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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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학년제 인문독서] 12. 식탁에서 시작하는 인문고전
자유학년제를 맞이한 중학생 자녀와 인문고전을 온 가족이 함께 읽고 나누는 이야기를 편지로 드리고 있습니다. 열두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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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학교 교육은 학생들에게 등급을 부여한다. 갑돌이는 1등급, 갑순이는 3등급이란다. 소나 돼지에게 등급을 매기는 이유는 등급에 따라 차별적인 가격을 받기 위해서다. 3등급 고기는 1등급 고기에 비해 저렴하다. 학생들에게 등급을 매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3등급 갑순이가 1등급 갑돌이보다 값이 적게 나간다는 뜻인가?
인간은 하나의 우주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존재다. 나는 내 자녀들이 자기 자신을 우주로 여기길 바란다. 자기 자신이 별처럼 귀중하다는 사실을 어떤 순간에서도 잊지 않길 바란다.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자신의 길을 가길 원한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인문고전과 친구로 지내길 원한다. 인문고전을 통해 인류의 지혜를 밝혀온 구루들과 친구처럼 지내길 원했다.
장자(莊子)는 쓸모없음의 쓸모를 강조했다. 땅은 넓지만 사람들이 걸을 때 쓰는 땅은 발로 밟는 부분뿐이다. 만일 발로 밟는 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깎아 절벽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과연 그런 땅을 쓸 수 있겠는가? 쓸모없는 부분이 있어야 쓸모가 생긴다. 장자의 무용지용 (無用之用)은 인문고전의 쓸모를 설명할 때 딱 들어맞는다. 인문고전을 읽으며 자란 영혼은 세상이 자신에게 어떤 등급을 매기더라도 자신의 영혼 저 깊은 곳에서 흔들리지 않는 안식처를 찾아낼 것이다. 마음껏 질주할 수 있는 광활한 대지와 푸른 하늘을 자신의 영혼에서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발바닥을 땅에 디디고 살아야 하는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얼마든지 달릴 수 있고 날아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인문고전을 함께 읽고 나누는 배움의 공동체는 가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세상이 어떤 소리를 하더라도 자녀를 대하는 부모는 등급과 순서보다 가치와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다. 인문고전 읽고 나누기를 식탁에서 시작하자.
가정에서 인문고전 읽고 나누기 방법을 5단계로 구조화 했다.
1단계 : 청소년이 읽기 좋게 재편집된 인문고전을 찾는다. 책 찾는 과정을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가족 모두 함께 참여한다. 도서관과 헌책방을 가족과 함께 순례한다.
2단계 : 집에 인문고전을 깔아 놓는다. 방과 거실, 손닿는 곳마다 책으로 도배하는데, 가장 집중할 곳이 식탁이다.
3단계 : 자녀에게 시간을 주고 기다린다. 절대 강요해서는 안 된다. 기다린다. 자녀가 여러 인문고전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특정 책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일 것이다.
4단계 : 가족 토론 시간을 정한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주말 저녁이 좋다. 토론 주제로 삼을 책을 선정해야 하는데, 일단 자녀가 최근에 어떤 책을 읽었는지 물어 본다. 자녀가 관심을 보인 인문고전이 있다면 그 책으로 정한다. 이제 토론 전까지 엄마와 아빠도 선정한 책을 읽고 공부한다. 자녀가 읽은 청소년 버전으로 읽어도 좋지만 전문가가 해설한 책도 좋다. 인터넷 검색은 기본이다. 자녀 덕에 부모가 공부하는 거다.
5단계 : 미리 약속한 시간에 식탁에 모여 가족 토론을 진행한다. 책을 읽으며 자신이 느낀 것, 생각한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좋은 점, 싫은 점, 공감 가거나 가지 않는 점 등등 무엇이든 좋다. 토론한 내용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긴다.
가장 중요한 건 책 선택권을 자녀에게 주는 거다. 인문고전을 재미난 놀이터이자 영혼을 채우는 에너지원으로 여기게 하려면 자녀가 인문고전을 고르게 하자. 부모가 지속적으로 가족 토론 책을 선택하면 토론은 놀이가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자녀는 인문고전을 짊어져야 할 짐 덩어리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크다.
때때로 자녀와 함께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부모는 자녀가 읽기 좋게 재편집한 책을 찾아야 한다. 나에게 ‘열하일기’가 그랬다. 고미숙 선생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를 우연히 읽었다. ‘박지원’이라는 인물과 ‘열하일기’라는 고전에 관심이 생겼다. 팟캐스트에서 고미숙 선생의 박지원 관련 강연을 찾아 들었다. 관련도서로 강명관 교수의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을 찾아 읽었다. 조선후기에 이미 탈근대를 모색한 지식인 ‘인간 박지원’에 반했다. 허균의 '홍길동전'이 보여준 상상력도 멋지지만 '열하일기'에 담긴 박지원의 '허생전'은 또 다른 현실인식과 상상력의 결정체였다. 감동에 젖어 어떻게든 가족 모두와 열하일기와 박지원을 함께 읽고 나누고 싶었다.
청소년용으로 재편집한 열하일기를 찾아 인터넷을 폭풍 검색했다. 도서관에서 청소년용 열하일기를 모조리 찾아 비교했다. 여러 출판사의 여러 작품이 있지만, 내 마음에 가장 드는 건 채우리 출판사의 <열하일기>(박교영 글, 박수로 그림)였다. 그림의 완성도와 내용 구성이 만족스러웠다. 몇 번을 고민했지만 결국 구입했다. 책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두 딸들 모두 책장에 얼굴을 들이밀고 읽었다. 다음 번 가족토론으로 <열하일기>를 해보고 싶다. 더불어 채우리 출판사의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시리즈를 이모저모 훑어보았다.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 기회가 된다면 이 시리즈를 중심으로 가족과 문학 토론을 해보고 싶다. 문제는 책을 구입할 비용 마련이다. 머리를 좀 더 굴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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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 함께 인문고전 읽고 나누는 이야기, 2019년에도 힘차게 이어집니다.
유형선 드림 (morningstar.y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