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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4일 19시 44분 등록
자유학년제를 맞이한 중학생 자녀와 인문고전을 온 가족이 함께 읽고 나누는 이야기를 편지로 드리고 있습니다. 열세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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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고전 책읽기에 처음 맛들인 건 초등학교 때였다. 당시 아버지는 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이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아버지가 교사면 살 만한 형편이어야 하는데, 부모님의 빚보증이 크게 잘못돼 그러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물론 그때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빚보증 건이 제대로 터졌다. 몇날 며칠 밤이면 밤마다 아버지는 술을 드셨고 어머니는 울고 또 우셨다. 이후 십 수 년간 아버지 월급의 대부분을 빚 갚는데 썼다. 

지금도 기억난다. 어머니는 두 살 아래 여동생과 나를 앉혀놓고 집안 상황을 설명하셨다. 우리 가족 한 달 최소 생계비를 항목별로 갱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쓰며, 다행히 일주일에 한 번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 수 있고 한 달에 한 번 이발소와 미장원에서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다고 하셨다. 어쨌거나 아껴 쓰고 또 아껴 써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어머니가 50권짜리 아동문고 전집 세트를 집에 들이셨다. 까마득히 먼 미래에나 다 갚을 산더미 같은 빚이 있는 상황이었는데 어머니는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성을 높여 싸웠기에, 지금도 50권 전집 세트가 집에 왔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제 나도 사십대 중반 두 아이 아버지로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와중에 전집 세트를 구입하는 것이 얼마나 고민이 되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 때 집에 들인 전집 세트가 물려지지는 않았다.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었다. 빨간색 하드커버에 금박으로 제목이 새겨져 있고, 제목 아래로 뿔이 달린 사슴이 그려져 있었다. 1권 그리이스 신화 (그때는 표기법이 지금과 달랐다), 2권 호머 이야기, 3권 성서 이야기, 4권 이이솝 이야기, 5권, 영국 동화집, 6권 셰익스피어 이야기 등 세계 여러 나라 문학작품이 갱지에 명조체 활자로 박힌 책이었다. 책장을 넘기다 간간히 만나는 흑백 삽화도 꽤 멋졌다.

아! 10권이나 20권이 아니라 50권 이었다! 마음껏 탐험할 수 있는 50개의 바다와 하늘이 눈앞에 펼쳐진 셈이었다. 수년 동안 장장 50권의 세계 문학을 책이 다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하루는 프랑스 초원에서 은빛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서 불을 뿜는 용과 싸웠고, 다음 날은 양탄자를 타고 중동의 사막을 날았다. 아침이면 아담과 에덴동산에서 거닐다가 저녁이면 하이디와 알프스 언덕을 뛰었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두 딸을 낳았다. 서울에서 맞벌이를 하며 양가 부모님이 계신 대전과 밀양에 두 아이를 맡겨 놓고 길렀다. 우여곡절 끝에 큰 아이 7살, 작은 아이 3살이 되어서야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어떻게 다시 만난 아이들인가? 정말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을 데려올 준비를 하며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의 의견은 일치했다. 온 가족이 책 읽는 문화에 젖어 살기로 했다.

초등학교 때 읽던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은 여전히 내 영혼에 녹아 있다. 아내도 어릴 적 읽은 책들이 영혼의 안식처라고 한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닥쳐도 어린 날 영혼 깊숙이 닻을 내린 인문고전은 우리 영혼을 위해 아침이면 해를 띄우고 밤이면 별을 띄웠다. 세파에 움츠린 어깨를 활짝 펴라고 등 뒤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 힘을 두 아이들에게 맛보여 주고 싶었다.

2011년 아이들을 데려오면서부터 지금껏 TV에 일반 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을 연결시키지 않고 오로지 DVD만 연결시켰다. 아이들을 아내와 내가 사다 놓은 DVD를 제외하면 오로지 책만 볼 수 있는 환경에서 길렀다. 요즘은 아이들이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많이 본다. 그래도 두 딸들의 독서 습관은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다.

독서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TV를 포기했다. 저녁마나 주말마다 아이들과 ‘바보상자’를 바라보느니 만화책을 읽더라도 책을 손에 잡는 문화를 만들어 보는 게 부부의 바람이었다. 손만 뻗으면 책이 손에 잡히는 공간에서 두 아이들과 살고 싶었다. 방과 거실과 부엌을 책으로 채웠다.

파주에 사는 가장 큰 장점은 책을 접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점이다. 분야나 주제가 정해지면 자료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파주 출판단지에 가면 각종 출판사와 중고책방이 있다. 일산에 가면 서점과 중고책방이 많다. 파주에는 도서관이 많다.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대여섯 개 도서관이 있다. 책 배달 서비스가 있어서 원하는 책을 가까운 도서관으로 배달하여 빌릴 수 있다.

2019년 새해에 집 근처에 또 하나의 도서관이 문을 연다. 집에서 큰 길 하나 건너 십여 분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 닿는 거리다. 새해에 온 가족 함께 새로 개관한 도서관에서 주말을 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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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 함께 인문고전 읽고 나누는 이야기, 2019년에도 힘차게 이어집니다.

유형선 드림 (morningstar.y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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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5 01:03:19 *.72.1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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