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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21일 22시 03분 등록
북카페에 앉아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정리하고 있다. 리뷰를 쓰기 위해 몇몇 글귀에 다시 밑줄을 긋는 동안 문득 마구 쓰고 싶어졌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고 싶어졌다.


눈이 많이 온 날

눈이 많이 온 날. 비탈길을 걸어 출근하는 아침.
차들이 그냥 서 있는 것 같다. 앞유리에 온통 눈에 덮여 있다. 그러나 그 길 한가운데는 차 세우는 곳이 아니다. 차들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아주 천천히 빠져나가는 앞차를, 앞차가 빠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내 걸음보다 느린 차. 그 차 옆을 지나가가 문득 무서워졌다.
차를 보고 ‘브레이크 잡지 말고 천천히 핸들 꺽어요.’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연이어 같은 아저씨의 목소리. ‘거기 비켜요.’ 염화칼슘을 뿌린 것을 비로 쓸어서 흩으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한 말이었다. 차 옆을 지나가는 일.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나 깨달아 버린 것이다. 차가 미끌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1993년 겨울.
눈길에 커브를 돌던 트럭이 한 소년을 치어버린 날.

나는 그날 아침 김제 금산사쪽에 수련회에 가 있었다. 추웠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몹시 피곤했던 아침이었다. 전날 밤늦깨까지 대학부의 1년 계획을 짜는 회의를 했고, 선후배간의 술자리로 잠을 못잤었다. 잠깐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벽에 머리를 기대로 잠을 자곤 했던 아침이었다. 자다가 깨다가 하는 아침. 그리고 나는 집에 돌아왔다.

다른 기억은 없다. 동생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을 했었다는 것 말고는. 엄마는 동네 아이들이 무더기로 여행을 갔기 때문에 혹시나 그 무리에 동생이 끼어있을까하고 걱정을 했다. 아이들은 몇일 후 돌아왔다. 동생은 그 틈에 끼어있지 않았다.

동네 아주머니가 와서 경찰서 주변에 사고 난 사람의 보호자를 찾는다는 벽보가 붙어있다고 알려주었다. 엄마는 불안해 하며 집을 나섰다. 불안해 하면서도 혹시나 하면서도 나는 비몽사몽이었다. 잠깐 꿈을 꾸었다. 아주 가파른 언덕이었다. 어둡고 가파랐다. 위험했다. 나는 간신히 나무를 움켜주어가며 언덕을 기어올랐다. 거기서 동생을 만났다. 어둡고 무서운 꿈이었다. 잠을 깨었을 때, 동생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을 나서기 전.... 단지 놀란 엄마의 모습만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아무 기억이 없다. 일부러 아무런 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했었나 보다. 나는 슬프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
그냥 많이 놀랬다. 동생이 죽었다는 것은 그냥 큰 충격일 뿐이었다.

엄마가 많이 울었다. 할머니께서도 많이 울었다. 친척들이 집에 왔다. 여러 가지 일을 봐주셨다. 나는 밥상을 차리는 것을 도맡아 했다. 교회 친구가 왔었다. 교회 집사님들도 몇 분 왔었다. 이모들은 엄마가 많이 슬플테니까 내가 잘 챙겨줘야 한다는 당부만을 했다. 엄마와 할머니를 잘 챙겨서 밥을 먹게 해야 한다고 했었다. 엄마나 할머니 앞에선 슬프면 안되었다.
나는 슬프지 않았다.

동생은 장례식이 없었다. 부모보다 먼저 간 놈은 그건 것은 없다고 한다. 화장을 했다. 전주에서 가까운 물이 많은 운암댐에 가서 뿌렸다. 나는 그 자리에도 같이하지 않았다. 나는 제외되었다. 나는 집에 남은 사람이었다. 내게 동생은 그냥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화장을 마치고 돌아온 고모와 함께 옷가지를 몇 개 챙겨서 나가서 태웠다. 옷을 태우면서 동생이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며칠 밤을 악몽에 시달렸다. 밤에 불을 끄는 것이 무서웠다. 어두움이 무서웠다. 뭔가가 나타나서 내 앞에서 뭔가 생명이 있는 아름다운 무엇인가의 목을 확 잘라버렸다. 밤이 무서웠다.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돌아올 때 보이던 어두운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동생이 죽기 전에도 늘 무서웠었다. 밤나무 그늘이 어둡게 드리워진 그 집이 나는 무서웠다. 가끔은 지붕에 어떤 여자가 앉아있는 듯 했다. 나는 일부러 그쪽을 안쳐다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사고가 있은 후에는 지붕의 어두움은 없어졌다.

그리고, 오랫동안 우리는 그것에 대해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고향을 갈때마다 지나치는 운암댐에서, 그곳 휴게소에 내려서 볼 일을 보고, 커피를 뽑아 마셨다. 음료수를 사 먹고, 아스크림을 사 먹으면서도 동생에 대해서는 한번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잊은 듯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번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다.

어두움은 무웠다. 갑자기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무력해졌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더 이상 어두움이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그 생각이 나버린 것이다. 미끄러질 수 있는 자동차 옆을 지나는 공포.

그리고 나는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눈길 교통사고에 대해서,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우리 가족들은 1월이 큰 일이 많이 나니 조심해야 한다는 농담까지 했다. 슬프지 않았다. 그냥 아주 조금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 쓰는 동안 알았다. 나는 그 일로 한번도 울어보지 않았다고. 15년을 같이 살아온 동생을 위해 한번도 울지 않았다는 것. 슬프다는 감정이 없다는 것. 미안했다. 미안하다.

'울어야 할 때 울지 않는 건 뭐냐?'
'뭐가 대체 그렇게 날 묶어 놓았던 거냐?'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다가 무작정 섰다. 자꾸 그 이야기만을 하게 된다면 그것의 바닥까지 가 보아야 한다고 나탈리 골드버그는 말했다. 그런데,뼛 속까지 도달하기 전에 뭔가가 나선 것이다. 눈물을 닦고 코 두 번 풀고 나니,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내 안의 내부 검열자는 어느새 돌아와있었다.
IP *.72.1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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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성
2008.01.22 06:47:32 *.75.252.142
오늘 아침도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네요.

이 눈(雪)은 따뜻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옷이 젖게 되면 이내 차가움으로 변질되지요.

사람의 마음이 일상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더욱 아플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 다시 느껴봅니다.

앞으로는
젖은 눈(雪)을 물기 없는 마른 눈(目)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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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1.22 19:42:14 *.72.153.12
차순성님. 감사합니다.
눈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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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8.01.23 06:01:30 *.109.84.116
정화야... 자꾸 눈을 작게 만들고 웃던 네 얼굴이 떠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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