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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7일 08시 33분 등록
기한이 임박한 줄을 알면서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다.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급한 사안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적잖이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른 채 황당하여 속이야 상할 테지만, 그리고 너무나 미안하지만 제발 이지 아직도 배때기에 기름기가 꽉 차서라거나 소싯적 감상에 놀아난다고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아니 얼른 무언가를 이루는 결실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할 텐데...

이제와 돌이켜보니 지금의 이 상황이 꼭 작년 이맘때와 너무도 흡사해서 나도 깜짝 놀랐다.
아침나절 느닷없는 후배의 전화를 받는 순간, 미안함에 고개를 숙이며 몸 둘 바를 찾지 못하였다. 선배에게 푸념하려고 전화했다는 그의 전화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만큼이나 길었다.

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정확히 지금처럼 변.경.연의 3기 연구원 공고가 나붙었을 때이다.
나는 사실 막판까지 이래야 할까 저래야 할까를 갈등하다 겨우 마감시간에 임박하여 65 페이지를 써 내려가도 끝이 나지 않는 나의 넋두리 같은 개인사를 일단 멈추고, 오십오 페이지로 싹둑 잘라 제대로 편집할 시간도 없이 덜렁 보내버리게 되었다.

사실상 이유인 즉은 그 즈음에 단기간의 목표로 국공립 임용고시에 지원하였다가 낙방하여 사립학교에라도 임용시험을 치르기 위해 지방을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방을 오르내리며 갈등하느라 마지막 순간까지 개인사에 집중하지도 못했다. 학교에서는 별다른 실력을 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운이 없어 그랬는지 내가 갈 자리는 아닌 것 같아 결과적으로 나는 임용을 포기하고 연구원 지원서를 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고도 현실적 갈등을 아슬아슬 넘나들며 흔들흔들 나의 일상은 계속 덜컹거리려 했다.
한 달간에 걸친 연구원 2차까지 심적 갈등 속에 치르고 난 후 레이스의 결과 발표가 나자마자 앞으로의 일상은 그토록 시시때때로 흔들리며 가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를 붙들어 무사히 수료식을 맞이하는 글까지 부적처럼 새기어 1년간 방을 붙여 놓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 학교 후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곳에 기간제 교사 자리가 났으니 지원해 보고 잘되면 정식으로 발령도 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정보를 흘려주는 것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면서 나는 기대하지도 않고 있는데 선배라고 챙겨주면서 정보를 주어 일단은 고맙지만 마음이 많이 떠나 있는 상태라고 설명하고, 우선 현재 일을 쉬고 있는 상태이니 알았다고 대답을 해놓고는, 그 즈음에 심사가 언짢은 일도 발생하고 해서 망설이다가 후배에게 연락도 하지 아니하고 지원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 나는 간단히 문자를 보내며 사과하고 나중에 전화를 하겠다고만 하였다. 내가 임용을 포기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연구원을 하는 동안 그 분야에 대한 관련서적을 읽지 않아 다 잊어버렸다는 염려와, 나이 먹은 선배가 후배를 앞세워 가서 행여 잘 못하거나 부족하여 그를 난처하게 하면 어쩌나 불과 1년 사이에 이런 생각이 들어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아마도 그곳에 가게 되면 당분간은 책을 쓰는 일에 전념할 수 없을 것이라는 핑계대기 좋은 적당한 구실과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였다.
언제나 처음 쉬게 될 때가 문제이지 한 달간만 넘기면 쉬는 일에도 아편중독처럼 쉽게 젖어들게 되기 때문일지 모른다. 특히나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움츠려 들어서 더욱 그러하다.

작년에 지방의 사립학교 교원임용 지원서를 냈을 때에도, 나는 학교에 임용되면 글쓰기와 함께 나의 생활을 안정되게 꾸려가고 싶은 것이 당시나 현재의 내가 가지는 가장 큰 욕심이다. 재직 기간 동안에 경력을 쌓고 아이디어를 모아 임상과 학교를 아우르는 치료 교육을 체계적으로 도모한 후에 정년이나 아니면 그 이전에라도 기반이 어느 정도 갖춰지면 <써니의 집>을 운영해 보고 싶은, 아직 본격적으로 임하기는 여러 가지 여건상 미흡하나마 계획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를 애써 끄집어내며 망설이다가 그만 넘겨버렸다. 그리고는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을 지도 몰라. 또 너무 늦게 써서 깨달음이 그만큼 늦어지면 무슨 이로움이 있겠어. 벌이야 좀 아쉽지만 밥보다도 책을 써볼 수 있도록 노력해 봐야지” 하고 내심 아쉬움의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나절에 이 후배로부터 안타까움과 푸념어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선배님, 어디 좋은 곳에 가셨던 거예요?” 하고서 말이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냥 공연히 그렇게 하고 말았는데 미안해서 아직 전화도 못했다고 쩔쩔 매며 이제라도 사과의 마음을 전하였다. 기가 막히는지 이 후배 하는 말, “선배님, 그러시다면 큰 실수 하신 겁니다. 아니, 왜 그러셨어요?” 하며 펄쩍 뛰는 것이다. 결국에 자기가 다 뽑았는데 당연히 원서를 냈을 줄 알았더니, 그래서 너무나 황당하고 깜짝 놀랐다며 그간의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 해주며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닌가.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다가 마침내 전화를 끊고 나니 어쩐지 또 마음 한구석에 스산한 바람이 밀려온다.

그는 나와 학번도 차이가 있어서 학교 때에는 일면식도 없었고, 그 후 그는 특수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나는 병원 한 구석에 처박혀 지냈기 때문에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언젠가 나는 구직을 위해 그가 임시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현장에서 통성명을 하다 보니 선후배 관계인지라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때에도 사실 나는 후배를 대하기에 조금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나름 나도 딴엔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후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 후배는 현직교사신분이면서도 야간에는 대학원에서 전공과목을 가르치고 있는데, 시간이 나는 방학 동안에는 일부러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학교에 몸담고 있지만 임상의 감각을 등한시 하지 않고 살려나가고 있다. 학교와 임상에 필요한 양쪽 일의 균형을 잡아 간극을 좁혀 나아가며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세우고 다지며 계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항시 바쁘기 때문에 만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할 시간도 따로 없었던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밥을 사려해도 극구 사양하며 먹어줄 시간도 없을 정도다.

이런 기회는 정말 쉽지가 않다. 그곳에서 그의 위치 또한 예사롭지도 않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내가 큰 실수를 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돈이 궁한 것도 다른 근심걱정이 있어서도 아니면서 자신의 역량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확장시켜 자신의 사명과 사상을 확립해 나간다는 것은 기특함을 넘어 지독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후배의 모처럼 만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챙겨주는 정보인데, 그것을 쓱 외면해 버리고 그것도 기별도 하지 않고 싹둑 잘라먹은 것은 사회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요즘 내가 너무 멍하니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잠시 우려될 정도이다.

무슨 복에 이런 후배가 있어 정작 당사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엉뚱한 딴 짓거리를 해대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의 지금의 생활과 상태를 주위에서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자꾸만 캐묻지만, 뭐라고 딱 불어지게 해줄 말도 없어 나도 난감하기 짝이 없다. 시작도 아니 한 일을 가지고 떠벌일 수도 없고 이야기 한다손 치더라도 어찌될지 몰라 막연한데다가 벌써 그들이 알기만 해도 꽤 오래 전부터 무슨 속셈인지 전에 없던 반응을 보이니 사방에서 들쑤시며 찔러대고 족쳐보려 한다. ‘어서 말을 해, 어서 말을 해’ 하고.

상시 비상사태로 가족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데다가 가까운 친구들의 경우에도 예의 그 의심에 찬 눈초리라니. 그래서 나도 친구들에게조차 말도 못 꺼낸다. “그래서? 그걸 쓰고 나면 뭐가 어떻게 될 건데? 네가 지금 세월 좋게 그런 것 할 처지니? 물론 알아서 할 테지만 내 보기엔 선후가 바뀐 것 같다.” 라고 말해줄 것이 뻔할 뻔데기 뻔자이기 때문이다. 설령 말을 안 하고 애써 침만 꿀꺽 삼킨다 해도 그게 그 말이니까 말이다.

쌀쌀한 겨울 바다를 헤매 듯 스산한 마음에 연구원 탐사일지에 들어가 보니 부지런한 연구원이 벌써 과제를 다 마치고 일찌감치 홀딱 올려놓고 있지를 않나, 아직 내 골머리는 터져나가기만 하고 이래저래 싱숭생숭 마음에 황량한 바람만 일렁이며 불어댄다. “나는 뭐야, 왜 맨 날 이 모양이람, 정신 좀 차리고 살아야지 정말 안 되겠네.” 독백을 소리쳐보지만 또 나의 흐린 하루 해는 속절없이 뉘엿뉘엿 넘어가고 갈 길은 멀게 느껴지누나.

하지만 이것도 잊지 말자. 저자소개란에 그럴 듯한 내세움의 경력관리를 위해서도 내 직장과 직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반해, 지금은 내 홀로의 모습으로도 당당하고 싶다는 것. 언제나 아슬아슬 흔들리고 불안해하는 모습까지도 적극적으로 받아드리고 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늘 일어나는 다른 일들의 습성처럼 지금의 이 현상도 내 안에 꽁꽁 숨겨놓고 두려움을 떨치려 용을 쓰며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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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2008.02.17 14:15:31 *.174.185.158
나는 모르겠소 어느 게 옳은 것인지.

우리는 어쩌면 옳고 그름의 기준을 벗어나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소.

세상의 모든 이들이 사이비라고 알고 있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 얘기를 아시지요? 그 사람들에게는 그나마도 붙잡지 않으면 더 이상 기댈 끈이 없기에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벗아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고 하지요...

누님이 믿고 실천하려는 일이 그런 류가 아님을 증거할 길은,
1) 책을 쓰시고
2) 꿈을 형상화 하는 수 밖에는 없을 듯 하오.

몇 년전,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기 위해 잠시 쉬며 자기 탐색 중이라 했더니 나이 지긋한 분이 그러더이다. "직장이 그런 데가 어디 있노?" 그 분 보기에는 내가 철 없어 보였겠지요. 내가 철없는 종자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세상이 서글퍼 보인 것도 사실이었더랬소.

나는 누님처럼 저지르는 성격도 못되고, 준비만 하다 세월 다 보내는 축에 속하오. 다행인 것은 자아탐색의 과정에서 내가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오. 알면 고칠 수도 있는 것이라 여기기에 그리 갑갑하게는 여기지 않소.

어쨌든 누님은 나 같은 젬병과 달리 이미 길을 떠난 사람이오. 사무친 무언가를 해결할 만병 통치약은 없을테지만, 벌써 작은 승리 하나는 코 앞에 다가와 있소. 우리를 자주 주저앉게 하는 유혹에서 자유로워지시오. 그 선배 같은 후배에게는 나중에 더 나중에 마음의 빚을 갚으시구려.

누님 하고 사는 모양새가 어이없이 여겨지는 분도 계시겠지만, 최소한 여기 들어오는 분들 대부분은 그리 생각하지 않으실게요. 전자에게 해명하기보다, 후자에게 '역시!'라는 감탄을 선물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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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2008.02.18 00:04:45 *.70.72.121
맞아. 변화교 중독성이 아주 강해요. ㅋ 우리끼리 하는 말, 당신은 변화를 믿습니까? ㅎㅎ

책 쓰고 꿈을 형상화하라는 명령이 마치 신의 음성처럼 무겁습니다려.
난 저지르기도 하고 금세 갈팡질팡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잘 하죠.

무서운 격려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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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성
2008.02.19 15:44:49 *.75.252.142
아마도 그 당시의 판단이 '최선'이었을 겁니다.
저역시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후회를 하고 살지요.
개인의 역사에는 'if' 는 없는 법이니, 등골을 후벼파는 바람이 지나가도
그 때가 옳았다고 자위하고 살게 됩니다.

누님은 이미 그 힘든 연구원 1년을 보냈으니
감히 최선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오늘은 그냥 웃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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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2.20 02:01:40 *.70.72.121
진짜루다가 순성님도 외골수에다가 뭣이냐 반골기질이 있네 그려. 그럼 그래야제, 사내는 절개 빼문 시체랑게. 고로 끝까정 밀어야 뒤아.ㅋ

속이 좀 쓰리당게요. 따논 당상이었는디... ㅠ.ㅠ 나가 주제도 몰라불고 요즘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라. 울 오마니 아시면 당장에 쫓겨나지라. 그래도 아마 봐주셔야 될 끼요. 왜냐면 나가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지라. MRI 더하기 MRA 찍으러. 까이꺼 웃어 뻔지고 있소. 우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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