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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17일 10시 46분 등록
집을 나섰습니다. 푸르스름한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선뜩합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잔뜩 찌푸린 것이, 쿡 찌르면 비가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요 며칠 제법 매서웠던 추위가 오늘은 조금 덜합니다. 끝까지 채워 올렸던 겉옷의 지퍼를 조금 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봅니다.

조금 걸어 아파트 단지를 통과하자 늘 지나치던 고물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곳은 항상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앞서 하루를 시작한 이들로 가득합니다. 오늘은 때마침 폐지가 수북하게 쌓인 리어카를 끌고 그 곳으로 막 들어서는 할아버지 한 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산더미처럼 쌓인 폐지를 돈으로 바꾸면 얼마나 될까 하는 값싼 계산이 기웃거리는 제 머리로 할아버지의 상쾌한 웃음소리가 날아들었습니다. 아침 공기를 가르는 참 시원스러운 소리였습니다.

그때부터 십여 분을 걸어 지하철역에 닿도록 제 마음은 이리저리 비틀거렸습니다. 할아버지의 웃음 소리가 끊임없이 귓가에 울렸습니다. 심심찮게 폐지를 모아 생계를 유지하시는 분들을 보아왔고, 그 인생의 고단함에 옅은 안쓰러움을 느끼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달랐습니다. 과연 내게 그 분들을 동정할 자격이 있는지 갑자기 의심스러워졌습니다.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객차 안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생기 없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 죽은 듯이 지친 사람들이 내뿜은 숨결로 차 안의 공기는 축축했습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정신 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문득 그들의 지난 밤이 궁금합니다. 그들을 밤늦도록 붙들고 있었을 사연이 무엇인지 잠을 자고 있는 이들 중에 한 명을 깨워서 물어보고만 싶었습니다. 눈을 뜨고 있는 이들도 자고 있는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심한 표정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멍하니 서있는 그들은 눈을 뜬 채로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지하철 안은 평소보다 더웠습니다. 아마도 추운 날씨를 생각하고 난방에 신경을 쓴 모양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단단히 차려 입은 겉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벗어서 손에 들고라도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조그만 공간도 없이 다닥다닥 들어찬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마에 땀방울이 조금 맺히는가 싶더니 어느새 볼을 타고 턱으로 떨어집니다.

그렇게 한참을 흔들리며 회사로 향했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선 사람에게 숨결이 느껴질까 싶어 조심스레 숨도 참아가며 반시간을 그렇게 흔들렸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벌써 몇 년째 하루도 빼먹지 않고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숨이 막혔습니다. 특별한 문제도 없고, 그다지 나쁠 것도 없는 직장생활이지만, 내년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지금과 같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리자 가슴 한 켠에서부터 무언가가 답답하게 차 올랐습니다.

그때 다행히 내려야 할 역에 지하철이 도착했습니다. 역의 플랫폼에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또 한 대의 지하철이 막 문을 열고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인해 플랫폼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먼저 계단에 올라 지하철역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소용돌이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서글픈 마음이 밀려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읽었던 마음을 나누는 편지의 한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야마다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한 회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연말연시 휴가는 19일 간이며, 여름휴가 10일, 골든 위크 휴일 10일, 공휴일 사이에 낀 샌드위치 데이는 휴뮤일입니다. 대략 일 년에 140일 정도가 휴무일입니다. 거기에 개인 휴가 출산 휴가등이 더 해집니다. 사장은 휴가를 더 가라고 하고 직원은 고객이 불편하다며 휴가를 줄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휴가도 가고 고객불편을 줄이기 위해 휴가 기간 동안 주요 고객에게 창고 열쇠를 맡기고 가기도 합니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고 나중에 정산하면 되니까요. 월급은 대기업 수준이고, 5년 마다 전 직원이 해외여행을 갑니다. 이른 살까지 고용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아주 훌륭합니다. 거의 일 년의 반을 쉬고, 급여는 대기업 수준에 5년마다 전 직원 해외여행이라니… 어지간해서는 꿈도 꾸지 못할 멋진 회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를 다른 사람들이 부르듯이 '샐러리맨의 천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더 짧은 노동 시간, 더 많은 급여가 행복의 척도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허전합니다. 어쩌면 이 회사는 직원들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어가는 야마다 사장, 자신의 천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하철에 내리면 버스로 갈아타고 사무실까지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대략 5분에서 10분 정도의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은 조금 걷고 싶었습니다. 시간을 확인하니 걸어가면 아무래도 지각을 하게 생겼습니다. 곱지 않은 눈빛으로 잔소리를 할 지도 모르는 부장님의 얼굴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냥 그렇게 흔들흔들 걸어서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폐지 수레를 끌던 할아버지의 웃음 소리와 샐러리맨의 천국에 대한 생각을 지나 또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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