기입니다.
지난 편지에서 ‘생각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나’에 대해 썼습니다. 이번 편지에서는 ‘시어머니께 말씀드리기’에 대해 쓰겠습니다.


사촌시동생의 방문으로 ‘종손 출산’에 대한 부담이 횡적으로도 승계된다는 걸 알게 됐고, 초등 5학년 큰아이의 고백으로 ‘장손녀의 고충’을 알게 된 이상, 가만히 글만 쓰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글로 쓰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쥔 사람은 가부장제를 받드는 노동의 주체인 ‘시어머니’밖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 일을 문제 삼고 정면 돌파할 사람 역시 집안을 통틀어 저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종손을 출산하지 못한 채로 15년째 11대 종손부 자리를 지킨 제가 종손의 어머니이자 10대 종손부로 45년을 살아오신 시어머니를 독대하는 장면이 쉬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D데이를 아버님 생신날로 잡았습니다. 재작년인 2016년 추석은 9월 15일이고, 그해 아버님 생신은 10월 16일입니다. 추석 귀성길 차 안에서 큰아이가 폭탄선언을 하고나서 꼬박 한 달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고민이 거듭될수록 목표는 한 가지로 집중됐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고부간 관계가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담백하게 ‘문제’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기!”


해마다 아버님 생신상은 제가 차렸습니다. 정성을 들였을 때도 있고 대충 차린 적도 있지만 ‘D데이’ 만큼은 최고의 생신상을 차리고 싶었습니다. 사실, 메뉴를 고르고 재료를 준비하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내가 아들만 낳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는 자책이 올라오는 순간엔, 두 딸이 눈에 밟혀 얼른 생각을 접어야 했습니다. 아버님과 친정 엄마 생신이 겹쳐 있기에, ‘언제까지 며느리가 생신상을 차려야 하는 거야? 정작 친정 엄마 생신에는 친정에 가지도 못 하잖아?’라는 생각이 들 때면, 아버님 생신상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올해는 친정에 가서 엄마 생신을 챙겨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했습니다. 아버님 생신상을 준비하면서 생각이 점점 한 가지로 모아졌습니다.


“시아버님 생신상만 차리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다! 내년부턴 시아버지 생신과 친정 엄마 생신을 공평하게 챙겨드리겠다!”


언젠가 남도 여행에서 ‘장흥삼합’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한우와 조개 관자, 표고버섯을 구워서 세 가지를 한꺼번에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그 맛에 반해 아버님 생신 때 꼭 한번 해드려야지 했습니다. 표고버섯의 쫄깃한 식감이 이가 좋지 않은 아버님껜 좋지 않을 것 같아서 표고 대신 부드러운 제철 가지를 굽기로 했습니다.


D데이입니다. 큰 팬에 버터를 두르고 얇고 넓적하게 자른 가지를 굽습니다. 옆에는 결 반대 방향으로 0.5센티 두께로 잘라 미리 준비해둔 조개 관자를 굽습니다. 관자의 짭짤한 국물이 가지를 적셔 가지식감이 더욱 촉촉해집니다. 그 옆에는 0.5센티 두께로 잘라 손질한 한우 꽃등심을 굽습니다. 촉촉하게 간이 벤 가지에 고소한 소고기를 얹고 간간한 조개 관자를 얹어 삼합을 만들어 아버님과 어머님 입 속으로 쏙 넣어드립니다.


아버님과 어머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합니다. 아이들도 맛있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순간, 죄책감이 올라왔습니다. 무언가 목적이 있는 파티라니…, 제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다 하고나서 아가씨네 가족이 집으로 돌아간 후 부엌에 시어머니와 저만 남았습니다. 어머니께선 평소엔 솜씨 없는 며느리가 어떻게 솜씨를 발휘했나 대견스러우셨는지 칭찬을 가득 해 주셨습니다. 이때 슬그머니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머니, 알고 계셨어요?”


먼저, 사촌 시동생 내외가 ‘종손 출산’의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아이고, 그 일이 걔들한테까지…, 거기까진 생각도 못 했다.”


어느새 어머니 얼굴빛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어머니, 수민이 말인데요….”


사춘기에 들어선 큰아이가 남녀차별의 부당함을 말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이젠 시도 때도 없이 남아선호 발언을 서슴지 않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앞으로 할머니할아버지댁에 오지도 않겠다고 하고 있다고…, 아이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어서 엄마로서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겠다고 전했습니다.


“아이고, 얘야. 말도 마라!”


어머니께서는 꽁꽁 잠가 둔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히고 시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시댁 문화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있자니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아홉 번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정정합니다.
지난 편지 내용에서, 위 문장을 아래 문장으로 바꿉니다.
작년 추석 귀성길, 차 안에서 두 딸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당시 큰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작은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재작년 추석 귀성길, 차 안에서 두 딸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당시 큰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작은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IP *.202.11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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