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素田 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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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사무실에서 개최하는 워크숍에 다녀왔다. 국학원 이병택 팀장님의 위대한 대한민국이란 주제로 특강을 들었다. 강사님은 칠판에 931이라는 숫자를 커다랗게 쓰면서 무슨 뜻인지 맞춰보라고 질문을 하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에 팀장님은 국사교과서에 나와 있는 우리나라가 외침을 받은 횟수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반만년 길이 빛나는 역사를 이어오면서 900번이 넘는 외침을 막아낸 위대한 민족정신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931회의 외침은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닌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의도적으로 외곡된 것이라고 하였다. 외침이 많은 약하기 그지없는 우리나라 대일본 제국이 보호를 해주어야 하고 천황의 황은에 감사해야 한다는 논리를 깔고 있다고 한다. 실제 전 국토가 전쟁의 영향아래 들어갔던 것은 겨우 20번 내외이고 931회는 노략질, 사소한 국경분쟁 등 잡다한 것을 모두 포함한 부풀린 숫자라는 것이다.
아울러 무궁화에 대한 설명도 길게 해주셨다. 이름도 고운 약 100여종의 무궁화의 모습과 뜻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가 왜 이리 짧은 키에 벌레가 많이 먹을까 하는 의구심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실제 무궁화는 2,000개 이상의 꽃을 피워내는 강한 나무로 키도 근 2m까지 자란다고 한다. 우리가 보아왔던 키 작은 무궁화도 윗대를 베어버리는 일본의 얄팍한 농간이 있었다고 한다. 국민성을 개조하기 위하여 역사서를 모두 불태웠으며, 황국신민화라는 철저한 계획에 의하여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전통을 말살시켜왔다고 하였다. 역사를 비롯하여 문학, 민간전통 등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문득 강영희씨가 쓴 금빛기쁨의 기억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하나의 단절로, 기억상실증이라는 정신질환으로 표현을 했다. 사대와 사대주의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중국이라는 대국을 무조건 따르고 조공을 받치고 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에 둘러싸인 조선의 외교술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야나기라는 한 일본학자가 쓴 조선예술의 아름다움을 보고 훈장까지 추켜세운 것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당연하게 틀린 사실을 사실처럼 믿고 있을까? 해방 후 50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친일파의 재산문제로, 국정교과서에도 사실이 아닌 내용을 배우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로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신토불이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인정에만 집착한 편협한 상술이 판치고 있고, 우리 것이라는 고립된 틀에 가두려고만 하였다. 우리들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고 계승, 발전시킬 수 있었음에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커다란 음모에 겨우 한다는 것이 과장된 역사 사극을 통해 만해하려는 모습도 얼핏 보인다. 지난해 추석 명절 때 고향이 서산인 관계로 부석에 있는 삼존마애석불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관리인도 없고, 곰팡이에 쓰러져 가는 초라한 건물을 보고 과연 우리가 한국인의 미소라는 석불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이어질 수 있을까? 삼존마애석불을 찾아가기 위해서 계곡 속으로 이어지는 음식점들의 북적임과 석불의 썰렁함이 대비되었다. 여전히 미소는 띠고 있으나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준엄한 호통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삼년 전에 일본의 구마모토 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충청남도와 교류를 하였고, 상호 관광사업 발전을 위한 시찰단 일행으로 갔었다. 구마모토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하고 일본도 정벌할 것이라는 소문으로 600년대 말경에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실제 지금 남아있는 것은 구운 기와조각 몇 개와 불에 탄 나무가 전부라고 한다. 3층이 넘는 다양한 박물관에서 가장 귀중하다고 모셔놓은 것이 바로 남이 있는 기와였다. 온전치 못한 기와 몇 장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었다. 야나기의 조선문화 예찬 뒤에 교묘한 암수를 숨겨놓은 것과 구마모토 주민들의 문화재에 대한 병적인 애착, 그리고 방치되고 있는 삼존마애석불의 모습에서 답을 찾게 되었다. 혹 이런 분열 또한 일본이 깔아놓은 복선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분명하게 잘못된 점을 알고 다시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강영희는 산타마리에서 새로운 문화 창조에 대한 빛을 찾은 것 같았다.
“동방견문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산타마리아 델타 살루테에서 본 바다, 문화 창조란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미지(未知)의 유토피아를 향해 걸어 나가는 자들의 것임을 실감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문화란 창조적인 것이며, 그 같은 창조의 빛은 세계성이라는 ‘큰 나’안에서 토속성이라는 ‘작은 나’들이 부싯돌과 같이 부딪힐 때, 그 부딪힘의 섬광 속에서 피어난다.”
조급함과 패배주의가 아닌 우리 것을 되살리려는 노력과 우리 것에만 치우치지 않는 개방성이 필요할 때라고 본다. 백남준과 정선, 김정희 등 역사 속에서 조상들이 보여준 것은 당 시대의 번쩍이는 섬광을 일으키기 위하여 자신을 극복한 하나의 생생한 증거라고 본다. 모순을 극복하는 힘, 나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극복하는 DNA가 우리 민족의 저력이 있다고 본다. 기억의 저편에 숨어있는 어둠이 창조의 빛에 의하여 환하게 빛날 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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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무궁화에 대한 설명도 길게 해주셨다. 이름도 고운 약 100여종의 무궁화의 모습과 뜻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가 왜 이리 짧은 키에 벌레가 많이 먹을까 하는 의구심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실제 무궁화는 2,000개 이상의 꽃을 피워내는 강한 나무로 키도 근 2m까지 자란다고 한다. 우리가 보아왔던 키 작은 무궁화도 윗대를 베어버리는 일본의 얄팍한 농간이 있었다고 한다. 국민성을 개조하기 위하여 역사서를 모두 불태웠으며, 황국신민화라는 철저한 계획에 의하여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전통을 말살시켜왔다고 하였다. 역사를 비롯하여 문학, 민간전통 등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문득 강영희씨가 쓴 금빛기쁨의 기억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하나의 단절로, 기억상실증이라는 정신질환으로 표현을 했다. 사대와 사대주의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중국이라는 대국을 무조건 따르고 조공을 받치고 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에 둘러싸인 조선의 외교술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야나기라는 한 일본학자가 쓴 조선예술의 아름다움을 보고 훈장까지 추켜세운 것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당연하게 틀린 사실을 사실처럼 믿고 있을까? 해방 후 50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친일파의 재산문제로, 국정교과서에도 사실이 아닌 내용을 배우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로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신토불이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인정에만 집착한 편협한 상술이 판치고 있고, 우리 것이라는 고립된 틀에 가두려고만 하였다. 우리들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고 계승, 발전시킬 수 있었음에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커다란 음모에 겨우 한다는 것이 과장된 역사 사극을 통해 만해하려는 모습도 얼핏 보인다. 지난해 추석 명절 때 고향이 서산인 관계로 부석에 있는 삼존마애석불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관리인도 없고, 곰팡이에 쓰러져 가는 초라한 건물을 보고 과연 우리가 한국인의 미소라는 석불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이어질 수 있을까? 삼존마애석불을 찾아가기 위해서 계곡 속으로 이어지는 음식점들의 북적임과 석불의 썰렁함이 대비되었다. 여전히 미소는 띠고 있으나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준엄한 호통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삼년 전에 일본의 구마모토 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충청남도와 교류를 하였고, 상호 관광사업 발전을 위한 시찰단 일행으로 갔었다. 구마모토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하고 일본도 정벌할 것이라는 소문으로 600년대 말경에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실제 지금 남아있는 것은 구운 기와조각 몇 개와 불에 탄 나무가 전부라고 한다. 3층이 넘는 다양한 박물관에서 가장 귀중하다고 모셔놓은 것이 바로 남이 있는 기와였다. 온전치 못한 기와 몇 장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었다. 야나기의 조선문화 예찬 뒤에 교묘한 암수를 숨겨놓은 것과 구마모토 주민들의 문화재에 대한 병적인 애착, 그리고 방치되고 있는 삼존마애석불의 모습에서 답을 찾게 되었다. 혹 이런 분열 또한 일본이 깔아놓은 복선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분명하게 잘못된 점을 알고 다시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강영희는 산타마리에서 새로운 문화 창조에 대한 빛을 찾은 것 같았다.
“동방견문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산타마리아 델타 살루테에서 본 바다, 문화 창조란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미지(未知)의 유토피아를 향해 걸어 나가는 자들의 것임을 실감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문화란 창조적인 것이며, 그 같은 창조의 빛은 세계성이라는 ‘큰 나’안에서 토속성이라는 ‘작은 나’들이 부싯돌과 같이 부딪힐 때, 그 부딪힘의 섬광 속에서 피어난다.”
조급함과 패배주의가 아닌 우리 것을 되살리려는 노력과 우리 것에만 치우치지 않는 개방성이 필요할 때라고 본다. 백남준과 정선, 김정희 등 역사 속에서 조상들이 보여준 것은 당 시대의 번쩍이는 섬광을 일으키기 위하여 자신을 극복한 하나의 생생한 증거라고 본다. 모순을 극복하는 힘, 나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극복하는 DNA가 우리 민족의 저력이 있다고 본다. 기억의 저편에 숨어있는 어둠이 창조의 빛에 의하여 환하게 빛날 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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