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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5일 23시 06분 등록
아들 셋에 딸이 하나였던 우리 집에서 나는 막내딸이자 고명딸로 부모님께로부터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어려서 아빠의 얼굴은 늘 싱글벙글 미소 가득하셨다. 화내는 모습을 유년의 기억에서 좀처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언제나 자상하고 인자하셨다. 나는 아빠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자부심 가득 평온하고 충만하게 자랐다. 지금도 출근을 하실 때면 내게 그 까칠한 턱수염을 부비며 입맞춤해주시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때 나는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고 모든 어른들이 우리 아빠와 같이 자상하고 인자하신 줄 알았다.

엄마는 사람들에게 나를 일컬어 늘 “저 아이를 낳고 우리 집이 잘 되었다”고 말씀해 주시곤 하셨다. 그렇다고 나를 남들 앞에 내세워 자랑하시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엄마는 언제나 엄하셨다. 막내라서 비교적 엄마를 제법 졸졸 따라다니며 치마꼬리를 놓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따금씩 놀다가 어른들의 말씀을 엿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내가 알기로 남달리 공부를 유별나게 시키시거나 재능을 키워주려 애쓰시지도 않으셨다. 그렇지만 엄마의 그 말씀은 내게는 정말 자부심과 스스로 착한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마법으로 이끄는 매력 만점의 강력한 유혹과 효과 만발의 말씀이 되기에 충분했던 듯싶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도 인생의 밑천이 될 만큼 귀하고 소중한 유산의 말씀이 되기에 가히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지금도 이따금씩 옛일을 회상하실 때면 이 말씀을 빠트리지 않으시고 해주신다. 그러면서 오늘의 내게 위로와 염려를 동시에 하시며 “걱정하지 마라, 너는 잘 살 거야” 라고 말씀해 주신다.

학창시절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고 이렇다 할 재능으로 두각을 내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답답해하거나 막막할 일도 없었다. 두 분 가운데 누가 특히 나를 다잡아 놓고 가르치신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나는 예의범절이 바른 아이여야 됨을 숙지하며 자랐고, 누구를 보던지 인사를 잘하라는 말씀을 들으며 자랐다. 아니 그러한 행동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일상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아빠께서 그렇게 일러 주셨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아버지는 언제나 긍정적인 말씀을 살갑게 나누어 주셨다.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되어서도 당신의 그 자상함은 달라지지 않아서 다소 잔소리로 들릴 때가 더러 있기도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 보니 어려서 아빠와의 부드러운 대화는 우리 사남매로 하여금 유년을 무엇보다 편안하고 풍요로운 일상으로 인도하시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진다.

고명딸인 나에게 특히 지금과 같은 명절은 언제나 특별대우였다. 아니 당연히 내가 특별해 지는 날이었다. 가족 모두를 제켜두고 단연 내가 주인공이 되는 날이었으니까. 엄마는 내게 추석빔이나 설빔 따위를 거르신 적이 없으셨다. 그게 우리 집 명절이었으리라. 기억에 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내가 너무나 의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졸라댔는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명절엔 옷과 신발과 모자 등등을 선물로 받았고 게다가 용돈도 아주 후하게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늘 같이 설이 다가오는 날이면 나는 빨간 공단치마에 화려한 꽃무늬 수가 놓인 겨울 한복을 입을 수 있었다. 저고리는 색동이었고 겨울이기 때문에 토끼털 배자까지 갖추어 입었다. 조금 더 자라서 초등학교 2, 3학년 때에는 하여간 조금 극성맞았던 것인지 내가 직접 천과 색깔을 골라 맞추어 입기까지 하였을 정도다. 그러면 주단 집 아주머니도 제법 잘 고른다고 놀라면서 내가 고른 것으로 색을 맞추어 옷을 만들어주곤 하였으니 그리 엉터리 안목은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ㅋ)

머리는 엄마를 따라 미장원엘 다녀오던지 엄마의 구루쁘(플라스틱 롤)를 말아 곱슬머리로 만들던가 아니면 연탄구멍에 젓가락을 달구어 예의 그 애교머리를 만들어 그럴 듯하게 꾸미고는 노래를 부르거나 하면 수입이 아주 좋았다. 물론 그날의 용돈은 오빠들의 꼬임에 넘어가서 다 빼앗기는 불운을 면치 못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내 주머니에는 돈이 가득해서 오빠들의 부러움을 샀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끔은 머리에 엄마의 가발도 얹어 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남아 있는 사진에는 그 정도로 꼴사나운 것은 없는 것을 보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 집의 이러한 편애로 인하여 내 신상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빠들 가운데 가장 적수는 단연 막내오빠였다. 막내오빠와는 다섯 살이나 차이인데도 가장 나이차가 적은 관계로 우리 집 식구 가운데 나와 심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오빠들은 아예 나를 상대하지도 않고 아기 보살피듯 하는데, 막내오빠만은 유달리 형들이 시키는 심부름에 대한 화풀이를 내게 다 해댔다. 그러면 보나마나 깨지는 것은 당연 막내오빠임에도 그는 늘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자기만 늘 억울하다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오빠가 유난히 형제 가운데 키도 몸집도 작아서 내가 맞먹고 깔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그때 보다 더 어려서는 그 오빠를 내가 결혼할 상대에서 제외시켜버렸었다. 대여섯 살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남녀가 결혼하는 것이 오빠들 중에 골라야 하는 일인 줄 알았고, 나를 키우다시피 한 큰오빠나 키도 크고 잘생겼으며 공부도 잘하는 작은오빠 중에 신랑을 골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큰오빠는 운동을 아주 잘해서 늠름하고 멋있었다. 그러니 내가 우리 식구 가운데 제일 작고 못생겼으며 소갈딱지도 밴댕이인 그를 좋아할 까닭이 없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다 크고 보니 어려서 토닥토닥 많이 다투어 정이 들었는지 나이들어서는 더 말이 잘 통하기도 하더라.

엄마는 다른 것은 못해도 떡이랑 과일을 푸짐하게 준비하셨던 것 같다. 지금도 다락방에서 사과며 배 그리고 홍시를 꺼내먹던 생각이 나고, 흰 가래떡을 몇 말이나 뺐던 것인지 네모난 밥상과 교자상에 기다란 가래떡이 죽 나래비를 하고 뻗어있던 것이 생각난다. 요즘 같지 않게 엄동설한嚴冬雪寒에는 한강에 얼음이 얼고 자고나면 윗목에 물 사발이 얼어있던 시절이어서, 엄마는 마루나 윗목의 떡이 너무 딱딱하게 얼거나 굳기 전에 적당이 굳었을 때, 그 떡 모두를 썰어내시느라 칼질을 한 손에 물집이 잡혔던 기억이 난다. 떡을 다 썰고 나면 만두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먹기만 두꺼비가 파리 잡아먹듯 해대는 건장한 청년들만 득시글해서 음식을 해도 많이 해야만 했다. 녹두부침은 아예 신경질 나서 부치지도 못할 정도로 부치기가 무섭게 홀라당 집어먹어대기 일쑤였다. 특히나 명절에는 큰 집 오빠들이며, 외사촌 오빠들이 모두 우리 집으로 몰려와서 기거를 했다. 그래서 생선은 아예 굽지도 못했을 정도다. 마치 하숙을 치는 집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들 틈에 끼어 자라서 나도 먹는 품새는 여자가 아니다. 너무 잘 먹어서 도통 여성스런 맛을 찾아볼 수가 없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오빠들과 똑같은 숟가락과 밥그릇을 공유하며 차별 없이 자랐기 때문이라고 굳이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는 그것이 제일 이쁨받는 길이었으니까.

어려서 나는 밥을 잘 먹지 않고 사람들 손을 많이 타서 엄마가 아프실 때에는 도통 밥을 먹지 않아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을 지경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빠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상냥하게 다가오시어 뭐가 먹고 싶은지를 다 말해보라고 달래 주셨고, 몸이 허약한 나를 위해 쇠간이며 특히 닭을 잘 잡아 오셨는데, 그럴 때면 언제나 그 맛있는 간과 똥집이라 불렸던 모이주머니는 내 독차지였다. 아무리 맛나는 살코기가 아빠의 국에 들어가 있다손 치더라도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잠시만 기다리면 모두 내게로 건너오게 되어있었으니까. 그리고 소풍 때나 먹어볼 수 있는 바나나도 내가 먹고 싶다면 사들고 오셨다. 지금도 생각난다. 그 부드럽고 달콤하며 행복한 맛이 말이다. 그랬다. 그렇게 컸다. 아마도 우리 집에 조카들이 생기기 전까지는.

큰오빠와 나는 무려 열네 살이나 차이였는데, 그로인해 내가 중학교 때 오빠가 장가를 들었다. 오빠는 3년 만에 연년생으로 남매를 두었고 조카들을 부모님 품에 안겨드렸다. 그때부터는 나도 어엿한 시누이요 고모가 되어야 했다. 우리는 큰오빠 내외와 13년 동안 함께 살았기 때문에 나도 일찍 모성을 배우며 조카들을 돌보며 자랐다. 그 아이들이 벌써 시집장가를 다 들었으니 세월 참 빠르다. 얼마 전에는 작은 조카가 임신을 해서 다니러 온 김에 유아용품을 선물하여 보냈다. 나의 감회가 이토록 새로운데 큰오빠내외나 부모님 마음은 어떠하실까. 하기는 이제 내 친구들 아이들이 시집장가 간다고 청첩장이 날아들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문득 세월의 무상無常함에 절로 숙연해 지는 명절名節이다. 아니 어른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왜 이리 어찌나 세월이 점점 빨리 휙휙 지나가는지 원... .

잘 살아야한다. 정말 정신 차리고 좀 더 잘 살아가야 할 일이다. 마음 활짝 열고 크게 호흡하면서 다시금 새록새록 몇 번이고 새롭게 잘 살아가야 할 일이다. 어린 시절 색동저고리입고 웃어대던 함박웃음처럼. 그 사랑과 신뢰를 고이 간직하며 잘 살아가야 한다.

IP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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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수
2008.02.06 19:00:19 *.18.196.38
써니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왔고

명절 잘 보내. 그래도 부모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한
유아시절이 있어서 부럽네

새로운 길로 들어섰으니 끝장을 보자구
그리고 멋지게 살면되지 않겠어.

올 한해는 그대에게 축복받는 해가되길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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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2.06 19:59:15 *.70.72.121
ㅎㅎ
연구원모임에 일년 만에 나타나 밥 맥이고 나시더니 대번에 오라바이가 된 것 같으슈. 흥~
오빠노릇 하려시면 좀 더 멋지고 화끈하게 해주시라요. 내사 이레 뵈도 아직도 작은 사람은 안 쳐요. 메롱~

그래요. 열심히 해 봅시다례. 그리고 저희들 챙겨주셔서 늘 감사해요.
최고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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