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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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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3일 16시 55분 등록

카오산에 가면


세상이 지랄 맞을 땐 지척에 있는 방콕 카오산 거리로 갔다. 줄줄이 봐야 할 방콕의 다른 관광지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카오산으로 곧장 질러 들어가 거리에 들어서면 왜 뽕 맞은 것 마냥 안도하게 되는지는 모른다. 허리띠부터 풀었다.

 

저마다 배낭을 들쳐 맨 이유가 있겠지만 분명하고 공통된 하나는 자유에 대한 그리움일 것. 나를 옥죄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 반항, 탈출 같은. 인간 밖의 인간에 관한 충일한 노스텔지어의 행렬 그리고 행렬. 저 다 해어진 신에 저 더러운 옷에 덕지덕지 묻어 빛나는 영혼. 해는 중천이고 후줄근한 반바지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온 거리. 늦은 아침을 맥주 한잔으로 때우고 나만 그런가 하고 보니 죄다 그렇게. 타인이라지만 꼭 나와 같은 인간들만 서식하는 이곳이 편한 이유. 늦게 일어나는 게 특별하지 않고 어슬렁대는 게 낯설지 않은. 웃음끼 사라진 얼굴로 거닐다간 어딘가로 조용히 끌려갈 것 같은. 너에게 내가 살고 내 안에 마치 너희들이 사는 것 같은.

 

그러고 보니 여기 사람들 모두가 하나의 온전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발악 같기도, 꼭 그와 같은 이유로 온전한 사람이기를 거부하는 몸 부림 같기도. 마지막 남은 시적 세계의 보루 같은 거리. 하염없이 예뻐 보이는 연인들의 속삭임은 사랑으로 살아야 할 나 라는 인간이 얼마나 메말라 있었던가를 알게 하고 때 되면 써내야 할 주간업무보고가 사라진 세상을 그렇게 바라면서도 결국, 그것도 기한을 충실하게 지켜가며 꼬박꼬박 써 냈으니 용기박약한 찌질이. 이들처럼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째째함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곳 한가함을 기어코 글발에 녹이려 길게 쓰다 자기에게 걸려 넘어지고 마는.

 

누군가 큰 배낭을 맨 채로 즐거운 가락에 춤추며 걸어가면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즐거워 따라 추고, 따라 추는 그들이 마냥 흥겨워 지나는 사람들이 허리를 꺾으며 때로 춤추는 이곳을 나는 왜 이제야. 누군가 춤을 춰야 억지로 따라 추는 수동태 문장 같은 삶, 춤추는 곳을 멀찍이 보며 대리만족하는 삼인칭 같은 일인칭의 삶. 이때까지 그렇게 살았으면 이제는 훨훨 날 때가 됐는데도 여전히 송사에 얹혀 질문 뒤에 숨어사는 비겁. 카오산에 반했으나 여전히 살아있지 못하고 춤추지 못하는 나를 가만 둘 수 없는 하루.

 

사람은 도시를 짓고 도시는 거리를 만들었다지. 도시가 모여 국가라는 선으로 경계 짓고 아프리카의 슬픈 국경선 같은 것들을 만들며 너와 나를 구분하기 바빴지만 분명 카오산은 지구별 온 나라가 힘을 보태 구분, 경계, 차별 없는 단 하나의 거리는 만들자, 모든 호모사피엔스가 출렁거리며 걸을 수 있는 거리 하나는 우리 지구에 남겨놔야 하지 않겠냐며 만든 거리. 그러지 않고서야. 이 여행을 끝내 마치고 싶지 않다는 바람. 어지럽게 마침표는 찍지만 문장을 마치는 종결 어미를 숨겨 끝나지 않는 여행이 되도록. 빌어먹을 월간보고는 책상 끝으로 밀어내고 오늘 카오산.

 

(카오산 거리는 태국의 수도 방콕 중심 서편에 있다. 차오프라야 강을 향해 뻗은 400여미터 남짓한 거리다.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성지, 베이스캠프라 불린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배낭여행자들과 그 자유를 맛보려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왁자지껄한 광경을 연출한다. 설 연휴 내내 카오산 거리에 살며 낮에 마시고 밤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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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08:47:19 *.36.146.158

갑자기 방콕 이야기가 나와서,,,아 예전글은 라오스 이야기였는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글 마지막 부분에 보니 설 연휴때 다녀오신 이야기라고,, 


방콕에 갈 때 카오산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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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6 06:07:04 *.144.5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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