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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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말을 사이공에 두고 왔어
대기업에서 혁신을 담당하는 팀장이었던 적이 있다.
회사를 떠나기 전 3년간 실로 화끈하게 일했다 자부했었다.
더 나은 다른 회사에서 비결을 알려달라며 우리 팀을 배우러 왔으니 교만한 어깨에 힘 빠질 날 없었다.
어느 날 자신이 끌어 모은 팀원 중 일부가 구조조정 대상자 명단에 올라 있는 걸 확인하고 그들을 대신해 회사를 나왔다. 폼 나게 살 나이는 지났지만 스스로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때를
맞추어 얻게 된 직장은 라오스. 뜬금 없게도. 낯선 나라에
단신으로 와 곡절을 겪었다. 어이없는 이 외로움을 스스로 해명하려 밤을 샌 적이 있다. 혼자 잔 이불에 채 남겨두지 못한 쓸쓸함은 사무실까지 따라왔고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직장인 정체성이 미웠던
때, 증오하기를 멈추지 못하던 내가 무서웠던 그때. 다시는
월급쟁이 안 할거라 다짐하며 남들 다 보는 카페에 앉아 혼자 꺽꺽 울었다. 한참을 울어 쪽팔림이 밀려왔기로
카페를 나서며 중얼거렸다. 그래 여긴 아니다. 두 달 만에
한국에 돌아가려 짐을 쌌다. 그때 보였다. 여기. 황홀한 라오스의 속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구 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꽁꽁 숨겨 놓고 나만 즐기고 싶은 곳. 메콩강
붉게 타는 노을과 아름다운 여인들, 길을 지날 때마다 누구나 한 움큼씩 던지는 그들의 미소, 미소, 미소. 심각한
얼굴을 하고 다니는 내 조국에 화가 날만큼. 심각하지 않고 바쁘지 않아도 이렇게 잘 살 수 있는데 말이다. 내 살던 나라에선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감지하게 된 후 가족 모두를 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이들은 현지에서 학교를 다니고 어리둥절했던 아내는 일과 육아까지 감당해야 했던 야만의 나라를 이내 잊었다. 저녁마다 와인으로 꽐라꽐라 되어 춤추다 지쳐 잔다. 그렇게 느린
시간에 살게 되었다. 이리 살 수 있는데 말이다. 늦게 나마
이리 살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긴다. 언제까지 거기 처박혀 있을 거냐는 지인들의 타박에 나는 말한다. 여기서 더 놀다 갈란다.
모든
면에서 느려 터진 내가 남들보다 빠른 게 두 가지 있었으니 아이스크림 먹는 속도와 산에 가는 준비다. 두
가지 외엔 느리고 느리다. 모든 게 빨라야 사람 취급 받는 나라에서 어떻게 돈 벌었나 싶을 정도라고
가끔 아내가 지나가며 말하기도. 그도 그럴 것이 달변이 마냥 부러워 자책하며 고장 난 조리개처럼 열고
닫히는 내 입에 소가 서식하나 스스로 의심해 보기도. 제대로 된 신체자본 없이는 어디 가서 명함도 내
밀지 못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라고 딸이 측은하게 바라보기도. 그도 그럴 것이 눈썹은
자라다 말아서 어느 때부턴가 붙은 별명은 모나리자. 눈은 작고, 아래위
할 것 없이 두꺼운 입술에 볼품이 사라져 그래서 또 붙은 별명 썰면 두 접시. 열등을 달고 살았다. 그런데 말이다, 상식은 뒤집어 져라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아, 베트남에서 나는 일등 남편이요 신랑감이다. 열등이 무언가, 씹어 삼키는 것인가. 여기서 가장 잽싼 남자보다 내가 빠르다. 말을 모르니 느리게 말하든
빨리 시부리든 아무도 모른다. 무엇보다 여기선 마스크 따지지 않는다.
돈을 적게 벌든 많이 벌든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 남자를 최고로 친다. 잘생기고 말
잘 하는 놈들아, 나 여기서 더 놀다 갈거야.
- 안녕하세요. 장재용입니다. 수요일마다 만나게 될 글은 고국을 떠나오면서부터 썼던
일기를 걸터듬어 씁니다. 글은 잡스러울 것 같습니다. 사소하고
개인적이며 중언하고 부언하다가 가벼워질 테고 또 필요이상으로 무거울 수도 있을 테지만 어쩌겠습니까, 읽으셔야
합니다. 제 마음(편지) 이니까요. 속절없는 경계인, 낯선 나라에 살게 된 이방인, 외로움, 다른 체제, 다른
문화로 벌어진 웃지 못할 일들, 그리운 내 나라 산과 사람들, 자녀들의
교육, 무섭게 변화하는 사회와 경제, 역사적 배경 등 다양한
주제와 에피소드로 찾아 뵙겠습니다. 기해년 상반기는 [짙은
라오]를 주제로 라오스 이야기를, 하반기에는 [수요일에 떠나는 사이공]을 주제로 베트남 이야기를 풀어 내려 합니다. 언젠가
해질녘 휘어진 야자나무와 그 아래 벌거벗은 여인들이 춤추는 해변에 살아보리라 꿈꾸던 적이 있었지요. 실재하는
그곳을 열망했다기 보다 사위가 붉어지는 그 해변의 감미로운 하루와 그 여유가 제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수요일, 제 글이 여러분들의 눈을 지긋이 감기고 여유의 속살로 데려갔으면 좋겠습니다. 남쪽하늘에 낄낄거리는 햇빛 한 오라기처럼.
장재용 -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8기
연구원, 월간 산 객원기자, 베트남 교민잡지 칼럼 필진 -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등정, 북미최고봉 데날리(6,194m) 등정, 캐나다 록키산맥 단독종주, 백두대간 종주, 낙동정맥 종주
- 2016년 프로야구 NC다이노스 개막전
시구
저서) 딴짓해도 괜찮아 (비아북, 2017.10), 구본형,
내 삶의 터닝포인트 (유심, 2018.12,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