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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3일 22시 47분 등록
당신의 마음 속에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과 무관한 동기에 따라 기억 속에 자리잡은 공간적 심상이 있다면, 그같은 공간적 심상으로부터 문화적인 인식과 실천에 대한 통찰을 제공받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공간 취향이며 저다움의 미의식의 교두보라고 할이다. 옛집이라는 것, 고향이라는 것. 낯익은 등산로,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라 눈 앞을 가로막는 ‘그때 그곳’이나 미지의 ‘어느 곳’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강영희,『금빛 기쁨의 기억』p.200)

산에 다녀왔다. 새해 첫날의 산. 새해 첫날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새해 첫날의 산은 시작을 의미하는 공간이었다.

내 기억속의 산은 풍요롭고 평화롭다. 그리고 활기가 있고 사람이 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밖으로만 나돌았다. 밖으로 나서면 밖에는 신나는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서는 뭔가가 신나는 일이 일어남을 나는 체득했다.

겨울이 되면 나는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눈이 온 날이면 눈의 밝은 빛에 마음을 빼앗겨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서 토끼 발자국이 있을 법한 야산으로 이어지는 밭을 헤매었고, 찬바람을 맞았다. 봄이면 동네 아이들과 나물을 캐러 나갔고, 어머니와는 진달래를 따러 산으로 갔다. 밖에 날씨가 좋고, 이미 아침밥을 먹었다면 집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몸이 근질거렸다는 편이 옳았다. 여름. 비 그치기를 기다려 버섯을 따러 나섰다. 가을. 밤을 주우러갔다. 다시 겨울. 새벽 산을 올랐다. 산에는 뭔가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어린시절을 보내다 보니 산은 내게 아주 친근한 존재가 되었다.

그 후에 산에 대해서 다른 각인이 하나 더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새해 첫날의 등산이다. 처음엔 뭔지 모르고 따라나섰다가 나중에는 의례 첫날에는 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같이 산에 가는 일행은 전주로 이사를 간 후 다니게 된 교회에서 만난 동기들과 선후배, 그리고 선생님이시다. 내가 산행에 따라 나선 것은 중학생이 되고서의 일일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일행을 중학생이상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그때쯤으로 기억할 뿐이다.

우리는 12월 31일 모여서 김밥을 쌌다. 이때부터 벌써 들뜨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날 새해 첫날 준비한 먹을 것을 싸들고 늘 오르던 모악산(전라북도 김제군과 완주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는 동안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눈다. 앞으로 다니게 될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올해 계획 등.

어떤 무리는 노래를 부른다. 그 중 기억나는 노래는 ‘사랑가’이다. 어느 한 녀석의 입에서 나와서 같이 가는 일행이 가담하여 부른 노래.
‘사랑, 사라~앙. 명수는 내 친구, 내사랑.
김명수는 내 친구 내 몸과 같이 사랑하리~’
이 노래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의 한 구절인데, 한 부분만을 떼어서 불렀다. 그 일행들은 사람 이름 들어가는 부분에 동기들의 이름을 하나씩 넣어서 불렀다. 그리고 나서는 후배, 선배, 선생님. 아는 사람들 이름을 모조리 넣어서 나지막하고 조그맣게 계속 불러댔다. 산의 입구쯤부터 시작한 노래는 중간 휴식지까지 다 다가도록 계속되었다.

그럴만도 하였다. 중고등학생, 그 시절의 친구란 모든 것이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 몇 년을 같이 자라온 한 형제나 다름없었다. 친구 놈이 무엇을 잘하는지, 성격이 어떤지, 무엇을 원하지는지, 현재의 고민이 무엇인지 자신만큼이나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어울려 엉켜서 산에 올랐다. 1월 1일의 산은 때론 추웠고, 때론 따뜻했고, 때론 눈이 많이 쌓여있었다. 서로 손을 잡아주고, 옆에 놈이 메었던 기타를 받아서 메고, 친구놈이 나무아래를 지나갈 때 눈을 떨구어서 골려주며 그렇게 올랐다. 점심을 먹을 장소에 다다르면 한껏 열기가 올라 땀이 흘렀다. 겉옷 하나를 벗으면 가마솥 뚜껑을 연 것마냥 김이 올랐다. 땀을 잠시 식히고 전날 싼 김밥을 먹었다.

그리곤 다시 정상을 넘어서서는 그 옆에 조금 떨어진 헬기착륙장에 동기랗게 모여섰다. 우리는 동기랗게 모여서서 첫날의 예배를 드리고, 새해의 각오를 마음속에 다졌고, 전주 시내가 보이는 쪽으로 돌아서 함성을 내질렀다. 조용하고 엄숙한 시간을 잠시 가진 후에 우리는 신나게 뛰고 놀았다. 그리곤 우리처럼 산에 오른 다른 일행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고 하산을 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어제의 산행에서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것을 기대했었다. 첫날의 산행은 그런 것이라고 각인이 이루어져있었기 때문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서도 어울어짐이 만들어질것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잘못된 것이었다. 기대와 각인은 내게만 있는 것이었다.

산으로 가는 입구에서 나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산에 같이 가자고 공고를 한 나로서는, 내가 올린 글을 읽고 나타날 사람이 있지나 않을까하고 기다렸다. 공고한 시간이 다 되어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 나는 돌아서야 했었다. 날씨가 너무 춥다는 것은 좋은 핑계가 되는 데, 겨울이니까 추운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몇시간 동안 산을 오르는 동안 나도 모르는 새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혼자서 잡아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올해는 어떻게 보내지?’하며 스스로 에게 물었지만 집중을 할 수 없었다. 큰 것 하나 잡아두고는 제자리였다. 가파른 길에 숨을 몰아쉬다가 생각이 끊기기 일쑤였다. 혼자가 걷는 길은 어디에서 쉬고 어디에서 속도를 내야할지 잘 알지 못한다. 걸음은 자꾸 늘어졌다. 어느 덧 정상을 돌아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제법 평평한 길에 들어섰을 때, 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산성을 돌아서 내려오는 코스에서는 서울의 시내가 보였다. 삶으로 돌아가면 이런 것들을 해보리라 다짐도 해 보았다. 진달래 능선을 지날 때는 다시 과거에 묻히기도 했다.

산에서 벗어나 시내버스를 탓을 때, 혼자한 산행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산은 내게 특별했다. 특히 새해 첫날의 산행은 더욱 특별했다. 그것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은 그 안에 같이 한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계라는 것.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같이 한다는 것. 같이 하고 싶다는 것. 산행.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와 같이 한다는 것. 더 알고 싶은 어떤 존재와 같이 한다는 것. 그것이 첫날의 산행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같이 등산을 하고 싶어했던 이들과는 아직은 공통된 기억이 적다. 관계라는 끈이 아직은 가늘다. 김밥만 보면 그 사람이 생각난다거나, 혹은 눈이 다져진 산길을 걸을 때면 누구가 생각난다던가 하는 것들을 지금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도 원하던 것이 한무더기 빠져버린 산행이었지만 어쨌든 누군가를 몹시도 끌어당기고 싶어하고 같이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확인한 산행이었다.

새해 첫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흥얼거리는 노래 속에 들어 있는 관계. 차곡차곡 쌓아지는 관계를 갖고 싶어졌다.

내 공간취향이라는 것, 그곳은 온기가 있는, 눈빛이 있는, 사람이 있는 공간이다. 재잘거림과 침묵을 같이 나눈 사람이 있는 공간이라면 어떤 공간이든 내 의식에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공간으로 각인될 것이다.
IP *.198.168.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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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1.03 23:34:31 *.70.72.121
새해 첫 산행 홀로라서 더 좋지 않았을까? 올해도 변함없이 꿋꿋하게 잘 살아내길, 늘 따스한 군불 지피듯 넉넉한 마음으로 채우면서.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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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1.05 07:45:45 *.72.153.12
언니도 올 한해 화이팅!!!

당일 빵구 내면 난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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