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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일 23시 59분 등록
“책 언제 나와요?”
화실에서 만난 친구는 이렇게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늘 손에 책을 쥐고 다니다보니 자연스레 무슨 책이냐고 묻는 질문 있었다. 나는 대답으로 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수련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수련을 마치고서 한권의 책을 쓸 것이라고 말했었다. 나의 답변을 들었던 그녀는 그 후로 나를 작가로 본다. 나는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었다. 아직 책을 쓰지 않은 사람이 무슨 작가냐고.

처음에 수련과정을 시작할 때, 아니 지원할 때부터 나는 그랬다. 내가 책을 쓸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변화가 절실히 필요해서 배우고 싶은 욕심에 그냥 뛰어들었다. 책을 쓴다는 것은 뒷 일이었다. 쓰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았다.

그러나 사부님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작년에 지원을 하기 전 여행에서 연구원을 지원하고 싶다고 했을 때, ‘너는 하지 말아라’라는 말을 들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짐작했다. 내가 앞으로 가야할 방향이 글(책)보다는 다른 쪽에 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중에 사부님께 여쭈었을 때, 수련과정을 마치면 책을 써야 하는데 어떤 책을 써야할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던 것 같다. 1년의 수련은 힘든 것이고, 그 수련을 마치고 자신이 만족하는 성과물인 책을 내야 하는 데 내 경우는 그것과 연관되는 뭔가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부님의 배려에 감사드렸다. 그리고, 제대로 마치고 싶어졌다. 그것은 ‘하고 싶다’라는 것 이상이다.

2008년. 첫 수업에서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낮술. 독자의 눈이 아닌 저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하는 마법약.
사부님의 ‘저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모든 것을 연결시켜라’는 말은 내게 새로운 주문이 되었다.

나는 이미 작가다.

그 변화는 얼마 전에 일어났다.
"이쪽은 타오. 작가예요. 이쪽은 제시카. 서로 인사하세요."
이렇게 타인이 나를 소개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나는 그런 소개를 받으면 손을 내 저으며,
“아니예요. 작가는 무슨. 아직 한 권도 쓰기 않는 사람이 무슨 작가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것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렇게 내 자신이 나를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낮술을 먹고 수업을 들었던 그날 일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서문을 어떻게 쓴다냐하고 푸념하다가 얻은 결론일 수도 있다. 이미 목차를 쓰고, 서문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미 시작을 했다고 스스로 에게 주술을 걸었다.
조금은 어색해도 내 스스로 부인하지 않기로 다짐을 두었다. 그리고, 작가(저자)라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세상은 달라졌다. 내게 말을 더 많이 걸어왔다. 자신의 색으로, 모양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들로 부쩍 늘어났다. 책속에서 저자들은 신이나서 내게 떠들어 댔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 통째로 먹어버릴 궁리를 한다. 유명화가의 그림을 보면서는 유쾌하게 베낄 궁리를 한다. ‘이 사람 그림 속의 사람은 생기가 있군.’ ‘이 작가, 뿔조개의 문양에서 영감을 얻었나. 그림에 순 그 문양뿐이네.’ 책의 저자의 생각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것을 통째로 꿀꺽하고 내 이야기인양 토해내는 이야기
(박흥용의 만화<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대목을 글로 옮김)

집을 나선지 석달, 이젠 제법 나그네 흉내를 낼 줄 안다.

스승 : ’이 놈아, 그 유기그릇에서 너를 찾아. 그렇지 않으면 우린 여기서 헛지랄 하는 거여. 우리 밥먹여 줄데는 여기 말고도 많다’
제자 : (유기그릇 들어서 그 안에 비친 모습을 들여다 보며) ‘사부님 여기 제 모습이 보여요.’
스승 : (그릇을 툭치며) ‘에라이 이놈아.’

스승 : ‘거기 뭐하고 있냐?’
제자 : (놋그릇 들여다 보며) ‘이 그릇이 기생 가희인줄 알았는데, 꼭 제 어미 같아요.’
스승 : ‘이제야 너를 찾았구나.’
(놋그릇 손가락으로 튕겨 소리를 낸다.)
두고 온 줄 알았는데 어느새 따라와 목 놓아 우는 가희.

박가(스승의 친구): ‘내 젊을 적에는 힘이 좋았지. 밤새워 밥그릇 녹여 요강만들고, 요강 녹여 밥그릇 만들고. 날 무시하는 양반네들 한테는 꼭 그렇게 복수를 했다이.’
박가: 그날도 오늘처럼 장호원 장날이었지. 놋그릇 지고 가서는..... 빛깔이 노르스름하고 잘잘하게 잔손질이 많이 간 술잔을 만났지 뭔가. 그 술잔이 내게 묻더군. 술집 작부새끼로 생을 살건가, 놋각쟁이로 살건가를.’

놋그릇을 대는 기생집에서 시비에 말린 기생을 도와주다 포졸 몇과 시비가 붙어서 싸움을 하고 난 후 도망을 온 후에.

스승 : (제자를 보고)‘미친눔, 기생을 보니 다 네 어미 같더냐?’ (친구 박가를 보고) ‘이보게 우리 쉬 다녀올 것이니 이놈 쓸 칼 하나 만들어주게.’

집을 꾸려 떠나는 일행을 보며
박가 : ‘황가야, 어디로 갈거냐?’
스승 : ‘ .....로 가야지’
박가 : (제자쪽에 묻는다.) ‘이보게 어디로 갈건가?’
제자 : ‘ .....로 가야죠’
박가 : (멀어지는 일행에게) ‘황가 네놈이 젊은 사람까지 다 버려 놨구먼. 어디 많이 돌아다니지 말고, 내 칼 잘 만들어 놓을 테니 얼른 돌아온나.’


작년에는 자신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은 자신의 길을 힘써 간 인생의 많은 선배들이 쓴 책을 통해서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뿌리가 어떤 것인지를 물었었고, 무엇이 하고 싶은지를 물었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었었다.

이 만화속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한 조각을 찾았다. 길을 나서는 지금,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면 정확히 어디라고는 말 하지 못하겠지만, ‘가야죠.’라고는 답할 수 있다.
‘.....로 가야죠.’

스승님 따라서 여행을 시작했을 때,
이야기 속의 젊은이가 스승을 따라 나서 집을 떠나올 때 이미 나그네가 된 것어럼, 모험이 시작된 것처럼,
나의 책을 쓰는 모험도 그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스승님은 내 안에서 뭘 보셨기에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셨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로 가야지.'라고 스승님 흉내를 내 본다.
IP *.72.1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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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8.02.02 01:53:54 *.208.192.83
"스승님은 내 안에서 뭘 보셨기에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셨는지 모르겠다." - 제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한숨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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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2.02 08:03:32 *.72.153.12
옹박. 밤을 새운 모양이네.

스승님께서 네게서 뭘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이거다 싶은 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매력을 가졌어.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물러서질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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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8.02.02 09:55:10 *.209.49.161
'임계질량'이라는 말이 있지요?
어떤 분야이든, 내용물이 찰 만큼 차면 변화가 온다는 말로 이해하고 있는데,

성장과 변화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계단형인 것 같지요.
계속적인 정비례의 직선이 아니고,
무수한 답보와 회한 속에서도 일정 분량이 차면
그 다음에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는 식이지요.

스스로 작가라고 인식한 다음의 마음작용이 참 보기좋네요.
그 맛을 한 번 보면, 계속해서 혼자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길꺼구요. 팍팍 달라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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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2.02 12:30:57 *.72.153.12
명석님,
한시간 후면 첫책에 관해서 이야기할 시간이 닥치는데,
무릎치면서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수업준비. 아이고~'
그러면서 웃어요. 아이고~
하루에도 열두번도 더 바뀌는 게 마음인지라. 흔들리면서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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