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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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들이 주욱 앉아있다. 긴장감이 돈다. 시험인가?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자꾸 갔다. 10시에 시작된 시계는 벌써 25분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아직 한 자를 못 쓰고 있다. 머릿속이 여전히 뒤죽박죽이다. 저 앞에 은남 언니와 소라 언니는 시작 시간부터 줄곧 팔을 열심히 놀리고 있다. 좋겠다. 쓸 거리가 뿜어져 나오나보다. 난 뭘 써야 하지. 시간은 자꾸 가고 마감시간은 다가오는데, 난 아직 무엇을 써야 할 지 모르겠다.
초조해지고 불안하다. 이렇게 시간에 쫓기다 보면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도망치고 싶다. 확 포기해버릴까. 아냐, 그럴 수는 없어. 포기라니. 하지만 이런 상태가 싫다. 무언가에 쫓기면서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못하는 이런 상태. 초조와 불안이 짜증과 섞여 엄습하는 상태. 이것에 잡아먹힐 거 같은 기분. 싫다. 정말. 어쩌지.
‘아, 꿈이구나. 다행이다.’
꿈이었다. 나는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든다. 방금 전에 불편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상하려는 듯 다시 잠을 청한다. 그런 꿈은 이제 그만이라고 하면서. 이제 보니, 오늘 연구원 과제를 해서 올려야 한다.
나는 지금 글쓰기가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토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꿈을 분석해보자는 것도 아니다. 연구원 과제에 대한 어려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나의 심리 상태에 주목하고 있다.
나의 꿈에서는 이런 패턴의 경우가 많다. 시간에 쫓기고 지각하는 꿈. 실제 누군가가 날 쫓아오는 꿈. 그러면서 몸에 꽉 끼고 좁고 답답한 통로를 빠져나가야 하는 꿈. 다시 시험 보는 꿈. 그 시험에서 뭔가가 또 안 되려는 듯한 불안함. 안절부절함.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앞에 입이 떨어지지 않은 채로 서 있는 나의 모습.
나는 꿈이 당사자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모른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꿈의 해석이라고 나와 있는 것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을 두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반복되는 꿈의 패턴에서 나의 상태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혹시 꿈이 내가 애써 부인하려는 감정들을 나타내는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불행?이도 그러한 듯하다. 초조나 불안, 답답함, 막막함, 자신 없음 등의 감정은 계속 갖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삶이 아닌 삶을, 본성에 거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되는데, 이것이 10년 20년 이어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 지 모르겠는 막막함. 용기 없음. 모순 가득한 인간관계. 도대체 정리가 되지 않는 혼돈.
한편 부인하고 감추려고도 한다. 알고 있으나 대면하지 않으려 한다. 왜 그랬을까?
다른 사람들이 안 좋게 볼까봐, 평가가 두려워서 신경쓰여서 그랬다. 누가 ‘어떠해야 하지 않겠니?’ 하면 ‘네. 그렇죠. 그래야 되나봐요.’ 쉽게 동조했다. 어두워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 내면의 소리가 뭐라 하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눌러버렸다. 안 좋게 평가될 것 같은 반응은 미리 차단했다.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거 같아 지레 겁을 먹어서 그랬다. 어떤 결정으로 인한 알 수 없는 파급효과를 두려워했다. 무엇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지 내 행동에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 ‘네. 그렇게 해야 하나봐요.’ 그냥 그러면 되겠지 했다. 그냥 전처럼 흘러가겠지 했다.
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포장하였다. 몇 일 몇 시 까지 무엇을 해야 하니 한다. 엉망으로 하면 안되니, 그럴싸 해야 하니 조금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다. 하지만 당위성과 의무감으로 점철된 시간은 괴롭기 십상이다.
부모님과 가족이 바라는 바를 맞추어 주려니 그렇게 했다. 나는 명백히 원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했다. 판단이 혼란스러운 경우에는 가족이 제시하는 그것이 맞으려니 했다. 나를 사랑하는 그들이니 나도 그들을 사랑해야 했다.
어두운 상태에 계속 잊지 않기 위해서 아예 다른 일을 꾸민다. 친구들을 만나 의미 없는 수다를 떨기도 하고, 액션 영화를 연이어 보기도 한다. 집 앞 생태 공원 산책길을 한참 걷다 뛰다 한다. 확실히 기분 전환은 된다.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어두움은 어두움을 부르고 밝음은 밝음을 부르는가. 긍정적인 측면이 많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치유책은 아니다.
파커 파머는 타고난 본성, 본연의 자신을 ‘참자아’라고 한다. 참자아에 거스르는 시간이 계속되면 그 삶은 거짓된 삶이며 내적인 자기 파멸을 초래한다고 한다. 동감이다.
‘참자아, 이것은 우리를 우쭐거리게 부풀리고 싶어하거나, 또 다른 형태인 자기 왜곡으로 우리를 위축시키고 싶어하는 에고가 아니다.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허공을 떠돌고 싶어하는 지성도 아니며, 추상적인 규범에 따라 살기를 바라는 도덕적 자아도 아니다. 그것은 신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할 때 우리 안에 심어 놓은 바로 그 자아이다.’
이미 타고 났다. 이미 가지고 있다. 참자아는 덮으려고 해도 덮이지 않으며, 파괴하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전혀 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생래적인 그의 모습이다. 갖고 태어나는 그릇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참자아를 보지 못한다. 왜곡하고 부인하고 위축한다. 이것은 또 무슨 연유일까.
우리의 교육, 우리는 사회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도록 교육받는다. 그 기준에 만족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뒤떨어지고 낙오된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앞서 예를 들었듯이, 다른 사람의 평가가 두려워서, 인정을 받기 위해, 의무감과 당위성에, 현실적인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기타 등등의 여러 이유로 너무나 자주 참자아를 배반한다. 본인은 아니라고? 아니면 되었다. 하지만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참자아는 점점 미궁 속에 빠져 더욱 알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을 외부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주어진 현실에 대한 반응은, 자극에 대한 반응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과 물질, 우리 내적인 힘과 외적인 사건들의 복잡한 상호작용 안에서 살아간다. 외적 현실이 우리를 억압하는 주된 요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사회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억압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사실은 그 감옥을 만드는 일에 자기 자신이 공모했기 때문이다.’
외적 현실이 억압의 주 요인이 아니면, 내부의 원인이 주인가? 그렇게 말하기엔 조금 억울하다. 그러나 나 또한 ‘감옥 만들기’에 공모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필요이상으로 타인의 평가에 신경쓰고, 필요이상으로 매달리고. 필요이상으로 미리 겁먹고, 필요이상으로 의무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조이고...... 어느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하였는가.
그런데 나야말로 ‘자신의 감옥 만들기’에 단단히 빠져 있었던 듯 하다. 내가 그렇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었으니. 아니면 묵살하려 하였으니.
나는 어두워지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이 글도 어둡다면 어둡다. 그러나 계속 쓰고 있다. 전 같았으면 애써 밝은 곳으로 끌고 나오려 하거나, 일회성 자기 위안을 하거나, 일시적으로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아니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어두움과 밝음을 안 따지고 있다. ‘참자아’라는 것에 직면함을 집중할 뿐이다. 이는 여러 성격을 함께 띤다. 어두운 것만도 밝은 것만도 아니다. 취사선택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자기 기만일 수 있다.
‘쇠락과 아름다움, 어둠과 빛, 죽음과 삶은 상반되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숨겨진 온전함’의 역설 속에 함께 존재한다.‘
참자아를 찾아가는 여행. 그리고 직면. 이것이 어둡고 두렵고 험난해 보여도 이제 그것을 멈출 수 없다. 방법이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의 겨울은 실패, 배신, 우울증, 죽음 등 여러 가지 형태를 보인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들 모두가 주는 충고는 똑같다. “겨울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으면 겨울 때문에 미쳐버릴 겁니다.”’
무엇이 내 시야를 가리고 혼미하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두렵고 춥게 하는가. 동상에 걸릴 지 모른다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자. 몸을 보호해 줄만한 방한 장비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내면의 여행은 내가 하는 것이지만, 나를 지켜봐주고 응원하는 여럿이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용기를 존중해 주어라.
어려움이 있어도 갈 길은 하나다. 그 안으로 정면으로 대담하게 걸어 들어가라.
IP *.120.66.224
초조해지고 불안하다. 이렇게 시간에 쫓기다 보면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도망치고 싶다. 확 포기해버릴까. 아냐, 그럴 수는 없어. 포기라니. 하지만 이런 상태가 싫다. 무언가에 쫓기면서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못하는 이런 상태. 초조와 불안이 짜증과 섞여 엄습하는 상태. 이것에 잡아먹힐 거 같은 기분. 싫다. 정말. 어쩌지.
‘아, 꿈이구나. 다행이다.’
꿈이었다. 나는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든다. 방금 전에 불편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상하려는 듯 다시 잠을 청한다. 그런 꿈은 이제 그만이라고 하면서. 이제 보니, 오늘 연구원 과제를 해서 올려야 한다.
나는 지금 글쓰기가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토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꿈을 분석해보자는 것도 아니다. 연구원 과제에 대한 어려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나의 심리 상태에 주목하고 있다.
나의 꿈에서는 이런 패턴의 경우가 많다. 시간에 쫓기고 지각하는 꿈. 실제 누군가가 날 쫓아오는 꿈. 그러면서 몸에 꽉 끼고 좁고 답답한 통로를 빠져나가야 하는 꿈. 다시 시험 보는 꿈. 그 시험에서 뭔가가 또 안 되려는 듯한 불안함. 안절부절함.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앞에 입이 떨어지지 않은 채로 서 있는 나의 모습.
나는 꿈이 당사자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모른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꿈의 해석이라고 나와 있는 것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을 두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반복되는 꿈의 패턴에서 나의 상태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혹시 꿈이 내가 애써 부인하려는 감정들을 나타내는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불행?이도 그러한 듯하다. 초조나 불안, 답답함, 막막함, 자신 없음 등의 감정은 계속 갖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삶이 아닌 삶을, 본성에 거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되는데, 이것이 10년 20년 이어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 지 모르겠는 막막함. 용기 없음. 모순 가득한 인간관계. 도대체 정리가 되지 않는 혼돈.
한편 부인하고 감추려고도 한다. 알고 있으나 대면하지 않으려 한다. 왜 그랬을까?
다른 사람들이 안 좋게 볼까봐, 평가가 두려워서 신경쓰여서 그랬다. 누가 ‘어떠해야 하지 않겠니?’ 하면 ‘네. 그렇죠. 그래야 되나봐요.’ 쉽게 동조했다. 어두워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 내면의 소리가 뭐라 하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눌러버렸다. 안 좋게 평가될 것 같은 반응은 미리 차단했다.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거 같아 지레 겁을 먹어서 그랬다. 어떤 결정으로 인한 알 수 없는 파급효과를 두려워했다. 무엇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지 내 행동에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 ‘네. 그렇게 해야 하나봐요.’ 그냥 그러면 되겠지 했다. 그냥 전처럼 흘러가겠지 했다.
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포장하였다. 몇 일 몇 시 까지 무엇을 해야 하니 한다. 엉망으로 하면 안되니, 그럴싸 해야 하니 조금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다. 하지만 당위성과 의무감으로 점철된 시간은 괴롭기 십상이다.
부모님과 가족이 바라는 바를 맞추어 주려니 그렇게 했다. 나는 명백히 원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했다. 판단이 혼란스러운 경우에는 가족이 제시하는 그것이 맞으려니 했다. 나를 사랑하는 그들이니 나도 그들을 사랑해야 했다.
어두운 상태에 계속 잊지 않기 위해서 아예 다른 일을 꾸민다. 친구들을 만나 의미 없는 수다를 떨기도 하고, 액션 영화를 연이어 보기도 한다. 집 앞 생태 공원 산책길을 한참 걷다 뛰다 한다. 확실히 기분 전환은 된다.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어두움은 어두움을 부르고 밝음은 밝음을 부르는가. 긍정적인 측면이 많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치유책은 아니다.
파커 파머는 타고난 본성, 본연의 자신을 ‘참자아’라고 한다. 참자아에 거스르는 시간이 계속되면 그 삶은 거짓된 삶이며 내적인 자기 파멸을 초래한다고 한다. 동감이다.
‘참자아, 이것은 우리를 우쭐거리게 부풀리고 싶어하거나, 또 다른 형태인 자기 왜곡으로 우리를 위축시키고 싶어하는 에고가 아니다.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허공을 떠돌고 싶어하는 지성도 아니며, 추상적인 규범에 따라 살기를 바라는 도덕적 자아도 아니다. 그것은 신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할 때 우리 안에 심어 놓은 바로 그 자아이다.’
이미 타고 났다. 이미 가지고 있다. 참자아는 덮으려고 해도 덮이지 않으며, 파괴하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전혀 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생래적인 그의 모습이다. 갖고 태어나는 그릇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참자아를 보지 못한다. 왜곡하고 부인하고 위축한다. 이것은 또 무슨 연유일까.
우리의 교육, 우리는 사회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도록 교육받는다. 그 기준에 만족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뒤떨어지고 낙오된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앞서 예를 들었듯이, 다른 사람의 평가가 두려워서, 인정을 받기 위해, 의무감과 당위성에, 현실적인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기타 등등의 여러 이유로 너무나 자주 참자아를 배반한다. 본인은 아니라고? 아니면 되었다. 하지만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참자아는 점점 미궁 속에 빠져 더욱 알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을 외부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주어진 현실에 대한 반응은, 자극에 대한 반응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과 물질, 우리 내적인 힘과 외적인 사건들의 복잡한 상호작용 안에서 살아간다. 외적 현실이 우리를 억압하는 주된 요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사회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억압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사실은 그 감옥을 만드는 일에 자기 자신이 공모했기 때문이다.’
외적 현실이 억압의 주 요인이 아니면, 내부의 원인이 주인가? 그렇게 말하기엔 조금 억울하다. 그러나 나 또한 ‘감옥 만들기’에 공모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필요이상으로 타인의 평가에 신경쓰고, 필요이상으로 매달리고. 필요이상으로 미리 겁먹고, 필요이상으로 의무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조이고...... 어느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하였는가.
그런데 나야말로 ‘자신의 감옥 만들기’에 단단히 빠져 있었던 듯 하다. 내가 그렇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었으니. 아니면 묵살하려 하였으니.
나는 어두워지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이 글도 어둡다면 어둡다. 그러나 계속 쓰고 있다. 전 같았으면 애써 밝은 곳으로 끌고 나오려 하거나, 일회성 자기 위안을 하거나, 일시적으로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아니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어두움과 밝음을 안 따지고 있다. ‘참자아’라는 것에 직면함을 집중할 뿐이다. 이는 여러 성격을 함께 띤다. 어두운 것만도 밝은 것만도 아니다. 취사선택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자기 기만일 수 있다.
‘쇠락과 아름다움, 어둠과 빛, 죽음과 삶은 상반되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숨겨진 온전함’의 역설 속에 함께 존재한다.‘
참자아를 찾아가는 여행. 그리고 직면. 이것이 어둡고 두렵고 험난해 보여도 이제 그것을 멈출 수 없다. 방법이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의 겨울은 실패, 배신, 우울증, 죽음 등 여러 가지 형태를 보인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들 모두가 주는 충고는 똑같다. “겨울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으면 겨울 때문에 미쳐버릴 겁니다.”’
무엇이 내 시야를 가리고 혼미하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두렵고 춥게 하는가. 동상에 걸릴 지 모른다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자. 몸을 보호해 줄만한 방한 장비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내면의 여행은 내가 하는 것이지만, 나를 지켜봐주고 응원하는 여럿이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용기를 존중해 주어라.
어려움이 있어도 갈 길은 하나다. 그 안으로 정면으로 대담하게 걸어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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