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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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석은 교통사고로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한정화는 편찮은 아버지의 소식에 마음을 졸이고, 신종윤은 좀처럼 없던 부부싸움에 가슴이 답답합니다. 박승오는 유리병에 머리를 맞아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한 해를 순조롭게 보낸 연구원은 별로 없는 듯 합니다. 묵은 것을 내보내고 새것을 다짐하는 그 평온해야 할 순간에도 삶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엎어지고, 깨지고, 마음졸이고, 울고불며 한바탕 해야 한 해를 겨우 건너게 해 줄 모양입니다. 우리가 과연 삶을 주관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일까요?
간만에 송년회에 갔습니다. 평소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술자리는 거절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대학원 동기들이 모인다기에 갔습니다. 경영대학원의 동기들의 얼굴을 하나둘 떠올려 호감도를 가늠해 보면 ‘중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말입니다. 그 두 그룹을 나눈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순수한가, 그렇지 않은가?’ 이지요.
경영학과라서 그랬을까요? 공대에 있을때와는 사람들이 많이 달랐습니다. 좋은 동료들이었지만 ‘친구’ 라고 하기엔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순수함. 나중에야 그것이 순수한 마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웃으며 속으로 독하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유창하게 내뱉는 말들에 지식은 있지만 마음은 없었습니다. 결국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 물질을 쫓고 여자를 쫒고 성공을 쫓아 ‘사는게 다 그런 것’ 이라던 동료들, 나는 그들이 싫었습니다.
그 후배는 그런 부류였습니다. 결혼한지 이제 갓 일년을 넘겼을텐데 입만 열면 ‘애인 구하기’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항공사에 취직한 동기 형에게 스튜어디스와의 미팅 주선을 졸라댑니다. 제게도 자꾸 헌팅하러 가자며 농담아닌 농담을 해 댑니다. 조심조심 이야기하면 참을만 할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떠벌려댑니다. 지각있는 동기들은 웃어 넘기지만 속으로 꾸욱 참는 듯 합니다.
술자리가 파하고 남자 셋만 남은 자리에서 그가 나에게 또 한번 ‘여자를 꼬셔서 어떻게든 해보자’ 고 제안합니다. 바람기 있어 보이는 제 외모 때문인가 봅니다. 녀석에게 정색을 하며 그러면 안된다고 말했지요. 그런데도 분위기 파악을 못한 후배는 ‘알면서 선수끼리 왜 그러냐’고 몇 번을 삐딱하게 이야기했고, 결국 못말리는 제 정의감(?)이 사고를 냈습니다. 후배의 뺨을 한대 치며 소리를 지른 것이지요.
위협을 느낀 후배는 홧김에 소주병을 책상 모서리에 부딪혀 깨었습니다. 휘두를만한 위인은 못되었지요. 그것은 그냥 객기였습니다. 그는 이내 팽개치고는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싸움을 말리던 다른 후배가 화가 났습니다. 술이 많이 취한 상태에서, 깨진 소주병을 보고 아마 자극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손에 잡히는 무언가로 저를 쳤나 봅니다.
기억들이 토막토막입니다. 무언가 둔탁한 것에 맞았고, 머리가 뜨끈뜨끈했습니다… 바닥을 헤집다가 눈을 떠보니 온통 피투성이입니다… 아랫층으로 겨우 내려가 “경찰을 불러달라” 고 하다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앰블런스에서 ‘꽉 눌러’라고 명령하는 듯한 목소리… 볼을 타고 흐르는 역겨운 피의 비린내… ‘아, 이제 죽는구나’ 하는 왠지 초연한 목소리… 무심결에 떠오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 응급실 의사의 다급한 목소리와 찢어지는 듯한 통증… 어느새 저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1곰곰히 생각합니다. 10분전, 그러니까 사건 발생 10분전만 해도 아주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모두 행복해하는 가운데 불행의 씨앗이 있으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단지 속물 근성의 후배와 감정적인 제 성격, 술 버릇이 좋지 않은 또 다른 후배의 조합이 이런 큰 결과를 필연적으로 잠재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우연의 역할이 너무 큽니다. ‘우연한 사고’라 말하지 않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초등학교 조회시간에 운동장을 걷다가 누군가 던진 돌에 맞아 눈을 심하게 다친 적도 있습니다. 그 날도 하늘이 맑아 기분이 아주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딜 보아도 위험은 없었습니다. 99년 겨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버스에 오르기 전까지 제 눈은 약간 침침할 뿐 멀쩡해 보였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보이지 않았습니다.
살면서 때로 어쩔수 없는 사건들이 와락 품 안으로 뛰어들 때가 있습니다. 예고라도 해 주면 좋을 것을, 사고 직전의 세상은 늘 언제나 일상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이 짧은 사건을 길게 늘여보면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죽음 또한 예고없이 찾아올 것이고, 그 때에도 저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를 모르겠지요.
일장춘몽(一場春夢). 인생이 한낮 긴 꿈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있습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태어나면 죽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고없이 죽습니다. 예고가 없다는 것 – 그것이 삶을 안타깝게 합니다. 허망하게 느껴집니다. 답답한 마음에 사부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어찌 그런 험한 일이 생겼느냐 ?
별탈은 없을 것이다. 걱정하지마라.
할 일이 있어 세상에 온 것이니 그 일을 마치기 전에는 탈이 없을 것이다.
일상의 행복은 아주 작은 것들에 의지한다. 아슬아슬한 것, 블완전한 것이 가엾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작은 고양이에게 애정이 가는 것은 작고 어리기 때문이다. 매일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이 어린 것들이다. 그 불완전함이 사랑스럽지 않으냐 ?
불완전한 것은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무릎을 깨고 자빠져 피를 흘리지 않더냐.
삶은 가냘프기 때문에 아름답고, 죽음은 늘 가까이 있기에 삶의 일부인 것이다.
살아있음, 이 임시성, 이 사라짐, 이 불완전성을 느끼지 못하면 살아있음의 황홀을 알기 어렵다.”
할 일을 마치기 전에는 탈이 없을 것이다. 사부님의 이 한마디 말이 이상하게도 크게 힘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테잎으로 강의를 접했던 채규철 선생님의 ‘ET 얼굴’입니다. 그 또한 ‘사명을 다하기전까진 죽지 않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많이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서울의 한 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하여 농촌으로 내려가 어린아이들을 가르키는 풀무학원에서 5년간 농촌운동을 했습니다. 그 후 덴마크정부의 초청으로 건너가 국비장학생으로 1년간 공부를 하고 귀국해서 농촌운동을 계속하려고 하던 중에 불의의 사고를 맞게 되었지요.
신나(thinner)를 실은 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전복되 불이 났던 것입니다. 그는 차에서 빠져나왔지만 못나오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을 위해 불길로 다시 들어가 한명을 구출해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동안 전신에 화상을 입어 귀와 한쪽눈을 잃었고 두손은 갈고리처럼 오그라들었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ET'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머리칼을 떼내 눈썹을 심고, 어깨 피부를 떼내 눈꺼풀을 만들었습니다. 속눈썹은 겨드랑이 털로, 입술은 가슴 피부로, 오른쪽 눈은 의안을 박았습니다. 그때 나이가 32살. 지금의 저와 비슷한 나이입니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2년후 아내마저 하늘나라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농촌 운동에 대한 꿈이었고, 대안교육에 대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는 86년부터 경기 가평에 천막을 치고 대안학교인 두밀리자연학교를 열어 주말이면 전국의 어린이들을 모아 자연학습을 시켰습니다. 교육방침이 별납니다. `맛있게 먹고, 즐겁게 놀고, 달콤하게 자자`. 이곳의 아이들은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고, 감자를 삶아 먹고, 밤이면 모닥불을 피우고 별자리를 찾다 잠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13평 아파트를 개방하여 어린이 도서관 운동도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비문제를 위해 민간 의료보험의 효시격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간실환자들을 위한 장미회를 꾸렸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납니다. 이것은 하늘의 준엄한 철칙이죠. 중요한 것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나기전에 뭔가를 남겨둬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세상에 남겨둬야 할까요? 멋진 예술작품은 어떨까요? 놀라운 과학적 업적은? 그것들은 훌륭한 유산일 수는 있지만 가장 위대한 유산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스토리입니다. 어떠한 현실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이겨내서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것 입니다. 저는 그것이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2006년 12월,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할 일을 다 하였습니다. 신은 그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훌륭한 스토리였고,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그의 삶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몇일 지나면서 생각해보니 감사한 일들이 많습니다. 다행히 그 날 구급차가 빨리 도착했습니다. 서른 바늘을 꿰멨지만 얼굴에는 큰 상처가 없습니다. 눈에서 출혈이 있었지만 시력은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사려깊은 형사 덕분에 후배의 죄질을 낮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전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래요. 전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겐 할 일들이 있습니다. 청년들에게 삶의 방향을 잡도록 도와 주는 것. 학교를 바로 서게 하는 것. 성인들이 매일 조금씩 꾸준히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마 신은 그것을 위해 저를 이곳에 보내셨나 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기 전엔 숨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에 오랜만에 가슴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진실로, 세상에 이것만큼 감사해야 할 일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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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사고 뒷처리와 합의 때문에 댓글이 늦었습니다.
한명석 선생님, 도윤이형, 호정이누나.
걱정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이제 괜찮습니다. 실밥도 뽑았고, 충혈된 눈도 나름 봐줄만하게 안정되었어요. 괜히 글을 실감나게(?) 써서 더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써니누나. ㅎㅎ 후배도 꿈벗을 언젠간 해야겠지요. 이번일로 느끼는게 많았을겁니다. 작은 터닝포인트가 되겠죠. 후배 철 좀 들면 데려오려구요.
모모누나. 다시 태어나니 좋다. 누나 이번에 많이 챙겨줘서 고맙다. 누나 아플때 죽쒀서 갈께. 말만 하라구.
신웅아. ㅎㅎㅎ 이번에 4기 연구원 지원 안하니? 공지글 보고 움찔움찔 했으리라 생각된다만.. ㅋㅋ
승완형. 때린데 또 때리면 안돼지. 형이 요즘 좋아보여 다행이다.
은남누나. ㅋㅋㅋㅋ 누나 말씀이 젤 위로가 되네요. 파티 또 해요! 그날 너무 재미있었어요. 누나의 그 '까만 밥'이 너무 그립습니다. 누나, 항상 동생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정화누나. 그러게요. 전화할때마다 제 목소리가 너무 밝았던지 사람들이 별일 아닌줄 알더라구요. 아 못말려.
명수 형님, 잘 알겠습니다. 괜히 멀리있는 형까지 걱정시켰네요. 서울로 오셨나요? 형 다음번 연구원 모임때 오셔서 이런저런 말씀좀 해주세요! 3기들은 선배님들의 조언이 고파요.
한명석 선생님, 도윤이형, 호정이누나.
걱정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이제 괜찮습니다. 실밥도 뽑았고, 충혈된 눈도 나름 봐줄만하게 안정되었어요. 괜히 글을 실감나게(?) 써서 더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써니누나. ㅎㅎ 후배도 꿈벗을 언젠간 해야겠지요. 이번일로 느끼는게 많았을겁니다. 작은 터닝포인트가 되겠죠. 후배 철 좀 들면 데려오려구요.
모모누나. 다시 태어나니 좋다. 누나 이번에 많이 챙겨줘서 고맙다. 누나 아플때 죽쒀서 갈께. 말만 하라구.
신웅아. ㅎㅎㅎ 이번에 4기 연구원 지원 안하니? 공지글 보고 움찔움찔 했으리라 생각된다만.. ㅋㅋ
승완형. 때린데 또 때리면 안돼지. 형이 요즘 좋아보여 다행이다.
은남누나. ㅋㅋㅋㅋ 누나 말씀이 젤 위로가 되네요. 파티 또 해요! 그날 너무 재미있었어요. 누나의 그 '까만 밥'이 너무 그립습니다. 누나, 항상 동생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정화누나. 그러게요. 전화할때마다 제 목소리가 너무 밝았던지 사람들이 별일 아닌줄 알더라구요. 아 못말려.
명수 형님, 잘 알겠습니다. 괜히 멀리있는 형까지 걱정시켰네요. 서울로 오셨나요? 형 다음번 연구원 모임때 오셔서 이런저런 말씀좀 해주세요! 3기들은 선배님들의 조언이 고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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