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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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내 것이 있었던가
(장면1)
노랗고 두꺼운 비닐 천 쪼가리가 촌스럽게 테이블에 깔린 식당이었다. 전날 까오삐악(라오스 쌀국수, 현지어)을 먹고는 값을 치르지 않은 사실을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번뜩 알게 됐다. 그 많던 종업원들은 국수를 먹은 뒤 그냥 그것도 느긋하게 걸으며 뻔뻔하게 눈까지 마주치며 나가는 나를 어이없이 바라 봤을 것 아닌가. 부끄러움 저 밑에서 올라온다. 퇴근을 서둘러 슬라이딩하듯 국수 집을 다시 찾았다. 어제 내가 돈을 내지 않았다며 주인인지 종업원지 모를 그녀에게 2만LAK(우리돈 3천원, 국수 값은 2천원)을 건냈다. 그녀는 알고 있다며 무덤덤하게 잔돈을 건 낸다. 무슨 일인가? 알면서 돈 달라 하지 않았단 말인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돈을 내지 않고 나가는 걸 알고 있었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돈을 지불하라 말하지 않았나?" 결정적인 답을 들으려는 순간 누군가 불러 그녀는 돌아섰고 나는 여전히 대화하듯 서 있게 됐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도야 어찌됐건 무전취식, 경범죄에 해당한다.
(장면2)
내 살고 있는 곳엔 일주일에 두 번 매반(Maeban, 현지어. 우리말로는 가사도우미쯤 되겠다. 청소 위주의 가사일을 도맡아 한다. 오해해선 안 되는 게 돈이 남아돌아 받는 서비스가 아니라 주택의 렌트 계약에 포함된 사항이라 싫어도 어쩔 수가 없다) 아주머니가 오신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일하다 보니 견물생심이라 가끔 도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는데 세제, 샴푸 등 생활용품은 일상 다반사여서 같이 쓴다 여긴다. 공유사회를 지향한다. 일찌감치 매반 아주머니 몫을 감안해 사 놓는다. 어느 날, 아내가 사준 선 크림이 사라졌다. 아내 얼굴이 떠올라 이건 꼭 받아야겠다 생각했다. 친구에게 부탁해 "내겐 소중한 물건이니 선 블록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라오스어로 적어 책상 위에 올려 놨다. 며칠이 지나도 갖다 놓지 않길래 내가 생사람을 잡았나 별별 생각을 다 하던 중에 어느 순간 집 나간 선 크림이 돌아와 있었다. 반갑기도, 뭔 일인가 싶기도, 순진하고 귀엽기도 한 건 왜인가. 가득 담겼던 선크림은 반 이상을 쓰고 난 뒤였다.
(그리고)
아끼던 헬멧과 산지 1주일된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야구시합(이만수 전 감독이 이끄는 '라오브라더스'와 매주 시합을 했다. 내 포지션은 포수, 이만수 감독의 특훈을 받기도) 이 끝난 토요일 오후, 타 들어가는 갈증에 Joma(조마, 환상적인 커피 맛을 자랑한다. 사회적 기업으로 유명한 라오스 대표 카페다. 친구 사이였던 캐나다인 4명이 여행 중 라오스에 반해 처음 세웠다. 그들 이름의 이니셜을 조합하여 JOMA라 지었다) 에서 파는 망고 쉐이크를 벌컥이는 중에 누군가 소리쳤다. "누가 네 자전거를 가져갓어!" 빛의 속도로 나와 보니 자전거는 온데 간데 없다. 아차, 헬멧. 나와 오랫동안 함께 등반하며 나를 지켜준 헬멧. 헬멧이 자전거에 걸려 있었다. 도둑놈은 나와 함께한 헬멧의 시간을 알까? 아, ㅆㅂ. 부디 좋은 주인 만나길 바란다.
히말라야 설벽에서 나를 구해줬던 사랑하는 헬멧을 잃고 2박3일 속이 쓰렸다. 지난 장면들을 느린 태엽으로 돌려본다. 치르지 않았던 국수 값, 초연했던 주인, 돌려받은 선크림, 잃어버린 새 자전거, 헬멧. 가져가도 그만 돌려주면 그만. 돈을 받지 않아도 그러려니, 네 것 내 것 구분 없이 가져가 쓰고 돌려달라 하니 선심 쓰듯 돌려주는 귀여운 도둑. 그래 잃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내 것 지키려 미친 개처럼 눈에 불을 켜고 살아도 어디 내 것이 이 세상엔 있었던가. 속상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또 알게 되지 않았느냐, 썩어질 물건 따위를 사랑하다니. 아끼는 물건은 애초에 만들지 말 일이다. 잃고 나니 쓸데 없는 되새김질에 마음이 상하지 않더냐. 결국 이리 되지 않았느냐, 아끼면 똥이 된다. 차라리 내 사람들을 아낄 일이다. 쫀쫀했던 쫌생이가 낯선 땅에서 드디어 대인배가 되어 가는가. 주머니 돈을 탈탈 털어 나는 이날 제일 비싼 저녁을 나에게 선물했다. 욕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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