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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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때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소년인가?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더러 있다. 나 자신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우리의 글을 써놓고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친다. 그러면 사람들은 우리의 글을 읽고 어떻게든 반응을 한다. 그 반응이 저자의 기대수준일 수도 있고 못 미치거나 그 이상 일 수도 있다. 그렇다. 못 미치는 것이 언제나 문제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앓게 된다. 그래서 묘안을 짠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다시 “늑대야!” 라고 소리친다. 종종 그것은 단순히 시차를 요하기도 한다. 그게 운명이거나 운이 될 수가 더러 있다. 즉 3번째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너무 늦게 깨달으면 인생에 대하여 벌을 받게 된다는 어느 구절의 사부님의 말씀이 이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너무 논리를 비약시켰나?)
나는 처음부터 나다운 솔직한 글, 체험적 글로써 시작을 했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누구나 연습하게 되면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간다고 해서 저절로 솔직한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또한 쓴다고 해도 그것이 너무 시간이 지났을 경우에는 진솔한 글조차도 애시의 글로 각인되어 읽기도 전에 식상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늑대소년에게 더는 속지 않으려는 마을 사람들처럼 말이다.
모든 글이 솔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장이라는 것을 살게 하는 것에는 많은 요소와 기품들이 직ㆍ간접적으로 배어들게 마련이다. 그러한 것들을 잘 살려 쓴 글들이 글쓰기의 잘 연마된 모습일 런지 모른다.
연구원 과정을 하면서 나는 참 답답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가를 체계적으로 익히고 난 후에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쉬운 예로 종종 주위에서 나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들 하니까 말인데, 나의 글쓰기에 대하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터라 내심 고심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또한 솔직히 나 자신도 글을 쓰다가 내면과 외부의 심상들을 연결하지 못하여 건너뛰거나 매끄럽게 쓰지 못해서 갑갑해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래서 기본이 잘 닦여진 벗들을 대할 때면 늘 부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시간이 주어지면 먼저 글쓰기를 체계적으로 살펴본 후에 글쓰기에 돌입해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시간은 따로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또 의아했다. 여러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말씀하시는가 보다 나의 개인적인 글쓰기에 대해서는 별로 의중에 두지 않으시고 하시는 말씀이려니 하였다. 사실 나는 책이나 글쓰기에 대해 별로 질문이 없다. 아니 어쩌면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르겠다. 다른 이들이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질문을 파고드는데 비해, 나는 질문 자체도 막연할뿐더러 의사전달도 잘 못하는 편이다. 동료들을 보면 서론ㆍ본론ㆍ결론에 대한 명확한 논지를 가지고 그 전체적인 아우트라인이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다고 하고, 아예 쓰려들지 않는다고들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떤 한 단어만 주어져도 그 서론ㆍ본론ㆍ결론에 상관없이 생각과 느낌과 글을 줄줄이 쏟아 내거나 이어갈 수가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형식에 관계없고 주제에 동떨어지기도 하는 자유로운 글쓰기가 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런 나의 고충을 해결하기보다 이런 나의 글쓰기에 맞는, 혹은 이것을 하나의 특징으로 살려 낼 수 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영문도 모르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질타에 가까운 매를 맞아 왔다. 나는 그들의 글쓰기가 부럽지 않고 탓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일방적으로 나에 대해 마음 놓고 자유롭게 빈정대기 일쑤였다. 아예 대놓고 내 앞에서 웃는 척하면서 왜 뽑았냐는 둥, 심지어 왜 저렇게 시끄러운데 가만히 있느냐는 둥, 하다못해 놀이에 따라나서도 제를 왜 끼워주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며 자신들에 대해 자신만만할 뿐이다. 허참... .
이건 세대차도 아니고 그들이 곧잘 말하는 강점상의 최상주의의 발로는 더더욱 아닌 듯하다. 이 사회는 무언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도대체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일종의 엘리트의식(?)과 최상주의라는 것에 정말 납득과 이해가 잘 안 간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대다수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성향이기나 한 것처럼 버젓이 우길 때에는, 이 작은 입은 꼭 다물어진 채 가슴만 콩닥콩닥 죄 지은 사람처럼 벌렁 거리고 말뿐.
사실 나는 글쓰기의 기본이 다소 모자라기는 하다. 남들이 다 잘 배우는 동안에 나는 뭐하고 농땡이를 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글을 쓰다보면 어느 정도 해소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사부님께서는 보시는 것 같고, 우선 이러한 상황에서도 글쓰기를 못할 것은 없다고 결론 내려 주시는 것 같다. 언젠가 언뜻 이런 나의 글쓰기가 각광받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말씀을 스쳐지나가며 해주신 것이 어렴풋이 기억에 나기도 한다. 나는 하도 겁나서 제대로 여쭈어 보지도 못했다. 즉 잘못 들었을까봐 아쉬워서 말이다. 그래서 그냥 줄창 글쓰기를 해보는 것뿐이다. 아니 내키는 대로 써가는 것뿐이다. 형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내 글쓰기는 논문도 아니고 일상의 취향을 적어보는 것에 만족하는 것인데 이것이 그렇게 사람들의 논리에는 안 맞나? 나는 그들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걸까? 내가 그들과 똑같이 쓰려면 뭣 하러 글을 쓰나? 나는 내식으로 내 할 말을 적고 싶은 것이 아니겠나.
나는 이곳의 글 잘 쓰는 많은 사람들이 매끄럽고 화려한 문체를 구가하거나 남의 글을 조화롭게 짜깁기하기에 서슴없고 감쪽같이 자기글로 뚝딱 잘도 둔갑시키지만, 결코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펼치거나 흉금 없이 터놓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중에 보다 앞서거나 우위에 입각해서 교훈을 주려는 입장에만 치중하거나 지식을 전달하려고 한다고 느껴질 때가 더러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렇게 잘 하지 못하는 나는 때로 그러한 모습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것이 그들만의 재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그들의 경우는 존중받아 마땅하고 나의 경우는 하찮기만 한 것일까? 왜 그들은 자신들은 마땅히 존경받고 귀하게 대접받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대해서는 비하하거나 돌려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그것의 마땅하고 옳은 잣대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애타게 묻지 않을 수 없다.
* 내가 믿는 변.경.연의 학습과 방법과 우리 대학 그리고 사부님의 역할
나는 이곳을 만만하게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것이 내가 개인적으로 상처를 많이 가졌거나 인생의 어느 부분을 실패한 것에 기가 죽어서라거나 글쓰기가 체계적으로 잡히지 않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어서만은 절대 아니다. 이곳도 분명 사람 사는 곳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들이 섞이게 마련이다. 이곳이 특정의 멘사출신들의 클럽은 아니지 않은가. 따라서 세상의 모든 보편성과 일반성이 이곳에 다 존재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잇장처럼 얇은, 그러나 그것의 엄청난 큰 차이는 변.경.연이라고 하는 자체적 브렌드가 가지는 도저히 함부로 여기지 못할 끈끈한 힘과 생명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 이곳은 한사람의 피땀 어린 꿈과 희망이 서린 삶의 역사가 마치 용광로와 같은 불길로 솟구쳐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살아 펄펄 숨 쉬며, 간판 하나 없고 책상 하나 가지지 못한 채 일지라도 사람들의 가슴속 깊은 곳을 무찌르며 혼과 이념과 사상이 그대로 녹아 곳곳에 스며들고 배어나게 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많은 선후배들이 저마다의 사무친 꿈을 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외롭고 가냘프게 날아와서, 이곳에서 혹은 이곳 변.경.연과 더불어 함께 저마다의 숨통을 찾아 살아가는데 힘을 얻고 삶의 진솔한 현장감을 기꺼이 쏟아가며, 나름의 개인의 역사를 꾸준히 일구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디 작은 일인가. 논리의 비약이라 할지 몰라도 꿈이 없는 사람은 심지어 죽기를 불사한다. 실제로 현실의 태안반도 사태만 보더라도 벌써 여러 명의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인생의 추운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지 않던가. 그것이 비단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 다는 간단한 말로 치부되어 버려지고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어지고 말아야 할 일이겠나.
꿈은 현실 이상이다. 꿈은 꿈 이상이다. 꿈은 생명 그 자체이며 삶의 부단한 혁명이다. 이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던가. 이것이 아무나 권장할 수 있는 일이던가. 또한 우리가 아무나 따르고 싶은 일이던가.
나는 더디고 무딘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 일이 무진장 위대하고 값진 일이라고 여겨진다. 너무나 간단히 쉽다고 단칼에 말하는 사람들과 단순하게 실망했다고 하는 이들의 속뜻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세상에 막연히 잘난 인물들은 발에 치일만큼 부지기수로 많다. 그러나 진실로 내 경우에는 스승 한분을 모시기에 무려 45년 이상이 걸렸다. 이것도 인연이 닿아야만 가능한 일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틀림없이 그랬고 아무나 스승삼을 수도 없었다. 나를 사랑하고 예뻐해 주는 스승은 많았다. 그러나 정작 나를 살펴 이해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에 다가설 수 있도록 산증인처럼 내 엄마의 삶처럼 체득해 나가는 삶을 적나라하게 실행하고 펼쳐 보여준 스승님은 일찍이 없었다. 감쪽같은 결과를 보게는 하였지만 그 과정 하나하나를 미리 계획하고 털어놓으며, 우리와 함께 실행해 나아가는 스승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세상에는 대단하고 화려한 인물들이 많고 그들이 내 스승님보다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한마디로 그들의 삶은 내게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 내 스승님은 일상의 삶을 진솔하게 함께 속삭이고 어울리며, 허심탄회하게 이웃집 쌀가게 아저씨 같은 모습의 간이역의 주인장으로, 이 일을 이 역사의 장을 펼치셨다. 나는 우리 가운데 어느 날엔가 이 나라를 빛낼 대통령이 나올 것을 믿으며, 그가 삼천 배를 올리고서야 알현하듯 간절함으로 조언을 구하는 위치에 내 스승이 함께 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때에도 내 스승은 지금의 모습에서 그리 바뀔 것 같지 않다. 오래도록 우리에게 일상을 함께 해 주시리란 믿음이 가기 때문이다.
누군가 아부에 가깝다고 핀잔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나라의 역대 대통령의 경우보다 한 분의 스승이 내게는 훨씬 소중하고 아닌 말로 긴요하게 쓸모가 있다. 내 스승의 역할이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에 미치지 못한다고 전혀 생각되지 않음이다. 푸른 기와집에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온몸을 수색당하고 드나들지 않아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함께 등산도 하고 밥도 먹어가며 한마디씩 나누는 온기어린 사부의 일상이, 내게는 눈물 나도록 정겹고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실익이 된다. 나의 경우 머리와 재능이 남달리 뛰어나기는커녕 둔하고 뒤퉁맞아서 곧잘 사고나 치는 것 같아 보이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넓게 보면 죽을죄도 아니고, 그래서 조용하고 신선한 이곳 변.경.연 홈피가 늘 무슨 일이 터질까 이따금씩 긴장도 하게 될 것이니 신기하고 재미나지는 않는가? ㅋ
여하튼, 이런 나의 경우만 그러한 것은 분명 기필코 아닌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나라의 유수한 인재들이 이곳에 많이 있고, 그 학벌과 직함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를 불문하고 교수며, 박사며, 사업가며, 선생님이며, 농부며, 학생이며, 아줌마 아저씨며, 대기업의 부서장급의 중견간부들이며, 성실한 직장인과 꿈꾸는 백수들 등, 이사진을 비롯한 경영진 들이며 할 것 없이 전국 각처의 살만하고 자부심 가득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만들어 가는 탄탄한 커뮤니티와 네트워크를 가진 곳이 이곳이 아니던가 말이다.
이러한 무한한 연결망에 대한 자부심이 나는 자못 크다. 솔직히 나는 여태 명함을 파지 않고 지내온 사람이다. 그다지 신분을 내세울 일 없이 살아왔고, 굳이 나를 개인적으로 선전하거나 팔지 않아도 앉아서 내방자들을 받는, 비교적 안정되고 편한 일자리에서 일해 왔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연구원을 하면서는 정말이지 명함을 새기고 싶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직 못 새기기는 하였지만, 나는 늘 이곳의 연구원임에 크게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이곳이 나로 하여금 그러한 기분 좋은 생각이 들게끔 하였고, 내심 그러한 환경과 관계망을 즐겨서이기 때문이리라.
나 개인 한 사람만이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어찌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나. 그런데 이곳에는 나와 같은 아니 나보다 더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아주 많다. 사람은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는다. 더 구체적으로 사람은 꿈에 살고 희망이 없으면 그 빛을 바랄 수 없다. 이곳에는 평범한 나와 같은 한 사람이 시작한 개인의 역사를 위시하여 그를 따르는 여러 제자와 벗들에 의해 빛의 영광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게 하는 힘이 있다. 나는 이 공간의 이러한 혁명을 간과하거나 조금도 가볍게 여겨 의심치 않는다. 다만 이러한 나의 솟구침을 참는 데는 피치 못할 개인적 사정과 이유가 있는 즉, 나는 이곳 이 과정에서 아직 졸업을 하지 못한 수련생이라는 점과, 아직도 섬뜩한 과제들이 많이 남아있기에 말이 앞서기가 주저해질 따름에서 이다. 그러나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평소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음을 구태여 숨길 일이겠나.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는 사람은 아예 이곳을 찾아 들지 않는다고 본다.
사실 그러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돋보이고자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배후에 있을 때만이 빛이 나지 않던가. 사람들의 존재 하나를 하찮게 업신여기지 못함이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우리들은 우리들 서로를 위해 서로 존중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게 아무게 ‘씨’자나 ‘님’자를 붙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도 잊지 말일이다. 더러 미숙하고 덜 마땅하더라도 상대에 대해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할 것이다. 안 보면 그만이라고 딱 잘라 안면몰수 하고 말아버리지 않는 것이 인간적이라고 나는 생각된다. 그러한 관계 지음은 이곳 아니라도 많고 이곳에서조차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내 의견은 너무나 일방적인 주장이기만 할까?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미가 10달 동안 고이 키워온 생명이고, 누가 더 큰 인물이 될지는 살아봐야 그리고 우리가 죽고 난 이후에나 알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수많은 역사가 말해주기도 하거니와 가끔 유적지를 돌아볼 때에도 그 시대에 각광 받지 못한 개혁자나 혁명가들이 많았고, 그들이 당대를 주름잡았던 부류이기에만 우리가 그들을 찾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한사람을 찾아 짚어 돌아보면서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생명들과 갈등적 요소와 시대의 미궁 속으로 함께 빠져들어 이해해 보고자 함이 아니던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 사람이 자기 생애를 펼쳐 나름의 큰 혁명으로 성공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가 여러 길 가운데 굳이 스승의 길을 택하면서 흐뭇해하기로 작정하는 것은 일신의 안위에만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단호히 대변할 수 있다. 스승도 나와 똑같은 피조물이다. 나와 같이 애욕과 부와 일신의 평안만을 갈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이기를 자처하여 힘주어 말하고, 애써 그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은 어린/어리석은 벗에게 살점을 떼어주듯, 당신의 삶을 덜어 기꺼이 내어주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이 당신의 삶의 역량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모습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가르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지식전달에만 그치지 않는 좋은 스승으로 거듭나기를 간구하고 깊은 영감을 나누고자 함에는 어미처럼 아비처럼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며, 그 역량에 비해 덜 노력하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의 수고를 들여서라도 기꺼이 내어주고 싶은, 우리들의 부모에게서 다 배우지 못하고 삶에서 미처 깨달아 얻지 못한, 속살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랑이 스승의 피와 살갗을 뚫고 뼛속깊이 숨어져 녹아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겠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온 우주의 섭리와 진리를 깨우치지 못한 나는 한없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내 스승은 나를 받아주었고 나는 이곳에서 여러 벗들과 함께 공부하며 울고 웃고 부대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일상 그 자체다. 나는 징징거림 가운데에서도 이 과정을 기꺼이 두 팔 벌려 껴안으며, 내 스승님 또한 그렇게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서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었음을 믿는다. 만일 이곳이 구본형식의 편협하고 일방적 삶만이 유효하고 그 일상만이 위대하다고 강제했던 것이라면 나는 아예 엉덩이를 들이밀지 않았을 것이며, 내가 체험한 결과 추호도 그러한 구석이란 일절 없었던 점에 자부심과 기꺼움을 함께 느낀다.
의기충천하고 투철한 벗들아, 그네들의 앞선 판단 이전에 스승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그 앞에서 감히 가벼이 나부끼지 말라. 그 앞자리에 함부로 앉지 말며, 그 앞에서 비방함을 섣불리 끼워 넣기 하지 말라. 함부로 침 튀기지 말란 말이다. 그대보다 못한 벗이 앞에 있더라고 허연 게거품을 한가득 물어 헐뜯지 말라. 갈지자로 어의 없이 비아냥거리지 말라. 왜냐고 따져 묻기를 식은 죽 먹기로 뚝딱 해치우지 말라. 설마하니 세상 그 누가 정영 그대들보다 못한 미물이기만 하겠는가.
한해의 농사를 짓다보면 이내 나가 떨어져버리는 헛개비도 있고 썩어 나자빠지는 과실도 있고, 외풍이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생채기가 나거나 기껏 다 자랐다가 급살 맞아 죽기도 하며, 잘나든 못나든 겨우 하나 씨과실로 남겨지는 과실도 있다. 어디 그뿐 이랴. 예상치 않게 늠름하고 굳건히 자라 제 구실을 뛰어넘어 혁혁한 공훈을 세우기도 하고, 탐스럽고 소담하게 자라 어디에 내놓아도 반듯하게 품위를 지니는 멋진 열매들도 얼마든지 있지 않던가. 그 과실들이 열매 맺음이 한결같지 않다하여 누구를 무엇을 탓할 것인가. 모두가 제 발로 기어든 우리들 저마다의 몫이요 제 할 탓이 아니던가.
이 자유로움 속에 이 제각각 모여 들어 저마다의 꿈으로 질주하며 형설지공螢雪之功의 노력을 도모하며 쌓아가는 상아탑象牙塔의 과정 안에, 반듯한 질서秩序가 없고야 크고 웅장하게 이루어질 것이 있겠는가. 우리가 쌓아가고자 하는 관계가 그리 만만한 사상누각沙上樓閣이기야 하겠는가. 논쟁을 하다보면 좋은 취지에서건 미처 그러하지 못한 말장난에서건 다소간의 불상사가 생길 수야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그 기본과 토대를 져버리는 망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아니다. 천지가 변동하여 일시에 정신이 착란되고 술이 눈알을 뒤집어 까도 절제할 일이다. 용납되어져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이것은 획일적 의도가 아니며 낫살의 기득권이 절대 결단코 아니다. 이것은 서로의 기본권이 존중되어야 함이 지극히 마땅하고 옳음과 원칙의 발로이다. 그러므로 벗들아 명심하여 달라. 우리 가벼울 수 없음을,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살고자 이곳에 한시라도 머무는 것이 아님을 굳게 세워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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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이 세 편의 글 모두 연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칼럼의 주제와 맞지 않은 일신상의 이야기를 올리지 않았나 염려도 됩니다. 그러나 크게 이것이 일상의 글쓰기라는 점에서 기꺼이 올렸습니다. 모두 이번 주에 며칠 내로 쓴 것이기도 하구요. 읽는 이들의 너른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또한 이 글은 어떤 한 사람의 개인적인 평이 오래도록 여러 사람의 뇌리에 각인되어짐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의도도 얼마간 있습니다. 표현이 제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이가 연구원에 대해 이러 쿵 저러 쿵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그의 주변인 들에게 아주 쉽게 각인되고, 듣는 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어떤 부분들에 대해 당부의 말을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자유로운 토론의 장인 이 공간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낫살까지도 불손하게 허물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상대를 평가할 때는 신중히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간곡한 마음으로 당부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함이 저의 의도이며, 특히나 장의 역할을 맡고 있는 분들의 각별한 주의를 부탁하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얼마 있으면 본격적으로 4기 연구원들이 선발 될 것입니다. 격려와 성원의 덧글도 좋지만 오프라인에서의 각별한 나름들의 평가도 신중하시기를 다시 한 번 상기하여 드립니다.
보잘 것 없는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IP *.70.72.121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더러 있다. 나 자신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우리의 글을 써놓고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친다. 그러면 사람들은 우리의 글을 읽고 어떻게든 반응을 한다. 그 반응이 저자의 기대수준일 수도 있고 못 미치거나 그 이상 일 수도 있다. 그렇다. 못 미치는 것이 언제나 문제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앓게 된다. 그래서 묘안을 짠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다시 “늑대야!” 라고 소리친다. 종종 그것은 단순히 시차를 요하기도 한다. 그게 운명이거나 운이 될 수가 더러 있다. 즉 3번째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너무 늦게 깨달으면 인생에 대하여 벌을 받게 된다는 어느 구절의 사부님의 말씀이 이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너무 논리를 비약시켰나?)
나는 처음부터 나다운 솔직한 글, 체험적 글로써 시작을 했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누구나 연습하게 되면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간다고 해서 저절로 솔직한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또한 쓴다고 해도 그것이 너무 시간이 지났을 경우에는 진솔한 글조차도 애시의 글로 각인되어 읽기도 전에 식상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늑대소년에게 더는 속지 않으려는 마을 사람들처럼 말이다.
모든 글이 솔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장이라는 것을 살게 하는 것에는 많은 요소와 기품들이 직ㆍ간접적으로 배어들게 마련이다. 그러한 것들을 잘 살려 쓴 글들이 글쓰기의 잘 연마된 모습일 런지 모른다.
연구원 과정을 하면서 나는 참 답답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가를 체계적으로 익히고 난 후에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쉬운 예로 종종 주위에서 나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들 하니까 말인데, 나의 글쓰기에 대하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터라 내심 고심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또한 솔직히 나 자신도 글을 쓰다가 내면과 외부의 심상들을 연결하지 못하여 건너뛰거나 매끄럽게 쓰지 못해서 갑갑해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래서 기본이 잘 닦여진 벗들을 대할 때면 늘 부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시간이 주어지면 먼저 글쓰기를 체계적으로 살펴본 후에 글쓰기에 돌입해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시간은 따로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또 의아했다. 여러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말씀하시는가 보다 나의 개인적인 글쓰기에 대해서는 별로 의중에 두지 않으시고 하시는 말씀이려니 하였다. 사실 나는 책이나 글쓰기에 대해 별로 질문이 없다. 아니 어쩌면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르겠다. 다른 이들이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질문을 파고드는데 비해, 나는 질문 자체도 막연할뿐더러 의사전달도 잘 못하는 편이다. 동료들을 보면 서론ㆍ본론ㆍ결론에 대한 명확한 논지를 가지고 그 전체적인 아우트라인이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다고 하고, 아예 쓰려들지 않는다고들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떤 한 단어만 주어져도 그 서론ㆍ본론ㆍ결론에 상관없이 생각과 느낌과 글을 줄줄이 쏟아 내거나 이어갈 수가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형식에 관계없고 주제에 동떨어지기도 하는 자유로운 글쓰기가 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런 나의 고충을 해결하기보다 이런 나의 글쓰기에 맞는, 혹은 이것을 하나의 특징으로 살려 낼 수 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영문도 모르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질타에 가까운 매를 맞아 왔다. 나는 그들의 글쓰기가 부럽지 않고 탓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일방적으로 나에 대해 마음 놓고 자유롭게 빈정대기 일쑤였다. 아예 대놓고 내 앞에서 웃는 척하면서 왜 뽑았냐는 둥, 심지어 왜 저렇게 시끄러운데 가만히 있느냐는 둥, 하다못해 놀이에 따라나서도 제를 왜 끼워주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며 자신들에 대해 자신만만할 뿐이다. 허참... .
이건 세대차도 아니고 그들이 곧잘 말하는 강점상의 최상주의의 발로는 더더욱 아닌 듯하다. 이 사회는 무언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도대체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일종의 엘리트의식(?)과 최상주의라는 것에 정말 납득과 이해가 잘 안 간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대다수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성향이기나 한 것처럼 버젓이 우길 때에는, 이 작은 입은 꼭 다물어진 채 가슴만 콩닥콩닥 죄 지은 사람처럼 벌렁 거리고 말뿐.
사실 나는 글쓰기의 기본이 다소 모자라기는 하다. 남들이 다 잘 배우는 동안에 나는 뭐하고 농땡이를 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글을 쓰다보면 어느 정도 해소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사부님께서는 보시는 것 같고, 우선 이러한 상황에서도 글쓰기를 못할 것은 없다고 결론 내려 주시는 것 같다. 언젠가 언뜻 이런 나의 글쓰기가 각광받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말씀을 스쳐지나가며 해주신 것이 어렴풋이 기억에 나기도 한다. 나는 하도 겁나서 제대로 여쭈어 보지도 못했다. 즉 잘못 들었을까봐 아쉬워서 말이다. 그래서 그냥 줄창 글쓰기를 해보는 것뿐이다. 아니 내키는 대로 써가는 것뿐이다. 형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내 글쓰기는 논문도 아니고 일상의 취향을 적어보는 것에 만족하는 것인데 이것이 그렇게 사람들의 논리에는 안 맞나? 나는 그들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걸까? 내가 그들과 똑같이 쓰려면 뭣 하러 글을 쓰나? 나는 내식으로 내 할 말을 적고 싶은 것이 아니겠나.
나는 이곳의 글 잘 쓰는 많은 사람들이 매끄럽고 화려한 문체를 구가하거나 남의 글을 조화롭게 짜깁기하기에 서슴없고 감쪽같이 자기글로 뚝딱 잘도 둔갑시키지만, 결코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펼치거나 흉금 없이 터놓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중에 보다 앞서거나 우위에 입각해서 교훈을 주려는 입장에만 치중하거나 지식을 전달하려고 한다고 느껴질 때가 더러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렇게 잘 하지 못하는 나는 때로 그러한 모습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것이 그들만의 재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그들의 경우는 존중받아 마땅하고 나의 경우는 하찮기만 한 것일까? 왜 그들은 자신들은 마땅히 존경받고 귀하게 대접받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대해서는 비하하거나 돌려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그것의 마땅하고 옳은 잣대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애타게 묻지 않을 수 없다.
* 내가 믿는 변.경.연의 학습과 방법과 우리 대학 그리고 사부님의 역할
나는 이곳을 만만하게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것이 내가 개인적으로 상처를 많이 가졌거나 인생의 어느 부분을 실패한 것에 기가 죽어서라거나 글쓰기가 체계적으로 잡히지 않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어서만은 절대 아니다. 이곳도 분명 사람 사는 곳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들이 섞이게 마련이다. 이곳이 특정의 멘사출신들의 클럽은 아니지 않은가. 따라서 세상의 모든 보편성과 일반성이 이곳에 다 존재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잇장처럼 얇은, 그러나 그것의 엄청난 큰 차이는 변.경.연이라고 하는 자체적 브렌드가 가지는 도저히 함부로 여기지 못할 끈끈한 힘과 생명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 이곳은 한사람의 피땀 어린 꿈과 희망이 서린 삶의 역사가 마치 용광로와 같은 불길로 솟구쳐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살아 펄펄 숨 쉬며, 간판 하나 없고 책상 하나 가지지 못한 채 일지라도 사람들의 가슴속 깊은 곳을 무찌르며 혼과 이념과 사상이 그대로 녹아 곳곳에 스며들고 배어나게 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많은 선후배들이 저마다의 사무친 꿈을 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외롭고 가냘프게 날아와서, 이곳에서 혹은 이곳 변.경.연과 더불어 함께 저마다의 숨통을 찾아 살아가는데 힘을 얻고 삶의 진솔한 현장감을 기꺼이 쏟아가며, 나름의 개인의 역사를 꾸준히 일구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디 작은 일인가. 논리의 비약이라 할지 몰라도 꿈이 없는 사람은 심지어 죽기를 불사한다. 실제로 현실의 태안반도 사태만 보더라도 벌써 여러 명의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인생의 추운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지 않던가. 그것이 비단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 다는 간단한 말로 치부되어 버려지고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어지고 말아야 할 일이겠나.
꿈은 현실 이상이다. 꿈은 꿈 이상이다. 꿈은 생명 그 자체이며 삶의 부단한 혁명이다. 이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던가. 이것이 아무나 권장할 수 있는 일이던가. 또한 우리가 아무나 따르고 싶은 일이던가.
나는 더디고 무딘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 일이 무진장 위대하고 값진 일이라고 여겨진다. 너무나 간단히 쉽다고 단칼에 말하는 사람들과 단순하게 실망했다고 하는 이들의 속뜻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세상에 막연히 잘난 인물들은 발에 치일만큼 부지기수로 많다. 그러나 진실로 내 경우에는 스승 한분을 모시기에 무려 45년 이상이 걸렸다. 이것도 인연이 닿아야만 가능한 일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틀림없이 그랬고 아무나 스승삼을 수도 없었다. 나를 사랑하고 예뻐해 주는 스승은 많았다. 그러나 정작 나를 살펴 이해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에 다가설 수 있도록 산증인처럼 내 엄마의 삶처럼 체득해 나가는 삶을 적나라하게 실행하고 펼쳐 보여준 스승님은 일찍이 없었다. 감쪽같은 결과를 보게는 하였지만 그 과정 하나하나를 미리 계획하고 털어놓으며, 우리와 함께 실행해 나아가는 스승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세상에는 대단하고 화려한 인물들이 많고 그들이 내 스승님보다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한마디로 그들의 삶은 내게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 내 스승님은 일상의 삶을 진솔하게 함께 속삭이고 어울리며, 허심탄회하게 이웃집 쌀가게 아저씨 같은 모습의 간이역의 주인장으로, 이 일을 이 역사의 장을 펼치셨다. 나는 우리 가운데 어느 날엔가 이 나라를 빛낼 대통령이 나올 것을 믿으며, 그가 삼천 배를 올리고서야 알현하듯 간절함으로 조언을 구하는 위치에 내 스승이 함께 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때에도 내 스승은 지금의 모습에서 그리 바뀔 것 같지 않다. 오래도록 우리에게 일상을 함께 해 주시리란 믿음이 가기 때문이다.
누군가 아부에 가깝다고 핀잔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나라의 역대 대통령의 경우보다 한 분의 스승이 내게는 훨씬 소중하고 아닌 말로 긴요하게 쓸모가 있다. 내 스승의 역할이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에 미치지 못한다고 전혀 생각되지 않음이다. 푸른 기와집에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온몸을 수색당하고 드나들지 않아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함께 등산도 하고 밥도 먹어가며 한마디씩 나누는 온기어린 사부의 일상이, 내게는 눈물 나도록 정겹고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실익이 된다. 나의 경우 머리와 재능이 남달리 뛰어나기는커녕 둔하고 뒤퉁맞아서 곧잘 사고나 치는 것 같아 보이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넓게 보면 죽을죄도 아니고, 그래서 조용하고 신선한 이곳 변.경.연 홈피가 늘 무슨 일이 터질까 이따금씩 긴장도 하게 될 것이니 신기하고 재미나지는 않는가? ㅋ
여하튼, 이런 나의 경우만 그러한 것은 분명 기필코 아닌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나라의 유수한 인재들이 이곳에 많이 있고, 그 학벌과 직함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를 불문하고 교수며, 박사며, 사업가며, 선생님이며, 농부며, 학생이며, 아줌마 아저씨며, 대기업의 부서장급의 중견간부들이며, 성실한 직장인과 꿈꾸는 백수들 등, 이사진을 비롯한 경영진 들이며 할 것 없이 전국 각처의 살만하고 자부심 가득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만들어 가는 탄탄한 커뮤니티와 네트워크를 가진 곳이 이곳이 아니던가 말이다.
이러한 무한한 연결망에 대한 자부심이 나는 자못 크다. 솔직히 나는 여태 명함을 파지 않고 지내온 사람이다. 그다지 신분을 내세울 일 없이 살아왔고, 굳이 나를 개인적으로 선전하거나 팔지 않아도 앉아서 내방자들을 받는, 비교적 안정되고 편한 일자리에서 일해 왔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연구원을 하면서는 정말이지 명함을 새기고 싶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직 못 새기기는 하였지만, 나는 늘 이곳의 연구원임에 크게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이곳이 나로 하여금 그러한 기분 좋은 생각이 들게끔 하였고, 내심 그러한 환경과 관계망을 즐겨서이기 때문이리라.
나 개인 한 사람만이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어찌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나. 그런데 이곳에는 나와 같은 아니 나보다 더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아주 많다. 사람은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는다. 더 구체적으로 사람은 꿈에 살고 희망이 없으면 그 빛을 바랄 수 없다. 이곳에는 평범한 나와 같은 한 사람이 시작한 개인의 역사를 위시하여 그를 따르는 여러 제자와 벗들에 의해 빛의 영광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게 하는 힘이 있다. 나는 이 공간의 이러한 혁명을 간과하거나 조금도 가볍게 여겨 의심치 않는다. 다만 이러한 나의 솟구침을 참는 데는 피치 못할 개인적 사정과 이유가 있는 즉, 나는 이곳 이 과정에서 아직 졸업을 하지 못한 수련생이라는 점과, 아직도 섬뜩한 과제들이 많이 남아있기에 말이 앞서기가 주저해질 따름에서 이다. 그러나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평소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음을 구태여 숨길 일이겠나.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는 사람은 아예 이곳을 찾아 들지 않는다고 본다.
사실 그러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돋보이고자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배후에 있을 때만이 빛이 나지 않던가. 사람들의 존재 하나를 하찮게 업신여기지 못함이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우리들은 우리들 서로를 위해 서로 존중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게 아무게 ‘씨’자나 ‘님’자를 붙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도 잊지 말일이다. 더러 미숙하고 덜 마땅하더라도 상대에 대해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할 것이다. 안 보면 그만이라고 딱 잘라 안면몰수 하고 말아버리지 않는 것이 인간적이라고 나는 생각된다. 그러한 관계 지음은 이곳 아니라도 많고 이곳에서조차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내 의견은 너무나 일방적인 주장이기만 할까?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미가 10달 동안 고이 키워온 생명이고, 누가 더 큰 인물이 될지는 살아봐야 그리고 우리가 죽고 난 이후에나 알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수많은 역사가 말해주기도 하거니와 가끔 유적지를 돌아볼 때에도 그 시대에 각광 받지 못한 개혁자나 혁명가들이 많았고, 그들이 당대를 주름잡았던 부류이기에만 우리가 그들을 찾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한사람을 찾아 짚어 돌아보면서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생명들과 갈등적 요소와 시대의 미궁 속으로 함께 빠져들어 이해해 보고자 함이 아니던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 사람이 자기 생애를 펼쳐 나름의 큰 혁명으로 성공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가 여러 길 가운데 굳이 스승의 길을 택하면서 흐뭇해하기로 작정하는 것은 일신의 안위에만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단호히 대변할 수 있다. 스승도 나와 똑같은 피조물이다. 나와 같이 애욕과 부와 일신의 평안만을 갈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이기를 자처하여 힘주어 말하고, 애써 그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은 어린/어리석은 벗에게 살점을 떼어주듯, 당신의 삶을 덜어 기꺼이 내어주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이 당신의 삶의 역량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모습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가르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지식전달에만 그치지 않는 좋은 스승으로 거듭나기를 간구하고 깊은 영감을 나누고자 함에는 어미처럼 아비처럼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며, 그 역량에 비해 덜 노력하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의 수고를 들여서라도 기꺼이 내어주고 싶은, 우리들의 부모에게서 다 배우지 못하고 삶에서 미처 깨달아 얻지 못한, 속살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랑이 스승의 피와 살갗을 뚫고 뼛속깊이 숨어져 녹아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겠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온 우주의 섭리와 진리를 깨우치지 못한 나는 한없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내 스승은 나를 받아주었고 나는 이곳에서 여러 벗들과 함께 공부하며 울고 웃고 부대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일상 그 자체다. 나는 징징거림 가운데에서도 이 과정을 기꺼이 두 팔 벌려 껴안으며, 내 스승님 또한 그렇게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서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었음을 믿는다. 만일 이곳이 구본형식의 편협하고 일방적 삶만이 유효하고 그 일상만이 위대하다고 강제했던 것이라면 나는 아예 엉덩이를 들이밀지 않았을 것이며, 내가 체험한 결과 추호도 그러한 구석이란 일절 없었던 점에 자부심과 기꺼움을 함께 느낀다.
의기충천하고 투철한 벗들아, 그네들의 앞선 판단 이전에 스승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그 앞에서 감히 가벼이 나부끼지 말라. 그 앞자리에 함부로 앉지 말며, 그 앞에서 비방함을 섣불리 끼워 넣기 하지 말라. 함부로 침 튀기지 말란 말이다. 그대보다 못한 벗이 앞에 있더라고 허연 게거품을 한가득 물어 헐뜯지 말라. 갈지자로 어의 없이 비아냥거리지 말라. 왜냐고 따져 묻기를 식은 죽 먹기로 뚝딱 해치우지 말라. 설마하니 세상 그 누가 정영 그대들보다 못한 미물이기만 하겠는가.
한해의 농사를 짓다보면 이내 나가 떨어져버리는 헛개비도 있고 썩어 나자빠지는 과실도 있고, 외풍이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생채기가 나거나 기껏 다 자랐다가 급살 맞아 죽기도 하며, 잘나든 못나든 겨우 하나 씨과실로 남겨지는 과실도 있다. 어디 그뿐 이랴. 예상치 않게 늠름하고 굳건히 자라 제 구실을 뛰어넘어 혁혁한 공훈을 세우기도 하고, 탐스럽고 소담하게 자라 어디에 내놓아도 반듯하게 품위를 지니는 멋진 열매들도 얼마든지 있지 않던가. 그 과실들이 열매 맺음이 한결같지 않다하여 누구를 무엇을 탓할 것인가. 모두가 제 발로 기어든 우리들 저마다의 몫이요 제 할 탓이 아니던가.
이 자유로움 속에 이 제각각 모여 들어 저마다의 꿈으로 질주하며 형설지공螢雪之功의 노력을 도모하며 쌓아가는 상아탑象牙塔의 과정 안에, 반듯한 질서秩序가 없고야 크고 웅장하게 이루어질 것이 있겠는가. 우리가 쌓아가고자 하는 관계가 그리 만만한 사상누각沙上樓閣이기야 하겠는가. 논쟁을 하다보면 좋은 취지에서건 미처 그러하지 못한 말장난에서건 다소간의 불상사가 생길 수야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그 기본과 토대를 져버리는 망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아니다. 천지가 변동하여 일시에 정신이 착란되고 술이 눈알을 뒤집어 까도 절제할 일이다. 용납되어져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이것은 획일적 의도가 아니며 낫살의 기득권이 절대 결단코 아니다. 이것은 서로의 기본권이 존중되어야 함이 지극히 마땅하고 옳음과 원칙의 발로이다. 그러므로 벗들아 명심하여 달라. 우리 가벼울 수 없음을,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살고자 이곳에 한시라도 머무는 것이 아님을 굳게 세워나가자.
..............................................................................................
연이은 이 세 편의 글 모두 연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칼럼의 주제와 맞지 않은 일신상의 이야기를 올리지 않았나 염려도 됩니다. 그러나 크게 이것이 일상의 글쓰기라는 점에서 기꺼이 올렸습니다. 모두 이번 주에 며칠 내로 쓴 것이기도 하구요. 읽는 이들의 너른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또한 이 글은 어떤 한 사람의 개인적인 평이 오래도록 여러 사람의 뇌리에 각인되어짐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의도도 얼마간 있습니다. 표현이 제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이가 연구원에 대해 이러 쿵 저러 쿵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그의 주변인 들에게 아주 쉽게 각인되고, 듣는 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어떤 부분들에 대해 당부의 말을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자유로운 토론의 장인 이 공간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낫살까지도 불손하게 허물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상대를 평가할 때는 신중히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간곡한 마음으로 당부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함이 저의 의도이며, 특히나 장의 역할을 맡고 있는 분들의 각별한 주의를 부탁하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얼마 있으면 본격적으로 4기 연구원들이 선발 될 것입니다. 격려와 성원의 덧글도 좋지만 오프라인에서의 각별한 나름들의 평가도 신중하시기를 다시 한 번 상기하여 드립니다.
보잘 것 없는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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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다른 것은 제가 말할 자격이 안되는 것 같고.. 이것 하난 말해야겠어요.
사부님이 왜 누나의 글을 보시고 '소설가가 쓴 글같다' 하셨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문장과 문장이 가슴을 파고드네요. 아주 아픕니다. 부끄러워서.
"대중에 보다 앞서거나 우위에 입각해서 교훈을 주려는 입장에만 치중하거나 지식을 전달하려고 한다"는 구절에서도, "구본형식의 편협하고 일방적 삶만이 유효하고 그 일상만이 위대하다고 강제했던 것이라면" 하고 말하는 부분에서도,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누나에게 충고하려했던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누나.
사부님이 왜 누나의 글을 보시고 '소설가가 쓴 글같다' 하셨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문장과 문장이 가슴을 파고드네요. 아주 아픕니다. 부끄러워서.
"대중에 보다 앞서거나 우위에 입각해서 교훈을 주려는 입장에만 치중하거나 지식을 전달하려고 한다"는 구절에서도, "구본형식의 편협하고 일방적 삶만이 유효하고 그 일상만이 위대하다고 강제했던 것이라면" 하고 말하는 부분에서도,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누나에게 충고하려했던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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